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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의 24시간과 푸른 바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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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는 눈먼 자에게 더 정직한 법이다.


아르카디아 피난 함대의 기함, ‘아르카디아의 새벽호’ 상부에 위치한 제1항해 관측실은 언제나 차가운 침묵에 잠겨 있었다. 사방이 투명한 강화 아크릴 돔으로 둘러싸여 은하의 성간 먼지와 블랙홀 ‘아페이론’의 붉은 광륜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곳이었지만, 그 모든 풍경은 신이준에게 무의미했다. 그의 두 눈은 은빛 방사선 피막으로 뒤덮여 흐릿한 백색 낙인처럼 변해버린 지 오래였기 때문이다.


이준은 어둠 속에 앉아 있었다. 그러나 그 어둠은 텅 빈 공허가 아니었다. 시각을 잃은 대가로 개화한 그의 초감각, ‘심안’은 우주 공간을 가득 채운 보이지 않는 암흑 물질의 도도한 조류를 완벽하게 그려내고 있었다. 은밀하게 요동치는 중력선의 비틀림, 성간 가스의 미세한 마찰음, 그리고 저 멀리서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아페이론 블랙홀의 숨결까지.


째깍. 째깍.


이준의 왼손에는 늘 낡은 청동 나침반이 쥐여 있었다. 함대의 쓰레기 하역장에서 먼지 구덩이에 파묻혀 있던 것을 우연히 주운 물건이었다. 아무런 전력원도 없으면서 미세하게 푸른 광륜을 내뿜는 정체불명의 고대 유물. 이 나침반의 청동 바늘은 우주의 북쪽이 아닌, 이준의 심장박동과 동조하듯 불규칙하게 떨리고 있었다. 나침반을 꽉 쥘 때마다 관자놀이 깊은 곳에서 정체불명의 양자 파동이 일어 이준의 심안을 더 정밀하게 다듬어주곤 했다.


"이상해."


이준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의 손끝이 나침반의 차가운 금속 표면을 쓸어내렸다.


암흑 물질의 흐름이 평소와 달랐다. 아페이론 블랙홀의 중력장에 밀려 일정하게 흘러야 할 성간 조류가, 갑자기 어떤 거대한 인위적인 형체에 가로막힌 것처럼 부자연스럽게 꺾이고 있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유령들이 새벽호의 목덜미를 향해 소리 없이 다가오는 형국이었다.


"아르고, 전방 50광년 구역의 중력파 왜곡 수치를 재연산해줘. 암흑 조류의 흐름이 꺾이고 있어."


이준이 관측실 중앙 콘솔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그의 목소리를 인식한 구형 보조 인공지능 ‘아르고’의 푸른색 구체 홀로그램이 허공에 떠올랐다.


[삐익. 항해사 신이준. 제1항해 관측실의 능동 센서 및 중력 감지 장치는 모두 정상 범위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외부 전자기 신호 감지율 0%. 적대 세력의 열원 반응 역시 포착되지 않았습니다. 단순한 성간 가스의 불규칙한 요동으로 판단됩니다.]


아르고의 기계적인 음성은 한없이 차분했다. 계기판의 수치는 완벽한 연두색 평온을 가리키고 있었다. 하지만 이준의 심안이 느끼는 감각은 전혀 달랐다. 암흑 물질의 비틀림은 점점 더 기괴한 나선형을 그리며 기함의 우현 사각지대를 향해 좁혀지고 있었다. 그것은 자연적인 현상이 아니었다. 고도로 차폐된 제국군 함선들이 기습을 위해 진형을 전개할 때 일어나는 인위적인 중력 굴절이었다.


"아니, 이건 단순한 요동이 아니야. 무언가 다가오고 있어. 함교에 긴급 무선을 연결해줘. 당장 회피 궤도를 잡아야 해!"


[경고. 항해사 신이준. 현재 당신은 임시 조종 권한만을 가지고 있으며, 공식 군사 경보를 발령할 권한이 없습니다. 자치위원회의 규정에 따르면 비인가 경보 발령은 엄격히 금지되어 있습니다. 진정하십시오.]


