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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 속에 가라앉은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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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장실의 무거운 침묵 속에서, 칼리는 손끝으로 양가죽 문서에 새겨진 은실 문장을 쓸어내렸다.


눈먼 소년 칼리의 육체였지만, 현대 한국의 천문지도학자 한준우로서 각성한 그의 손끝 감각은 가문의 문장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입체적으로 재구성해 내고 있었다.


‘델라크루아 가문.’


제국 최고 권위의 천문학 가문이자, 실명한 자신을 수치로 여겨 가차 없이 버렸던 친가. 그 가문의 가주이자 친부인 에드워드가 태양 교단과 결탁하여, 별을 되찾으려던 고대 천문학자들과 자신의 증조부 아서 델라크루아를 이단으로 몰아 처형시켰다는 추악한 공모의 기록.


손가락 끝의 단단한 황동 결정이 차가운 양가죽 표면과 공명하며 마력을 흡수했다. 그와 동시에 가문을 향한 얼음처럼 차가운 분노의 인력이 소용돌이치며 심장으로 흘러들었다.


하지만 깊은 생각에 잠길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선장실의 문이 거칠게 열리며 소냐가 다급하게 뛰어 들어왔기 때문이다. 얼굴에 검은 기름때를 묻힌 19세 소녀의 눈동자에는 다급함이 가득했다.


“칼리! 문서에 정신이 팔려 있을 때가 아니야. 스타라이트 호의 우현 장갑판이 한계에 달했어!”


소냐가 공구 벨트를 흘러내리며 외쳤다.


“개릭과의 전투에서 입은 충격 때문에 장갑 판넬의 이음새가 완전히 벌어졌어. 이 그레이 고스트 해역의 짙은 밤안개에는 독성 산성 물질이 섞여 있어서, 이대로 방치하면 용골까지 부식되어 녹아내릴 거야. 당장 보강해야 해!”


칼리는 침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안대 아래 감긴 눈으로도 그는 이미 중력 투시안을 통해 스타라이트 호 우현의 질량 밀도가 비정상적으로 가벼워진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장갑판이 삭아 내리고 있다는 명확한 물리적 신호였다.


“필요한 재료는?”


“중력 왜곡 저항성이 극도로 높은 ‘성강석 파편’이 필요해. 그리고 무엇보다…… 네가 가진 그 황동 망원경의 두 번째 렌즈를 수리하려면 ‘성좌의 눈물 결정’이 절실해. 그게 있어야 망원경의 중력 제어 능력을 함선급으로 확장할 수 있어.”


소냐의 목소리에는 엔지니어 특유의 절박함이 묻어 있었다. 칼리는 품속에서 무겁고 녹슨 고대 황동 중력 망원경을 꺼내 만지작거렸다. 증조부 아서가 평생을 바쳐 개조했다는 미완성의 유물.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칼리가 나지막이 말했다.


“이 안개 해역 깊은 곳에 ‘유령선들의 미궁’이라 불리는 금지된 구역이 존재한다. 수백 년간 난파된 선박들이 특수한 해저 인력에 이끌려 얽혀 있는 무덤이지. 그곳의 잔해 속이라면 필요한 성강석과 결정을 인양할 수 있을 거다.”


칼리는 즉시 갑판으로 나가 조타수 토비에게 기수를 돌릴 것을 명령했다.


스타라이트 호가 자욱한 밤안개를 뚫고 미궁 초입으로 진입하자, 선원들은 침묵에 잠겼다. 안개 속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 유령선들의 미궁은 기괴함 그 자체였다. 부서진 돛대와 썩어가는 목재 용골들이 거대한 탑처럼 뒤엉켜 바다 위에 기괴한 실루엣을 그리고 있었다. 사방에서 삐걱거리는 나무 신음 소리가 음산하게 울려 퍼졌다.


“인양용 크레인을 가동해라. 소냐, 성강석의 질량 파동이 느껴지는 잔해를 조준해.”


칼리가 망원경을 눈에 대고 지시하려던 찰나, 짙은 안개 너머에서 기괴한 쇳소리와 함께 거친 고함이 들려왔다.


“어이! 어떤 쥐새끼들이 감히 검은 소금 청소부단의 사냥터에 기어들어 왔군!”


안개를 가르며 붉은 가죽 코트를 걸친 사내가 이끄는 소형 인양선 2척이 무서운 속도로 튀어나왔다. 고대 잔해를 전문적으로 약탈하는 청소부 두목, 쿠르트였다.


쉬이익! 쾅-!


쿠르트의 부하들이 던진 거대한 나포용 갈고리와 굵은 강철 쇠사슬들이 스타라이트 호의 갑판과 조타실 난간을 사정없이 찍어 눌렀다.


