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님의 숨결, 어둠 속의 이정표
배충의 투박하고 탐욕스러운 손가락이 가슴팍의 비단 손수건을 움켜쥐기 직전, 혁련풍의 오른손 끝이 허공을 갈랐다.
스스스슥!
그것은 내력이 실린 장풍이 아니었다. 단전이 파괴된 장님이 뿜어낼 수 있는 기공 따위는 낙일곡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뼈와 근육, 그리고 힘줄의 초고속 마찰이 만들어낸 정교한 육체적 반동이었다.
늙은 대장장이 팽 노인이 일러준 쇠의 약점, 그리고 바람의 떨림을 통해 인지한 배충의 손목 관절의 궤적.
혁련풍의 손가락 끝이 정확히 배충의 손목 안쪽, 관절의 가장 약한 연결부를 가볍게 톡 때렸다.
탁!
“윽?!”
배충의 입에서 둔탁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의 뻗어오던 손끝이 궤도를 잃고 엉뚱한 방향으로 뒤틀렸다. 혁련풍은 그 찰나의 순간을 놓치지 않고, 몸을 반 반치 뒤로 비틀며 배충의 돌진 기세를 그대로 흘려보냈다.
동시에, 소년의 발끝이 지면을 가볍게 찼다. 바닥에 떨어져 있던 녹슨 무쇠 날붙이 하나가 허공으로 튕겨 올랐다. 혁련풍은 소매 안으로 그것을 미끄러뜨리듯 회수한 뒤, 손가락 끝의 퉁김으로 배충의 소매 자락을 향해 던졌다.
쉬익! 탁!
날붙이는 배충의 비단 소매 자락을 꿰뚫고, 야적지 바닥에 박혀 있던 무거운 묵철 고철 마디 틈새에 쐐기처럼 박혔다.
“어, 어라?!”
자신의 무식한 돌진 힘을 이기지 못한 배충은 소매가 묶이자 균형을 잃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콰당탕!
“아아악!”
날카로운 고철 조각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구덩이 위로 배충이 사정없이 굴러떨어졌다. 무쇠 칼날들이 그의 뺨과 손바닥을 사정없이 긁어놓았고, 비명 소리가 안개 낀 야적지를 채웠다.
배충의 부하 둘이 경악하며 비명을 질렀다.
“조, 조장님!”
배충은 온몸에 피를 흘리며 고철 더미 속에서 기어 나왔다. 그의 얼굴은 분노와 수치심으로 벌갛게 달아올랐다. 눈먼 노예 놈을 짓밟으려다 제 발에 걸려 쓰러진 꼴이었으니, 부하들 앞에서의 굴욕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 이 눈먼 병신 새끼가……!”
배충이 이빨을 갈았지만, 혁련풍은 이미 바닥에 납작 엎드려 덜덜 떠는 연기를 하고 있었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발을 헛디뎌 넘어지면서 조장님을 건드렸나 봅니다! 살려주십시오!”
비굴하게 조아리는 소년의 모습에 배충은 더 이상 시비를 걸 명분을 찾지 못했다. 자신이 제 발에 걸려 넘어진 것처럼 상황이 연출되었기 때문이다. 배충은 씩씩거리며 붉은 비단 손수건을 빼앗을 엄두도 내지 못한 채, 부하들의 부축을 받으며 야적지를 빠져나갔다.
“두고 보자, 이 눈먼 개새끼…… 반드시 내 손으로 네놈의 손가락을 부러뜨려 주마!”
그들이 멀어지자마자, 억눌러왔던 반동이 혁련풍의 몸을 덮쳤다.
“커헉……!”
혁련풍은 참았던 피를 바닥에 토해냈다. 단전의 파괴된 상처 틈새로 야적지의 부러진 검들이 뿜어내던 차가운 원한의 검기(劍氣)가 기어 들어왔다. 눈이 보이지 않는 대신 온 신경을 청각과 촉각에 극도로 집중했던 대가였다. 귓가에서 수만 자루의 칼날이 울부짖는 듯한 이명이 휘몰아쳤다.
태산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두통이 뇌수를 짓눌렀고, 전신의 기혈이 폭주하듯 역류하기 시작했다. 주화입마(走火入魔)의 전조였다. 소년은 부러진 대나무 빗자루를 지팡이 삼아 짚었지만, 다리가 풀려 바닥에 주저앉았다. 시각을 잃은 눈가에서 뜨거운 핏방울이 배어 나와 백색 삼베천을 붉게 적셨다.
‘정신을…… 잃으면 안 된다. 여기서 쓰러지면 모든 것이 끝이다.’
혁련풍은 비틀거리며 낙일곡 변두리, 평소 일반 무사들이 찾지 않는 황량한 언덕으로 기어갔다. 코끝으로 미세하게 풍겨오는 씁쓸한 약초 향기만이 소년의 유일한 이정표였다. 바스락거리는 잡풀 더미를 헤치며 소년이 쓰러진 곳은, 낙일곡 변두리의 초라한 흙벽돌 처소 앞이었다.
