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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묘지기의 피리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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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소백의 예리한 질문이 정적을 깨는 순간, 소년은 빗자루를 쥔 손끝에 조용히 힘을 뺐다.


연무장 가장자리의 진흙터는 얼어붙은 서리 안개와 뒤섞여 기분 나쁜 냉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혁련풍은 바닥에 엎드린 채, 백색 삼베천 아래의 눈동자를 미세하게 굴렸다. 어젯밤 조필에게 사정없이 걷어차였던 옆구리 갈비뼈가 숨을 쉴 때마다 욱신거렸고, 방금 전 마위의 발걸기를 피하기 위해 무리하게 회전 보법을 전개하느라 오른손목 경맥의 파열 통증이 바늘로 찌르듯 솟구쳤다.


눈앞에 선 진소백은 천검종 외문 제자 중에서도 뼈의 정렬과 기류를 읽을 줄 아는 진짜 고수였다. 어설픈 변명이나 나약한 척하는 눈속임은 도리어 그의 무학적 호기심을 자극해 정체를 탄로 나게 만들 뿐이었다. 혁련풍은 흙먼지와 진흙이 잔뜩 묻은 뺨을 바닥에 더 깊숙이 파묻으며, 목소리를 잘게 떨었다.


“소, 소인…… 배운 것이라니요? 무슨 말씀이신지…… 소인은 그저 마당을 쓸었을 뿐이옵니다.”


“빗자루 끝이 그린 완벽한 원형의 흔적, 그리고 빗자루 대를 잡은 손가락의 위치.”


진소백의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으나, 그 안에는 부인할 수 없는 예리함이 서려 있었다. 그의 가죽 장화가 진흙을 밟으며 한 걸음 더 다가왔다.


“그것은 힘의 중심축을 이해한 자만이 취할 수 있는 정교한 파지법이다. 마위의 정강이를 때린 자갈 역시 우연의 일치치고는 궤적이 너무 예리했어. 장님이 우연히 빗자루를 휘둘렀다고 하기엔, 공기의 흐름이 너무 깨끗하더군.”


혁련풍은 침을 꿀컥 삼켰다. 진소백의 시선이 자신의 오른손 손가락 끝에 꽂혀 있는 것이 소리 없이 느껴졌다. 소년은 비굴하게 손을 내저으며 빗자루 대를 바닥에 아무렇게나 떨어뜨렸다. 갈라진 대나무 결이 바닥의 자갈과 부딪쳐 가벼운 마찰음을 냈다.


“아, 그것은…… 소인이 앞을 보지 못해 바닥의 감촉을 손끝으로 느껴야만 청소를 할 수 있어서 그렇습니다! 손가락을 꼿꼿이 세워 빗자루 대의 미세한 떨림을 읽지 않으면, 어디를 쓸었는지, 바닥에 자갈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사옵니다. 방금 전에는 마위 조장님이 갑자기 발을 거시는 바람에, 소인이 놀라 빗자루를 축 삼아 휘청거린 것뿐입니다! 자, 자갈이 날아간 것은 정말로 우연이옵니다! 살려주십시오, 소백 사형!”


혁련풍은 진흙탕 바닥을 짚고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 비굴하고 나약한 장님 노예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진소백은 묵묵히 소년의 태도를 관찰했다. 그의 시선은 혁련풍의 굳은살 박힌 손끝에서 시작해, 찢어진 삼베옷 사이로 드러난 깡마른 어깨, 그리고 가쁘게 몰아쉬는 거친 숨소리로 향했다. 진소백은 천천히 허리를 굽혀 혁련풍의 오른손 손목을 낚아챘다.


덥석.


진소백의 손길은 묵직했고, 그의 손끝을 통해 미세한 진기(眞氣) 한 줄기가 혁련풍의 손목 경맥을 타고 흘러들어왔다. 탐색이었다.


혁련풍은 전신의 힘을 완전히 풀었다. 단전 주위에 억지로 묶어두었던 가짜 기맥을 흩뜨리고, 파열되어 Ruins(폐허)처럼 변해버린 진짜 단전의 상처를 그대로 노출시켰다. 진소백의 진기가 소년의 몸속을 훑었을 때, 느껴지는 것은 오직 얼어붙은 굳은 피와 형체도 없이 깨져버린 단전의 잔해뿐이었다. 무공을 익힌 자라면 결코 가질 수 없는, 완벽하게 파멸한 폐인의 신체였다.


