탈옥, 새벽을 향한 폭주
쿠구구구궁—!
기함 ‘아르카디아의 새벽호’ 하부 격벽이 찢어지는 듯한 둔중한 진동이 지하 독방의 강철 바닥을 타고 올라왔다. 천장에 매달린 노후화된 배관들이 비명을 지르며 붉은색 비상 경보등의 점멸에 맞춰 녹슨 먼지를 뿜어냈다. 중력 제어 장치가 순간적으로 요동치면서 이준의 몸이 허공으로 살짝 떴다가 다시 차가운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관자놀이를 바늘로 쑤시는 듯한 극심한 두통이 들이쳤다. 머리카락 절반이 하얗게 새어버린 대가는 가혹했다. 왼쪽 안면은 여전히 감각이 죽어 굳어 있었고, 거칠게 숨을 쉴 때마다 입술 한쪽 끝에서 마른 침이 흘러내렸다. 은빛 방사선 피막이 흐릿하게 뒤덮인 이준의 눈에는 오직 붉은색 경보등의 잔상만이 기괴한 궤적으로 보일 뿐이었다.
하지만 이준은 품에 안은 스승 켄트의 유산, ‘스텔라 마리나’의 가죽 표지를 더욱 꽉 움켜쥐었다. 손가락 끝 신경을 통해 뇌리로 전송된 타르타로스 크랙의 중력 공식들이 그의 대뇌 피질에서 미친 듯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남은 시간은 3시간도 없다…….’
그때였다. 지이이잉— 쾅!
독방의 두꺼운 합금 전자문이 불꽃을 튀기며 강제로 개방되었다. 비상 전력마저 완전히 차단되어 칠흑 같은 어둠이 찾아온 순간, 이준의 ‘심안 [양자 잔상 감지]’이 번뜩였다. 어둠 속에서 반투명한 푸른빛의 열원 실루엣이 급박하게 뛰어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검은색 가죽 전술 슈트, 흐트러진 붉은 포니테일 머리칼. 호위 대장 세라였다.
“이…… 준.”
세라의 목소리는 가쁘게 떨리고 있었다. 그녀의 우측 어깨 장갑판은 제국군의 포격 충격으로 인해 찢겨 나가 있었고, 그 틈새로 붉은 혈흔이 번져 있었다. 그녀가 쥔 플라즈마 블레이드 ‘발키리’의 자루에서 새어 나오는 희미한 주황빛이 이준의 굳어버린 얼굴을 비추었다.
“세…… 라 대장.”
이준의 마비된 왼쪽 입술 틈새로 바람 빠지는 듯한 쇳소리가 새어 나왔다. 발음이 뭉개졌지만, 세라는 단번에 알아듣고 그의 팔을 잡아 일으켰다.
“시간이 없어. 제국군 한스 중령의 정찰 순양함 3척이 전방 침로를 완전히 차단하고 폭격을 시작했어. 기함의 외벽 장갑이 벌써 세 군데나 찢어졌다. 이대로 가다간 도약 게이트 근처에도 못 가보고 이 지하 감옥에서 수장당할 거야.”
세라가 전술 칼날로 이준의 손목을 묶고 있던 전자 수갑의 연결부를 내리쳤다. 스파크가 튀며 쇠사슬이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함교는 지금 아수라장이야. 고르돈 위원장은 겁에 질려 통제권을 잃었고, 한도윤이 지휘권을 쥐고 제국군에 항복 신호를 보내려 하고 있어. 녀석이 10만 난민의 목숨을 제국에 팔아넘기기 전에 당장 함교를 장악해야 해.”
“도…… 윤이가.”
이준은 입술을 깨물었다. 배신자 한도윤. 녀석은 이준이 지하 감옥에 갇힌 틈을 타 함대의 마지막 생명줄을 제국의 손에 쥐여주려 하고 있었다. 이준은 품속에서 세라가 바꿔치기해 돌려준 진짜 ‘양자 크로논 나침반’의 서늘한 청동 감각을 확인했다. 나침반은 마치 함교의 위기를 경고하듯 손바닥이 저릴 정도로 차갑게 진동하고 있었다.
“안내…… 하십시오. 함교로 가야…… 합니다.”
이준의 뭉개진 목소리에는 타협 없는 결의가 서려 있었다. 세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준의 어깨를 부축했다.
지하 감옥을 빠져나와 델타 구역의 복도로 들어서자, 아수라장이 눈앞에 펼쳐졌다. 난방 장치가 꺼지기 시작한 복도에는 성에가 하얗게 끼기 시작했고, 피난민들의 비명과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좁은 통로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천장의 스피커에서는 한도윤의 차갑고 정돈된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난민 자치위원회와 임시 지휘부는 선포합니다. 더 이상의 무의미한 저항은 10만 아르카디아 시민들의 완전한 소멸을 초래할 뿐입니다. 본 함대는 신성 티베리우스 제국의 정찰 편대에 항복 의사를 타전할 준비를 마쳤습니다. 시민 여러분은 동요하지 말고 각 구역에서 대기해 주십시오…….]