“허어, 이게 무슨 해괴한 맥상이란 말이냐.”
낮고 가라앉은 노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은퇴한 맹인 의원, 지 노인이었다. 백발을 단정하게 빗어 넘기고 허리에 대나무 침통을 찬 노인은, 눈이 멀었음에도 혁련풍이 쓰러진 위치를 정확히 짚어 다가왔다. 지 노인의 마른 손가락이 혁련풍의 손목 맥상에 닿았다.
“단전은 형체도 없이 깨져 있고, 경맥은 얼어붙은 무쇠처럼 굳어 있구나. 그런데도 기혈이 폭주해 뇌수를 태우고 있다니…… 대체 어떤 무모한 짓을 벌인 게냐?”
지 노인은 혀를 차며 허리춤에서 자색 대나무 침통을 열었다. 은은한 영기가 서린 은침 세 자루가 노인의 손가락 사이에 쥐어졌다.
스슥! 탁!
지 노인의 손놀림은 번개 같았다. 보이지 않는 눈으로도 혁련풍의 가슴과 머리의 비혈(秘穴)을 정확하게 찔러 들어갔다. 은침폐맥(銀針閉脈) 비술이었다. 침끝이 경맥을 파고드는 순간, 혁련풍은 전신이 얼어붙는 듯한 차가운 통증을 느끼며 정신이 번쩍 들었다. 뇌수를 쥐어짜던 두통이 썰물처럼 가라앉고, 역류하던 피가 제자리로 돌아갔다.
“어르신…….”
“말하지 말거라. 지금 네 경맥은 겨우 은침으로 묶어둔 임시방편에 불과하다. 시각을 잃은 고통을 청각으로 메우려 하지 말고, 네 심장 박동을 자연의 흐름에 맞추어 조율해야 한다.”
지 노인은 혁련풍의 손바닥을 가져가 손가락으로 글씨를 써 내려갔다. 동시에 그의 귓가에 나직하게 무공의 비전 구결을 속삭였다.
“수식 호흡 규칙(數息呼吸)이다. 들숨을 들이쉬고, 네 심장의 고동 소리를 마음속으로 세어라. 하나, 둘, 셋…… 열에 도달할 때까지 숨을 멈추고, 심박수를 분당 서른 번, 스무 번 이하로 떨어뜨려라. 네 몸을 대기 중의 먼지처럼, 죽은 시체처럼 고요하게 만드는 법을 배워야 감각의 폭주를 막을 수 있다.”
이 가르침은 혁련풍에게 단순한 치료법이 아니었다. 쇠의 공명을 읽고 바람의 소리를 듣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감각의 제어 장치이자, 훗날 기척을 완전히 지우는 '심박동조(心搏同調)' 무공의 위대한 기틀이었다. 혁련풍은 지 노인의 가르침에 따라 호흡을 고르며, 심박수를 낮추는 수련을 시작했다.
* * *
지 노인의 처소에서 내상을 다스린 혁련풍은 밤늦게 자신의 처소인 낙일곡 장서각 지하 창고로 돌아왔다. 창고 안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둠이 지배하고 있었지만, 장님인 소년에게는 오히려 가장 아늑하고 익숙한 공간이었다. 썩어가는 고서의 퀴퀴한 냄새와 먼지 독이 사방에 가득했지만, 혁련풍은 바닥에 가마니를 깔고 정좌했다.
스승 독고백에게 빼앗긴 가문의 복수, 그리고 부러진 청풍검 조각.
소년은 삼베옷 속 깊은 곳에서 자루만 남은 부러진 청풍검(靑風劍)을 꺼내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날카로운 날은 반쪽밖에 남지 않았지만, 쇠 고유의 결을 더듬는 소년의 손길은 정성스러웠다.
‘수식 호흡…… 하나, 둘, 셋…….’
소년은 지 노인이 전수한 호흡법을 전개했다. 창고 안의 공기가 차갑게 가라앉으며, 혁련풍의 심박수가 급격히 떨어졌다. 분당 일흔 번이던 고동이 마흔 번, 서른 번, 그리고 마침내 분당 스무 번 이하로 내려앉았다.
생명 활동이 일시적으로 정지한 듯한 고요함. 혁련풍의 몸 주위로 장서각의 미세한 먼지들이 아무런 저항 없이 소리 없이 내려앉았다. 대자연의 공기와 완벽하게 호흡을 동조시키는 순간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쿵!
장서각 지하 창고의 무거운 목조 문이 거칠게 부서지며 쇠사슬 짤랑거리는 소리가 어둠을 찢었다.
“이 눈먼 병신 놈이 어디 처박혀 있느냐!”
조필의 흉포한 목소리였다. 그의 등 뒤로 횃불을 든 하급 무사 서너 명이 창고 안으로 들이닥쳤다. 붉은 횃불의 불빛이 먼지 가득한 지하 창고를 붉게 물들였다. 조필은 낮에 배충이 야적지에서 당한 일을 보고받고, 혁련풍이 무기를 숨기고 있거나 기이한 짓을 벌이고 있다는 의심을 품고 불시 검문을 감행한 것이었다.