“……!”


진소백의 안광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는 손목을 놓고 천천히 일어섰다.


“정말로 단전이 완전히 파괴되었군. 경맥 역시 썩어가는 고목과 다름없어. 내력이 한 푼도 존재하지 않는 신체라니…….”


진소백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무공의 천재로서 기이한 보법의 흔적을 발견하고 흥분했으나, 눈앞의 소년은 그저 생존을 위해 감각이 비정상적으로 발달한 비참한 장님 노예에 불과했던 것이다. 빗자루를 축으로 삼아 회전한 기예 역시, 앞을 보지 못하는 자가 넘어지지 않기 위해 본능적으로 터득한 처절한 몸부림이었다고 생각하니 가슴 한구석이 무거워졌다.


그때, 정강이의 마비 통증을 간신히 억누른 마위가 절뚝거리며 다가왔다. 그의 코뼈에서는 여전히 진흙 섞인 핏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소백 사형! 저 눈먼 개새끼가 저를 일부러 넘어뜨린 게 분명합니다! 저놈의 손가락을 모조리 부러뜨려 낙일곡의 법도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마위가 살기 어린 호흡을 내뿜으며 철검을 뽑으려 하자, 진소백이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가로막았다.


“그만해라, 마위.”


“사, 사형! 하지만 저 비천한 놈이……!”


“무공을 익힌 종문의 제자가, 앞을 보지 못하는 장님 노예의 빗자루질에 걸려 넘어진 것도 모자라 무기를 뽑아 화풀이를 하려 드는가? 천검종의 명예를 이 진흙탕 바닥에 처박을 셈이냐? 더 이상 추태를 부린다면 내가 직접 장로회에 보고하겠다.”


진소백의 단호한 일갈에 마위는 입술을 짓씹으며 검자루에서 손을 뗐다. 그의 심박수가 분당 백 번을 넘기며 억울함과 분노로 요동쳤지만, 외문 수석인 진소백의 권위 앞에서는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알겠습니다, 사형.”


마위는 혁련풍을 향해 잔인한 눈빛을 쏘아 보낸 뒤, 다리를 절뚝거리며 연무장 안쪽으로 사라졌다. 진소백 역시 마지막으로 혁련풍을 묵묵히 내려다본 뒤, 등을 돌려 걸어갔다. 그의 무거운 강철검이 바람을 가르며 스산한 금속음을 남겼다.


하급 무사들의 발소리가 완전히 멀어지자, 혁련풍은 참았던 숨을 길게 내쉬었다.


‘진소백…… 무서운 자다. 내 경맥의 파열 상태를 확인하고도 의심을 완전히 거두지 않은 눈치였어. 이곳 연무장도 더 이상 오래 머물 곳이 못 되는군.’


소년은 바닥에 떨어진, 머리가 갈라진 대나무 빗자루를 더듬어 쥐고 몸을 일으켰다. 옆구리와 손목의 통증이 비명을 질렀지만, 소년은 묵묵히 침묵을 고수하며 다음 청소 구역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가 향한 곳은 낙일곡 가장 깊고 음산한 끝자락에 위치한 공동묘지 구역이었다.


* * *


낙일곡 공동묘지는 과로와 고문, 혹은 사고로 죽어간 비천한 광부들과 노예들이 비석도 없이 묻힌 황량한 언덕이었다.


골짜기 틈새로 불어오는 매서운 북풍이 무덤 사이의 마른 잡초들을 흔들며 스산한 울음소리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이곳은 사방이 절벽으로 가로막혀 있어 바람이 휘몰아치다 소용돌이치는 기이한 기류 지대였다. 일반 무사들은 음산한 음기와 지독한 먼지 때문에 접근조차 꺼리는 곳이었지만, 혁련풍에게는 대자연의 바람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유일한 안식처였다.


서벅, 서벅.


