쇠붙이의 원한, 만검의 야적지
장서각 지하는 언제나 차갑고 음습했다. 바닥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냉기는 뼈마디를 시리게 찔렀고, 썩어가는 고서의 매캐한 먼지는 허파를 무겁게 짓눌렀다.
혁련풍은 가마니 위에 정좌한 채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조필의 한철채찍에 찢긴 등의 상처가 불을 붙인 듯 뜨겁게 욱신거렸다. 피와 진흙이 엉겨 붙어 굳어버린 삼베옷이 움직일 때마다 살가죽을 뜯어내는 통증을 유발했다.
“흡…….”
소년은 나직한 신음을 삼키며 입술을 깨물었다. 단전이 깨져 진기를 부릴 수 없는 몸이었기에, 이 지독한 고통을 다스릴 방법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혁련풍은 눈을 감은 채 머릿속으로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의원 지 노인에게 배웠던 수식 호흡 규칙이었다. 들숨과 날숨의 간격을 극도로 늘리고, 심장의 박동을 인위적으로 가라앉혔다. 분당 여든 번이 넘게 뛰던 심장이 서서히 느려지며 쉰 번, 마흔 번, 그리고 서른 번 이하로 떨어졌다. 몸의 생명 활동이 일시적으로 둔화되자 전신을 지배하던 불타는 통증도 아득한 안개 너머로 흐려졌다. 고통을 감각의 영역에서 분리해 내는 처절한 생존 비술이었다.
한참 동안 호흡을 고른 혁련풍은 품속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손가락 끝에 닿는 부드럽고 따뜻한 감각. 어머니 백설화가 남겨준 유일한 흔적이자 가문의 유품인 붉은 비단 손수건이었다. 비록 멸문지화의 날 흘린 핏자국이 거무스름하게 얼룩져 있었으나, 이 손수건을 만질 때마다 소년은 자신이 혁련세가의 마지막 후계자임을 상기했다.
‘독고백…….’
가슴속 깊은 곳에서 타오르는 증오를 억누르며, 소년은 손수건을 다시 품속 깊숙이, 파괴된 단전 바로 위에 겹쳐 넣었다. 그리고 머리맡에 놓인 대나무 빗자루를 더듬어 쥐었다. 조필의 채찍을 막아서다 옆면이 쩌적 갈라진 빗자루 대가 손끝에 걸렸다. 혁련풍은 낡은 헝겊 조각을 찢어 갈라진 틈새를 단단히 옭아맸다. 지금의 그에게 이 빗자루는 몸을 지탱할 유일한 뼈대이자, 무공을 숨긴 채 근골을 재정렬하는 유일한 병기였다.
* * *
다음 날 아침, 낙일곡의 하늘은 납빛 안개로 가득했다.
혁련풍이 배정받은 청소 구역은 평소의 연무장이 아니었다. 낙일곡 깊숙한 골짜기 끝자락에 위치한 ‘만검 야적지’였다. 천검종의 무사들이 비무나 전쟁에서 부러뜨리고 버린 수만 자루의 고철 검들이 쓰레기처럼 쌓여 있는 거대한 절벽 구덩이.
바람이 골짜기를 타고 불어올 때마다 야적지 전체가 스산한 울음소리를 냈다. 그것은 단순히 바람이 쇠붙이에 부딪쳐 나는 소리가 아니었다. 평생을 명검이라 불리며 오만한 무인들의 손에 쥐여 살생을 일삼다, 결국 부러져 버려진 철기들의 원한 서린 검기였다. 일반 무인들은 이 야적지에 들어서는 것만으로도 기혈이 뒤틀리고 가슴이 답답해진다고 하여 접근하기를 꺼리는 기괴한 장소였다.
하지만 두 눈이 먼 혁련풍에게 이곳은 거대한 소리의 도서관이었다.
사각, 사각.
혁련풍은 부러진 빗자루를 잡고 고철 더미 사이를 천천히 쓸어내렸다. 빗자루 끝이 바닥의 쇳가루와 부러진 칼날 조각들에 닿을 때마다, 제각기 다른 음색의 금속음이 소년의 귀를 때렸다.
‘이것은 백련정강으로 벼려진 검날의 파편이군. 울림이 가볍고 날카롭다. 이것은 묵철이 섞인 중검의 자루인가…… 둔탁하고 무거운 진동이 바닥을 타고 흐른다.’