“당장 샅샅이 뒤져라! 이 장님 새끼가 가슴팍에 숨기고 다니던 쇠붙이나 비단 쪼가리가 있는지 먼지 한 톨까지 털어내란 말이다!”
조필의 명령에 무사들이 난폭하게 서책 더미를 발로 차고 칼로 찌르며 수색을 시작했다. 무사들의 거친 장화 발소리가 창고 바닥을 울렸다. 혁련풍은 즉시 흙바닥에 납작하게 엎드렸다. 비굴한 노예의 자세를 취하면서도, 내면으로는 지 노인에게 배운 수식 호흡 규칙을 극도로 전개했다.
‘심박수를 낮춰라. 체온을 가라앉혀라. 나는 먼지다. 나는 바닥의 흙이다.’
심박수가 분당 열다섯 번까지 떨어졌다. 피의 흐름이 느려지며 몸의 체온이 차가운 지하 창고 바닥의 온도와 동조되었다. 조필은 절정 초입의 무인이었다. 비록 타락했으나 기척을 감지하는 내력의 감각만큼은 무시할 수 없었다. 만약 혁련풍이 조금이라도 긴장하여 심박수를 올리거나 거친 숨을 내쉰다면, 조필의 감각망에 즉시 포착될 터였다.
쉬익! 푹!
조필이 허리춤에서 단도를 뽑아 혁련풍 바로 옆에 쌓여 있던 썩은 서책 더미를 난폭하게 찔러댔다. 먼지가 폭풍처럼 일어났다.
‘윽…….’
먼지 독과 함께 단전에 남아 있던 한독(寒毒)이 솟구쳤다. 허파가 뒤틀리며 당장이라도 격렬한 기침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기침 한 번이면 모든 것이 끝이었다. 혁련풍은 어금니가 깨져라 물며 목구멍으로 솟구치는 피를 삼켰다. 호흡을 억지로 참아내느라 전신의 경맥이 으스러지는 듯한 일시적 마비 통증이 덮쳐왔다. 시야가 아득해지고 산소가 부족해 뇌수가 타들어 가는 고통이 따랐다.
서벅. 서벅.
조필의 무거운 장화 발끝이 혁련풍의 머리맡을 지나, 바닥 판자 쪽으로 향했다.
쩍.
조필의 장화 앞코가 바닥의 헐거운 목조 판자를 툭 건드렸다. 그 판자 바로 아래에는 혁련풍이 낮에 야적지에서 수집한 부러진 청풍검 조각과 가문의 유품들이 숨겨져 있었다. 판자가 들리는 소리가 혁련풍의 귀에 천둥처럼 크게 울렸다.
‘들킨다……!’
조필이 고개를 숙여 판자 틈을 살피려던 찰나였다. 혁련풍은 소매 속에 숨겨두었던 작은 돌가루 조각을 손가락 끝으로 미세하게 튕겼다. 뼈의 초고속 마찰 반동을 이용한 탄지 기교였다.
팅!
돌가루가 어둠을 뚫고 날아가 창고 반대편 구석, 썩은 고서들이 무더기로 쌓인 궤짝을 정확히 타격했다.
우르르릉! 탁!
그 충격으로 궤짝 뒤에 숨어 있던 거대한 쥐 떼들이 경악하며 사방으로 튀어나왔다. 찍찍거리는 기괴한 울음소리와 함께 수십 마리의 쥐들이 무사들의 발밑을 어지럽게 헤집었다.
“으악! 쥐새끼들이다!”
“조장님, 이쪽 구석 궤짝 뒤에서 소리가 났습니다!”
무사들이 소란을 피우며 횃불을 쥐 떼가 나온 방향으로 돌렸다. 조필의 시선 역시 바닥 판자에서 벗어나 쥐 떼가 튀어나온 썩은 궤짝 더미로 쏠렸다. 수색의 방향이 완전히 뒤틀어지는 순간이었다.
“쯧, 더러운 쥐새끼들 같으니라고! 그쪽 궤짝을 부수고 샅샅이 뒤져라!”
조필이 쇠채찍을 휘두르며 소리쳤다. 혁련풍은 바닥에 엎드린 채 숨을 죽였다. 전신의 경맥이 끊어질 듯한 고통 속에서도, 소년은 지 노인의 수식 호흡을 유지하며 조필의 발소리를 감지했다.
조필의 발걸음이 다시 서서히 움직였다. 그러나 그 발걸음은 쥐 떼가 나온 구석이 아닌, 혁련풍이 엎드린 바닥으로 향하고 있었다.
서벅. 서벅.
마침내 조필의 가죽 장화 끝이, 혁련풍이 가문의 부러진 청풍검 조각들을 숨겨둔 썩은 서책 더미 바로 앞에서 멈추어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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