혁련풍이 마른 흙바닥을 밟으며 공동묘지 언덕으로 올라섰을 때, 귓가에 기이한 소리가 들려왔다.


쓸…… 쓸…….


아주 느리고 무거운, 그러나 일정한 박자를 가진 빗자루질 소리였다.


그 소리는 낙일곡의 세찬 바람 소리 속에 완전히 녹아들어 있어, 웬만한 일류 고수라 할지라도 집중하지 않으면 기척조차 느끼지 못할 정도로 자연스러웠다. 혁련풍의 귀가 미세하게 쫑긋거렸다. 소리가 나는 방향은 공동묘지 한구석, 낡은 초가집 앞이었다.


그곳에는 초점을 잃은 흐린 눈을 한 채, 해진 회색 도포를 걸친 늙은 맹인 노인이 서 있었다. 낙일곡의 묘지기, 풍노인이었다. 노인은 아무런 표정 없이 바닥의 낙엽과 마른 흙을 쓸어내고 있었다. 그의 빗자루질은 혁련풍의 정교한 기교와는 달랐다. 화려함은 전혀 없었지만, 빗자루 끝이 바닥을 스칠 때마다 주변의 세찬 칼바람이 미세하게 꺾이며 노인의 몸을 비껴가는 듯한 기이한 기류 변화가 일어났다.


혁련풍은 가만히 서서 그 소리를 들었다. 소년의 심안통이 작동하며 머릿속에 노인의 기이한 움직임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저 노인의 빗자루질…… 바람을 거스르지 않고 있어. 오히려 바람의 흐름에 빗자루를 얹어 기류를 흘려보내고 있군. 대체 저 노인은…….’


그때, 풍노인이 쓸어내리던 빗자루를 멈추었다. 노인은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허공을 향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숨소리가 너무 거칠구나, 소년아.”


“……!”


혁련풍은 일순간 몸을 굳혔다. 노인의 목소리는 낮고 탁했으나, 그 안에 담긴 내력의 기운이 혁련풍의 고막을 묵직하게 때렸다.


“가슴속에 타오르는 화마(火魔)가 전신의 경맥을 다 태워 먹고 있어. 깨진 단전 틈새로 들어온 야적지의 철독(鐵毒)과 복수심이 뒤섞여 기혈이 역류하고 있구나. 그런 몸을 이끌고 빗자루질을 해대다니, 목숨이 여러 개라도 되는 게냐?”


혁련풍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지 노인 외에는 자신의 상태를 이토록 정확하게 간파한 자가 없었다. 심지어 눈앞의 노인은 은퇴한 의원도 아닌, 그저 비천한 묘지기에 불과하지 않은가.


“어르신…… 소인은 그저 장서각의 청소부일 뿐입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소인은 잘…….”


혁련풍이 비굴한 연기를 펼치려던 찰나였다.


스파앗!


풍노인의 손에 쥐여 있던 낡은 빗자루 끝이 전광석화처럼 허공을 가르며 혁련풍의 이마를 향해 쏘아져 왔다.


그것은 단순한 찌르기가 아니었다. 빗자루 끝이 나아가는 궤적을 따라 낙일곡의 세찬 바람이 압축되며 거대한 무형의 장벽을 형성했다. 혁련풍은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하고 몸을 뒤로 피하려 했다.


하지만 이상한 일이었다.


분명 발을 뒤로 디뎠음에도 불구하고, 몸이 진흙 속에 빠진 것처럼 무겁게 가라앉았다. 사방에서 몰아치는 칼바람의 저항이 혁련풍의 어깨와 다리를 쇠사슬처럼 옭아매고 있었다. 바람의 저항을 이겨내지 못해 신형이 굳어버린 것이다. 풍노인의 빗자루 끝은 혁련풍의 이마 앞 반 치 거리에서 거짓말처럼 우뚝 멈추어 섰다.


스으으으…….


빗자루 끝에서 뿜어져 나온 미세한 바람 기운이 혁련풍의 백색 삼베천을 가볍게 흔들었다. 혁련풍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바람을 적으로 삼으니, 한 걸음도 제대로 내딛지 못하는 것이다.”


풍노인이 빗자루를 천천히 거두며 혀를 차듯 말했다.