소년은 청소를 하는 척하며 이따금 손을 뻗어 바닥에 뒹구는 부러진 검날 조각들을 만졌다. 손끝을 통해 흘러들어오는 미세한 잔류 검기들이 소년의 파열된 단전을 찔렀다. 찌르는 듯한 통증이 척추를 타고 뇌리로 치솟았지만, 혁련풍은 이를 악물고 버텼다. 이 차가운 원한의 기운을 몸으로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것만이, 단전이 파괴된 상태에서 바람의 진동을 검에 담는 청풍청청결의 기초를 터득할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이다.
“녀석, 쇠붙이를 만지는 손끝이 제법이구나.”
갑작스러운 목소리가 안개 속에서 툭 튀어나왔다.
혁련풍은 깜짝 놀라 손에 쥔 검날 조각을 놓고 빗자루를 고쳐 쥐었다. 귀를 기울이자, 서너 걸음 뒤에서 가쁜 숨소리와 함께 진한 술 냄새, 그리고 뜨거운 화로의 탄내를 풍기는 노인의 존재가 감지되었다. 굽은 등과 굳은살이 단단하게 박힌 두꺼운 손을 가진 사내. 팽가 출신의 몰락한 대장장이 노예, 팽 노인이었다.
“누, 누구신지요…….”
혁련풍은 어깨를 움츠리며 장님 특유의 나약하고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낙일곡에서 평생 철기나 만지며 썩어가는 늙은이지.”
팽 노인은 쿨럭거리며 가벼운 기침을 뱉고는, 혁련풍이 만지던 부러진 검날 조각을 집어 들었다.
“천검종의 오만한 놈들은 검이 부러지면 그것으로 끝인 줄 알지. 하지만 진짜 철을 아는 자는 안다. 모든 쇠붙이는 부러진 후에도 제각기 고유한 울림을 품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노인의 목소리에는 쇠에 대한 깊은 집념과 슬픔이 서려 있었다. 혁련풍은 침묵을 지키며 노인의 말을 귀담아들었다.
“검이 온전할 때는 화려한 칼날에 가려져 쇠 고유의 결함이 보이지 않지. 하지만 부러진 칼날은 정직해진다. 쇠의 결이 어디서 꺾였는지, 어느 부분이 가장 약한 진동을 내는지 손끝으로 느껴보거라. 검의 무게 균형이라는 것은 결국 그 울림의 중심을 잡는 것에서 시작하는 법이니까.”
팽 노인의 말은 혁련풍의 뇌리를 세차게 때렸다.
‘울림의 중심…….’
그것은 가문의 비전 심법인 청풍청청결의 이치와 맞닿아 있었다. 바람의 떨림을 읽는다는 것은 결국 상대방 무기가 가진 고유한 진동의 흐름을 파악하는 것이며, 그 흐름이 꺾이는 지점을 타격한다면 아무리 단단한 명검이라 할지라도 단 한 격에 부러뜨릴 수 있다는 뜻이었다. 혁련풍은 자신도 모르게 손끝을 미세하게 떨며 고개를 숙였다.
“좋은 가르침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르신.”
“가르침은 무슨. 눈먼 녀석이 철을 만지는 모습이 기이해서 헛소리 한번 해본 게지.”
팽 노인은 허허롭게 웃으며 낡은 술병을 들이켰다. 그리고는 굽은 등을 이끌고 안개 속 주조소 방향으로 걸어갔다. 노인의 무거운 발걸음 소리가 멀어지는 것을 들으며, 혁련풍은 다시 한번 바닥의 부러진 검날 조각을 쥐었다. 이번에는 노인의 조언대로 쇠의 결이 꺾인 지점의 미세한 공명을 느끼려 온 신경을 손가락 끝에 집중했다.
바로 그때였다.
자갈바닥을 거칠게 짓밟는 요란한 발소리가 야적지 입구에서부터 들려왔다. 발소리는 세 명. 그중 앞장선 자의 호흡은 얕고 불규칙했으며, 걸음걸이마다 오만함과 시기심이 가득 실려 있었다.
‘배충(배충)이다.’