아르고는 차가웠다. 눈먼 애송이 항해사의 직관 따위는 시스템의 숫자보다 가치 없다는 듯이. 이준의 가슴 속에서 지독한 무력감이 솟구쳤다. 아무리 소리쳐도 전해지지 않는 경고, 눈이 멀었다는 이유로 묵살당하는 진실. 이준이 나침반을 쥔 손에 힘을 주자, 관자놀이 부근에서 바늘로 찌르는 듯한 예리한 두통이 일었다.


그리고 그 순간, 우주가 찢어졌다.


아무런 예고도, 경보음도 없었다. 공간의 왜곡을 뚫고 신성 티베리우스 제국의 제4정찰편대가 발사한 플라즈마 탄도탄들이 새벽호의 보호막이 꺼진 사각지대를 그대로 관통했다.


쿠구구구궁!


관측실 바닥이 미친 듯이 요동치며 이준의 몸이 벽면으로 사정없이 날아갔다. 둔중한 충격음과 함께 돔 천장의 강화 아크릴에 거미줄 같은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이준의 머릿속에 수만 마리의 매미가 울부짖는 듯한 이명이 터져 나왔다.


"아르고! 상황 보고!"


[치직…… 칙…… 경고. 기함 우현 격벽 붕괴. 산소 누출율 45%. 메인 방어막 시스템 완파. 제3동력실 하이퍼드라이브 반응로 급격한 온도 상승…… 치직…….]


붉은색 비상등이 깜빡이며 눈먼 이준의 시야에 희미하고 기괴한 붉은 잔상을 남겼다. 그러나 비극은 기함 내부에서 끝나지 않았다. 이준이 황급히 심안을 개방하자, 기함 새벽호의 측면을 호위하던 동반 피난선 ‘알테어호’의 양자 잔상이 그의 머릿속에 투시되었다.


그 알테어호를 향해, 제국 정찰대장 한스 중령의 기함이 발사한 은빛 플라즈마 어뢰 3발이 빛의 속도로 쇄도하고 있었다.


"안 돼……!"


이준이 절규하듯 소리쳤지만, 그의 목소리는 진공의 우주로 전해지지 않았다.


콰아아아앙!


알테어호의 메인 엔진룸에 어뢰가 정면으로 충돌했다. 3천 명의 아르카디아 피난민이 탑승하고 있던 순양함은 단 1초 만에 거대한 화염 구체로 변모하며 산산조각이 났다. 수천 개의 금속 파편과 얼어붙은 시신들이 어둠 속으로 비참하게 비산하는 모습이 이준의 심안에 잔인할 정도로 선명하게 각인되었다. 10만 명의 피난민을 구하겠다던 숭고한 다짐이, 압도적인 폭력 앞에서 먼지처럼 스러지는 순간이었다.


[경고. 제3동력실 폭발 임박. 승조원 전원 비상 탈출…… 치지직…… 탈출 포드가 작동하지 않습니다…….]


아르고의 음성은 노이즈 속에서 완전히 뭉개졌다.


새벽호의 뼈대가 물리적인 한계를 넘어서며 삐걱거리는 소리가 관측실 돔 전체를 흔들었다. 공기가 급격히 빠져나가며 이준의 폐가 쪼그라들기 시작했다. 숨을 쉴 때마다 목구멍으로 비릿한 피비린내와 타들어 가는 냉각수의 독한 냄새가 밀려 들어왔다. 피부가 찢겨 나가는 듯한 우주의 냉기가 그의 전신을 얼려 붙였다.


휘이이잉!


마침내 강화 돔의 균열이 한계를 이기지 못하고 깨져 나갔다. 살을 에는 진공의 인력이 이준의 몸을 우주 공간으로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이준은 부서진 콘솔 프레임을 필사적으로 붙잡으며 버텼지만, 그의 손가락 끝은 이미 감각을 잃고 미끄러지고 있었다.


저 멀리서 제국군 기함의 은색 사이보그 안면 마스크를 쓴 한스 중령의 홀로그램 통신 장벽이 잠깐 스쳐 지나간 듯했다. 유기물 생명체를 한낱 벌레처럼 취급하는 싸늘한 조소.


끝이었다. 함대는 몰살당했고, 그가 사랑했던 동생 이현의 마지막 오르골 멜로디도 이 우주의 먼지 속에서 영원히 지워질 터였다.