“선장님! 조타 키가 쇠사슬에 감겨서 움직이지 않습니다! 배가 회전하지 않아요!”


토비가 키를 잡은 채 비명을 질렀다. 쇠사슬의 무게와 장력이 조타 기어를 완전히 물리적으로 구속해 버린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스타라이트 호의 전방 50미터 앞으로 거대한 고대 폐선의 용골 벽이 정면 충돌 코스로 다가오고 있었다. 이대로 가면 꼼짝없이 충돌해 선체가 공중분해 될 판이었다.


“내가 끊어버리겠다!”


거구의 전사 그림이 거대한 도끼를 치켜들고 달려가 난간을 짓누른 쇠사슬을 내리쳤다.


깡-! 콰작!


엄청난 불꽃이 튀었으나, 특수 강화된 강철 쇠사슬은 미세한 흠집만 날 뿐 끊어지지 않았다.


“안 됩니다! 일반적인 강철이 아니에요! 물리적인 힘으로는 안 끊어집니다!”


그림이 이빨을 악물며 외쳤다. 충돌까지 남은 시간은 단 15초.


칼리는 안대 아래 감긴 눈을 감은 채, 오른손의 망원경을 전방의 거대한 폐선 벽을 향해 조준했다. 그의 뇌내 3D 중력 지도에 폐선 벽의 거대한 질량 분포가 실시간 수치로 투사되었다.


‘질량 400톤. 조류의 속도 초속 3.2미터. 그리고…….’


칼리의 투시안이 폐선 벽 좌측 하단, 물살이 비정상적으로 소용돌이치며 빠져나가는 미세한 해류 구멍을 포착했다. 그곳은 고대 성소의 영향으로 중력이 미세하게 왜곡되어 역중력 반발력이 작용하는 기믹 좌표였다.


“토비! 키를 강제로 우현으로 꺾고 그대로 고정해라! 내 지시가 있을 때까지 절대 놓지 마라!”


“하지만 선장님, 우현으로 꺾으면 저 폐선 벽에 완전히 정면으로 들이받게 됩니다!”


“날 믿어라, 토비! 꺾어라!”


칼리의 서늘한 외침에 토비는 울먹이면서도 온 힘을 다해 키를 우현으로 한계까지 꺾었다. 스타라이트 호의 선체가 쇠사슬의 장력과 조타 키의 반발력 사이에서 비명을 지르며 우측으로 기울었다.


“소냐! 우현의 비상 에테르 분사 장치를 최대 출력으로 격발해라!”


“뭐?! 이 거리에서 분사하면 반동 때문에 장갑판이 완전히……!”


“격발해라!”


소냐가 이빨을 악물며 비상 밸브를 당겼다.


쿠구구궁! 콰아아앙!


스타라이트 호의 우현 측면에서 푸른색 에테르 불꽃이 폭발적으로 분사되었다. 엄청난 작용-반작용의 법칙에 의해 선체가 좌측 폐선 벽을 향해 튕겨 나가듯 급격히 꺾였다.


그 순간, 스타라이트 호를 묶고 있던 쿠르트의 강철 쇠사슬이 폐선 벽의 돌출된 모서리에 걸려 엄청난 물리적 인장력을 받기 시작했다.


칼리는 망원경을 통해 쇠사슬에 작용하는 장력의 한계점을 실시간으로 계산했다.


‘장력 한계치 돌파까지 3, 2, 1.’


쩌어어억-! 쾅!


엄청난 장력을 이기지 못한 쿠르트 인양선의 고정 핀들이 굉음과 함께 통째로 뽑혀 나갔다. 쇠사슬이 스타라이트 호의 조타실 좌측 난간을 통째로 뜯어내며 허공으로 튕겨 나갔다.


스타라이트 호는 간발의 차로 거대한 폐선 벽의 중력 반발력 물길을 타고 사선으로 미끄러지듯 빠져나갔다. 정면 충돌의 위기를 기하학적인 중력 역용 전술로 돌파한 것이다.


그러나 안도의 한숨을 내쉴 틈도 없었다. 난간이 뜯겨 나간 조타실 앞 안개 속에서, 쿠르트가 광기 어린 웃음을 터뜨리며 자신의 기함 갑판 위에 장착된 특수 작살총의 에너지를 충전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제법이군, 장님이 이끄는 쥐새끼들! 하지만 이 거리에서 뿜어지는 고압 전류 작살은 절대 피하지 못할 거다!”


지지직! 쿠구구궁!


쿠르트의 거대 작살총 끝에서 푸른색 스파크가 폭발적으로 일렁이며, 스타라이트 호의 에테르 엔진룸을 정확히 겨냥하기 시작했다.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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