외문에서 낙방하고 낙일곡 관리직으로 밀려난 시기자 배충. 자질이 부족해 늘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던 그는, 자신보다 비천한 장님 청소부인 혁련풍을 괴롭히며 대리만족을 느끼는 소인배였다. 그의 등 뒤에는 몽둥이를 든 하급 인부 둘이 따르고 있었다.
“어이, 눈먼 병신 놈이 여기서 뭘 꾸물거리고 있는 거냐?”
배충의 날카롭고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고철 더미 사이로 울려 퍼졌다.
혁련풍은 즉시 허리를 굽히고 부러진 검날 조각을 바닥에 떨어뜨린 뒤, 빗자루 대를 움켜잡았다.
“배, 배 조장님…… 청소를 하던 중이었습니다.”
“청소? 쓰레기 같은 고철이나 만지작거리면서 딴청을 피우는 게 청소냐? 네놈이 낙일곡에서 편하게 지내더니 빠져가지고 말이야!”
배충은 혁련풍에게 다가와 장화 발로 소년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퍽!
둔탁한 타격음과 함께 혁련풍은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이미 조필의 매질로 상처투성이가 된 몸이었기에, 가벼운 발길질에도 등의 상처가 다시 터져 삼베옷 사이로 붉은 피가 번져 나왔다. 소년은 신음을 참으며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합니다…… 눈이 보이지 않아 손이 더뎠습니다.”
“핑계 대지 마! 네놈 가슴팍에 숨기고 있는 게 뭐냐?”
배충의 매서운 눈이 혁련풍의 찢어진 삼베옷 품속을 향했다. 소년이 정강이를 맞고 물러서는 찰나, 품속에 소중히 간직하고 있던 붉은 비단 손수건의 깃이 미세하게 밖으로 비쳐 보였던 것이다.
혁련풍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온몸의 피가 일순간 차갑게 식는 듯한 공포가 밀려왔다. 다른 것은 다 빼앗기고 짓밟혀도 상관없었다. 하지만 어머니 백설화의 핏자국이 새겨진 그 손수건만큼은 절대 저들의 더러운 손에 닿게 둘 수 없었다.
소년은 본능적으로 왼손을 가슴팍으로 가져가 품을 감싸 안았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냥 낡은 헝겊 조각일 뿐입니다…….”
“헝겊 조각? 헝겊 조각을 그렇게 보물 다루듯 숨긴단 말이냐? 당장 꺼내라!”
배충의 목소리에 탐욕과 짓궂은 호기심이 서렸다. 그는 혁련풍이 소중히 여기는 것을 빼앗아 짓밟음으로써 자신의 찌질한 열등감을 채우려 하고 있었다. 배충은 단숨에 거리를 좁히며 혁련풍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거칠게 잡아당기는 힘에 삼베옷 깃이 찢어지며, 품속에 있던 붉은 비단 손수건이 바깥으로 반쯤 흘러나왔다. 붉은 비단의 고운 결이 낙일곡의 납빛 안개 속에서 기이할 정도로 선명한 핏빛을 발했다.
“오호라, 계집이나 쓸 법한 비단 손수건이잖아? 눈먼 노예 놈이 이런 귀한 것을 어디서 훔쳤느냐!”
배충은 이빨을 드러내며 비열하게 웃었다. 그의 손가락이 손수건의 끝자락을 향해 뻗어졌다.
그 순간, 혁련풍의 머릿속에서 멸문지화의 날, 불타는 저택과 어머니의 비명 소리가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온몸의 경맥이 분노로 부르르 떨렸다.
‘안 돼…….’
단전의 깨진 틈새로 억눌려 있던 차가운 바람의 진기가 미세하게 솟구쳤다. 눈을 가린 백색 삼베천 뒤로, 초점을 잃었던 소년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배충이 손수건을 단숨에 낚아채려는 바로 그 찰나.
혁련풍의 오른손 끝이 허공으로 뻗어 나갔다. 소년의 가느다란 다섯 손가락 끝이 대기를 긁어내며, 웅- 하는 기이한 금속성 진동 소리를 내뿜었다. 그것은 바람의 결을 타고 흐르는 무형의 울림이었다. 소년의 손가락 끝은 눈이 보이는 자보다 더 정확하고 신속하게, 배충의 뻗어지던 손목 관절을 향해 일직선으로 쏘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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