죽음의 불길이 기함 하부에서부터 솟구쳐 올라와 이준의 발밑을 덮쳤다. 뜨거운 열기가 그의 전신을 불태우는 극단의 고통 속에서, 이준은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짜 왼손에 쥔 양자 크로논 나침반을 움켜잡았다.


'살고 싶어. 살아서…… 모두를 구해야 해.'


그 처절한 염원이 이준의 혈관 속에 잠들어 있던 고대 개척자들의 유전 유산, ‘크로노스 인자’를 강제로 자극했다. 이준의 손가락 끝에서 흘러내린 붉은 피가 나침반의 청동 표면에 닿는 순간.


화아아아악!


나침반 내부의 보이지 않는 태엽 기어들이 기괴한 금속성을 내며 역회전하기 시작했다. 나침반의 중심에서 뿜어져 나온 푸른 양자 광륜이 폭발하듯 전개되며 이준의 전신을 감쌌다. 관자놀이 깊은 곳, 대뇌 피질 전체가 양자 마찰의 고열로 인해 타들어 가는 듯한 회색빛 고통이 밀려왔다. 머릿속의 신경 세포들이 소리 없이 비명을 지르며 타들어 가고, 그의 소중한 기억들이 양파 껍질 벗겨지듯 강제로 마모되는 감각이 일었다.


우주가 거대한 청동 거울처럼 산산조각이 나며 뒤로 흐르기 시작했다.


빛들이 역류하고, 알테어호의 폭발이 다시 화염 속으로 빨려 들어가 수축했으며, 새벽호의 격벽을 찢던 플라즈마 탄도탄들이 발사관 속으로 되돌아갔다. 시간의 흐름을 거스르는 인과율의 거대한 반작용이 이준의 의식을 어둠의 심연 속으로 사정없이 밀어 넣었다.


***


"흡……!"


이준은 단숨에 숨을 들이켜며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지독한 오한과 함께 온몸이 땀으로 흥건히 젖어 있었다. 심장이 갈비뼈를 부술 듯이 거세게 요동쳤다. 이준은 황급히 자신의 관자놀이를 짚었다. 왼쪽 관자놀이 부근이 마치 달구어진 인두로 지진 것처럼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고, 미세한 안면 마비 증상으로 인해 왼쪽 입꼬리가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귀에서는 삐이- 하는 날카로운 이명이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손끝에 닿는 것은 우주의 진공도, 불타는 열기도 아니었다. 부드러운 침대의 시트 가죽이었다.


이준은 흐릿한 두 눈을 깜빡였다. 여전히 은빛 방사선 피막이 시야를 흐리고 있었지만, 그의 심안은 즉각 주변의 지형을 잔상으로 읽어냈다.


둥근 돔 형태의 천장, 익숙한 항해 콘솔, 그리고 조용히 째깍거리는 나침반의 미동.


이곳은 새벽호의 제1항해 관측실이었다.


[삐익. 항해사 신이준. 바이탈 신호의 급격한 상승이 감지되었습니다. 대뇌 피질의 주파수가 임계 수치를 초과했습니다. 긴급 의료 지원을 요청할까요?]


아르고의 기계적인 음성이 들려왔다. 너무나도 평온하고, 상처 하나 없는 깨끗한 시스템의 목소리.


이준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침대 옆 탁자 위의 디지털시계를 더듬어 만졌다. 홀로그램 시계가 가리키는 시간은 정확히 제국군 한스 편대의 기습 폭격이 시작되기 24시간 전이었다.


그가 쥔 청동 나침반의 푸른 바늘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고요하게 제자리에서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회귀했다.


나침반이 시간의 궤도를 되돌려, 그를 파멸의 기점 24시간 전으로 정확히 데려다 놓은 것이다. 그러나 안도감은 채 일초도 가지 않았다. 이준은 자신의 뇌세포 일부가 영구히 타버렸음을, 그리고 이 파멸을 막아내지 못하면 정확히 24시간 뒤 10만 명의 난민과 자신이 다시 한 번 우주의 먼지로 증발할 것임을 직감했다.


시계의 숫자는 무자비하게 줄어들기 시작했다.


남은 시간, 24시간. 눈먼 항해사의 고독한 루프 투쟁이 이제 막 서막을 올렸다.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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