“네놈의 몸에 흐르는 청풍세가의 핏줄이 울고 있구나. 바람의 진동을 느끼는 청풍검체(聽風劍體)를 타고났으면서도, 가슴속의 독기와 분노에 눈이 멀어 자연의 소리를 듣지 못하다니…… 비참하도다.”


“……!”


혁련풍의 머릿속에 벼락이 치는 듯한 충격이 일었다.


‘청풍세가……! 이 노인이 대체 어떻게 내 가문의 이름을 알고 있는 거지? 가문은 이미 독고백에 의해 멸문당해 중원에서 지워졌을 터인데!’


소년은 더 이상 비굴한 연기를 유지할 수 없었다. 그의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렸고, 목소리에서 연기 톤이 사라지며 차가운 살기가 서렸다.


“당신…… 정체가 무엇이지? 비천한 묘지기가 가문의 이름을 어찌 아는가.”


풍노인은 대답 대신 허허실실 웃으며 품속을 뒤적였다. 노인의 마른 손가락 끝에 쥐여 나온 것은, 군데군데 때가 묻고 세월의 흔적이 가득한 낡은 대나무 피리였다.


“정체 따위가 무엇이 중요하겠느냐. 이미 두 눈을 잃고 낙일곡의 귀신이 된 늙은이일 뿐인데.”


풍노인은 대나무 피리를 천천히 입술에 가져다 대었다.


“눈을 감고, 귀를 닫아라. 그리고 마음의 화마를 가라앉히고 들어보거라.”


필률률률…….


노인의 입술 사이로 애절하고 맑은 피리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소리는 지독하게 음산한 공동묘지의 안개 속으로 스며들었다. 기이한 일이었다. 피리 소리가 울려 퍼지자마자, 낙일곡 절벽 사이를 미친 듯이 휘몰아치던 세찬 칼바람의 불규칙한 파열음들이 일순간 조용해졌다.


아니, 소멸한 것이 아니었다. 바람이 피리 소리의 특정한 주파수와 공명하며 일정한 규칙을 가지고 정렬되기 시작한 것이다.


웅웅웅…….


공기 중의 먼지와 흙가루들이 피리 소리의 진동에 맞춰 허공에서 미세하게 파동을 그리며 춤을 추었다. 혁련풍은 전신을 감싸 안는 이 신비로운 진동의 변화에 압도당했다.


“가문의 구결을 잊었느냐, 소년아. ‘바람은 소리를 남기고, 검은 바람을 가른다. 귀로 세상을 보고 마음으로 검을 쥐어라.’ 청풍청청결(聽風聽聽訣)의 기초는 이 대기의 진동과 네 몸의 호흡을 동조시키는 것에서 시작한다.”


풍노인의 음성이 피리 소리 사이로 스며들 듯 들려왔다.


혁련풍은 홀린 듯 자리에 정좌했다. 단전의 깨진 틈새로 솟구치던 뜨거운 복수심의 화마가, 피리 소리의 차갑고 평온한 공명에 이끌려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소년은 지 노인에게 배웠던 수식 호흡을 전개하며, 피리 소리의 주파수에 자신의 심장 박동을 맞추어 나갔다.


쿵…… 쿵…… 쿵…….


심박수가 분당 서른 번 이하로 내려앉았다. 전신의 기혈 흐름이 완만해지며, 억지로 기맥을 억누르던 통증이 사라졌다. 대신, 피리 소리가 전하는 공기의 미세한 밀도 변화가 혁련풍의 온몸의 모공을 통해 스며들어왔다.


풍노인은 피리의 음색을 한 단계 낮추어, 더 무겁고 깊은 음파를 내뿜었다. 그것은 혁련풍의 단전에 뭉쳐 있던 차가운 철독을 부드럽게 감싸 안아 풀어주는 무형의 안마와 같았다.


“바람의 저항을 이겨내려 하지 마라. 바람의 마찰을 제로로 만드는 보법, 어풍보(馭風步)의 구결을 기억하거라. ‘바람을 거스르지 말고, 바람 위에 몸을 실어라.’ 발걸음을 내딛을 때, 공기의 저항이 가장 적은 음압(音壓)의 틈새를 찾아 발끝을 밀어 넣는 것이다.”