“미친 놈이 결국 일을 저지르는군.”
부축하던 세라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준은 심안으로 복도의 전자기 흐름을 읽어냈다. 함교로 통하는 정면 승강기는 이미 고르돈의 사설 경비대와 한도윤의 추종자들에 의해 락다운되어 있었다.
“정면 승강기는…… 막혔습니다.” 이준이 발음이 새는 입을 움직여 나직하게 말했다. “지하 감옥 바닥 아래…… 설계도에 없는 전자기 통로가…… 있습니다. 나침반이…… 그곳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세라는 망설임 없이 이준의 지시에 따라 좁은 하부 위생 정화조 환기구 우회로로 몸을 던졌다. 어둡고 좁은 통로를 통과하는 내내, 기함 외벽을 타격하는 제국의 플라즈마 포격 소리가 고막을 찢을 듯이 울렸다. 1등급 위협인 한스의 정찰 편대가 뿜어내는 포화는 기함의 얇은 장갑판을 사정없이 으스러뜨리고 있었다.
얼마나 달렸을까. 마침내 함교 하부의 비상 탈출 해치 앞에 도달했다. 해치 너머로 함교 내부의 소란스러운 소리들이 흘러나왔다.
“서우진 소위! 당장 조종간에서 손 떼고 제국군 수신 주파수를 열어!”
로버트 함장의 노쇠하지만 단호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함장의 목소리는 곧바로 사설 경비대원들의 장전 소리에 묻혔다.
“함장님, 노망이 나셨습니까? 제국의 대함대가 들이닥치기 직전입니다! 항복하지 않으면 우리는 30분 내로 우주의 먼지가 됩니다!”
한도윤의 오만한 목소리였다. 녀석은 이미 함교의 전권을 찬탈하고 함장을 무력으로 압박하고 있었다.
세라가 이준을 벽에 기대어 세워두고 플라즈마 블레이드 ‘발키리’를 뽑아 들었다. 주황색 광선 날이 공기를 가르며 날카로운 파열음을 냈다.
“이준, 내가 문을 연다. 준비해.”
세라가 해치의 비상 수동 개방 레버를 발로 걷어차며 콘솔에 검을 찔러 넣었다. 전자기 실드가 파열되며 강철 해치가 강제로 비틀려 열렸다.
쿠콰쾅—!
“치안 호위대다! 전원 무기 내려놓아!”
세라가 함교 내부로 돌입하며 소리쳤다. 갑작스러운 난입에 고르돈의 사설 경비병들이 총구를 돌리려 했으나, 세라의 움직임이 더 빨랐다. 그녀는 전술 슈트의 추진력을 가동해 가장 가까운 경비병의 턱을 검자루로 가격해 쓰러뜨렸고, 비살상 충격탄을 바닥에 던졌다.
피지직! 강력한 전자기 펄스가 함교 내부를 휩쓸며 경비병들의 무기를 일시 마비시켰다.
“세라 대장! 자네 미쳤나! 반역자와 손을 잡고 함교를 습격하다니!”
함교 한편에 사설 경비대의 호위를 받으며 서 있던 고르돈 위원장이 비명을 질렀다. 그의 옆에는 차석 항해사 서우진이 조종간을 잡은 채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었다.
이준은 지팡이를 짚고 비틀거리며 함교 중앙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의 은빛 눈동자는 허공을 향해 있었지만, 머릿속의 심안은 조종 콘솔 앞에 서 있는 한도윤의 붉은 열원 실루엣을 똑똑히 포착하고 있었다.
“도윤아…….”
이준의 목소리가 함교의 사이렌 소리를 뚫고 나직하게 울렸다.
한도윤은 조종 콘솔의 메인 전산 단말기 앞에서 제국군 통신 주파수를 입력하던 손을 멈추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의 차가운 눈매에 경악과 분노가 교차했다.
“신이준…… 네가 어떻게 여기에 있는 거지? 세라, 감히 반역자의 탈옥을 돕다니 너도 끝이다.”
“반역자는…… 네놈이다, 도윤아.”
이준이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그의 머리카락 절반이 하얗게 샌 모습이 함교의 붉은 비상등 불빛 아래 비장하게 드러났다. 서우진이 이준의 접근을 막기 위해 조종간에서 손을 떼고 몸을 던지려 했으나, 세라가 그의 목덜미에 플라즈마 검날을 들이밀었다.