피리 소리가 특정한 주파수로 강하게 울렸다.


혁련풍은 그 소리의 파동이 가리키는 공기의 흐름을 심안으로 포착했다. 바람과 바람이 부딪쳐 발생하는 미세한 진공의 틈새. 소년은 정좌에서 일어나, 피리 소리의 주파수에 맞춰 발걸음을 한 걸음 내딛었다.


서벅.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분명 바람이 정면으로 강하게 불어오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발끝에 전해지는 공기의 저항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바람이 스스로 길을 비켜주듯, 혁련풍의 신형이 허공을 미끄러지듯 부드럽게 앞으로 나아갔다. 옆구리의 타박상 통증도, 손목의 저림도 이 순간만큼은 대자연의 흐름 속에 완전히 동화되어 사라졌다.


필률률률률——!


피리 소리가 마지막 고음을 길게 뽑아내며 낙일곡의 하늘을 찌르고 서서히 잦아들었다.


그와 동시에, 혁련풍의 귀에서 웅웅거리던 지독한 이명이 완전히 소거되었다. 귓구멍 깊은 곳에서 무언가 턱 하고 막혀 있던 장벽이 맑게 터져 나가는 느낌이었다.


‘아……!’


풍문(風門)의 개안이었다.


‘풍문 (風門) - 청각 인지 1성’의 경지에 도달하는 순간, 혁련풍의 세상은 완전히 뒤바뀌었다.


눈먼 장님인 소년의 머릿속에, 사방 3보 안의 모든 물리적 공간이 소리의 진동을 통해 투명한 수묵화처럼 선명하게 그려지기 시작했다. 바람이 묘비의 모서리를 스치며 내는 미세한 마찰음, 잡초 잎사귀가 흔들릴 때 발생하는 공기의 미세한 온도 변화, 그리고 바닥에 뒹구는 작은 자갈의 형태까지 소리로 인지되었다. 시각을 잃은 대가로 대자연의 진동을 완벽히 아군으로 삼은 것이다.


피리 소리가 완전히 멈추었다.


공동묘지 언덕에는 오직 차가운 정적만이 감돌았다. 풍노인은 대나무 피리를 슬그머니 품속에 집어넣으며, 다시 낡은 빗자루를 쥐고 낙엽을 쓸기 시작했다.


쓸…… 쓸…….


그 소리는 다시 평범하고 비천한 늙은 묘지기의 소리로 돌아가 있었다. 노인은 혁련풍을 돌아보지도 않은 채 무뚝뚝하게 읊조렸다.


“청소나 하거라, 소년아. 간수들이 이 언덕 주변의 순찰을 늘리고 있으니, 쓸데없는 짓을 하다 들키지 말고.”


혁련풍은 흙바닥에 떨어진 자신의 부러진 빗자루를 주워 올렸다. 이제 빗자루를 쥔 손끝에 느껴지는 대나무 대의 진동이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맑고 선명하게 전해졌다. 소년은 스승 풍노인을 향해 보이지 않는 눈으로 깊은 경의를 표하며 조용히 허리를 숙였다.


“……가르침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르신.”


하지만 평온함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새로이 개안한 풍문의 감각이, 정적을 깨고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귀를 열어 세상을 듣는 초감각적인 인지가 가동되는 순간, 혁련풍의 모공이 미세하게 떨렸다.


바스락.


공동묘지 언덕 아래, 잡초가 우거진 덤불 속이었다.


거리는 정확히 10장(약 30미터). 일반적인 인간의 귀로는 도저히 들을 수 없는 머나먼 거리였지만, 풍문 1성의 경지에 도달한 혁련풍의 귀에는 그 소리가 귓전에서 속삭이는 것처럼 선명하게 들려왔다.


스으으읍…… 후우우우…….


가쁘고 날카로운 짐승의 숨소리였다. 침을 흘리며 먹잇감을 노리는 사나운 들개의 미세한 심박 소리와, 붉은 안광을 빛내며 바위 뒤에 몸을 웅크리고 있는 야수의 기척이 온몸의 모공을 타고 전율처럼 흘러들어왔다.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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