“움직이지 마, 서우진 소위. 네놈이 잡은 침로는 함대를 블랙홀의 인력 속으로 처박는 자살 행위다.” 세라의 목소리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한도윤, 당장 조종간에서 물러서라.” 로버트 함장 역시 사설 경비병들의 총구 속에서도 품위가 바랜 황동 지휘봉을 쥐고 도윤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한도윤은 비열하게 웃으며 메인 콘솔의 강제 송신 버튼 위에 손가락을 얹었다.
“늦었습니다, 함장님. 제국의 기함 한스 중령님께 우리 함대의 최종 동기화 코드를 전송하기까지 단 10초도 남지 않았습니다. 이 눈먼 애송이가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포격의 충격으로 함교 천장이 무너져 내리며 불꽃이 튀었다. 10초. 그 시간이 지나면 새벽호의 제어권은 완전히 제국군에게 넘어가고, 10만 난민은 학살당할 터였다.
이준은 망설이지 않았다. 그는 나침반을 쥔 손을 뻗어 조종 콘솔로 돌진했다.
‘비인가 양자 신경 접속 금지령.’
인공지능의 정신 지배와 뇌 신경 오염을 막기 위해 사관학교 시절부터 뼈에 사무치도록 주입받았던 절대적인 금기. 그것을 어기는 자는 즉각적인 자아 붕괴와 사형에 처해진다는 법률.
하지만 이준의 머릿속에는 오직 하나, 10만 명의 난민들을 살려야 한다는 숭고한 맹세만이 남아 있었다. 그딴 법률은 고향 행성이 제국의 폭격에 증발할 때 함께 타버렸다.
이준은 자신의 방사선 차단 슈트 손목 부근에 내장된 인공 신경 링크 포트를 강제로 뜯어냈다. 가느다란 은색 커넥터 케이블이 흘러나왔다. 그는 주저 없이 그 케이블을 새벽호 메인 조종 콘솔의 고압 양자 데이터 포트에 직접 찔러 넣었다.
“미친 짓이다! 당장 중단해!” 서우진이 경악하여 비명을 질렀다.
콰아아아아앙—!
접속과 동시에, 기함 전체의 방대한 전산 데이터와 제국군 한스 편대의 포격 좌표 정보가 이준의 뇌 신경망으로 직접 역류해 들어왔다.
“아아아악—!”
이준의 입에서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뇌가 통째로 불타는 듯한 극심한 충격파가 그의 전신을 강타했다. 그의 은빛 눈동자 주변의 모세혈관들이 일제히 파열되며 붉은 피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머리카락 끝에서부터 푸른 양자 에너지가 불꽃처럼 피어올랐고, 그의 전신 혈관이 시퍼런 빛을 내뿜으며 피부 위로 튀어나왔다.
[경고! 비인가 양자 신경 접속이 감지되었습니다. 사용자: 신이준. 대뇌 피질 과열율 85%. 신경망 괴사 위험 경고!]
아르고의 붉은 경고음이 함교를 가득 채웠다. 하지만 그 순간, 이준의 뇌파가 새벽호의 메인 코어와 완벽하게 동조하기 시작했다. 한도윤이 심어두었던 감시 백도어 프로그램들이 이준의 압도적인 양자 정신력에 밀려 순식간에 포맷되며 지워져 나갔다.
지이이잉—!
꺼져가던 함교의 메인 홀로그램 스크린이 다시 푸른빛을 되찾으며 기함의 모든 레일건 포탑과 엔진 제어권이 이준의 손끝으로 완전히 귀속되었다.
이준은 피눈물을 흘리며 조종간을 움켜잡았다. 그의 전신 혈관이 푸른 양자 에너지로 밝게 빛나는 모습은 마치 우주의 심연에서 걸어 나온 눈먼 성자 같았다.
“막…… 았습니다, 도윤아.”
이준이 피가 섞인 숨을 내쉬며 낮게 읊조렸다.
그러나 카타르시스도 찰나였다. 완벽하게 전술망이 차단당했음을 깨달은 한도윤의 얼굴이 극도로 일그러졌다. 그의 눈동자에 광기가 서렸다. 도윤은 품속에서 제국제 군용 권총을 뽑아 들었다.
철컥—!
차가운 총구가 이준의 왼쪽 가슴, 그의 심장을 정확히 겨누었다.
“조종간에서 손 떼, 신이준. 네가 아무리 기적을 일으켰어도, 내 총알보다 빠를 수는 없다.”
도윤의 손가락이 방아쇠를 당기기 직전의 팽팽한 긴장감이 함교의 공기를 얼려버렸다. 그리고 그 순간, 함교 외부 전면 스크린 너머로 제국군 한스 편대의 2차 플라즈마 어뢰 3발이 붉은색 파멸의 궤적을 그리며 새벽호를 향해 쇄도해 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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