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조타수, 새로운 깃발
어둠이 지배하는 갑판 위, 개릭 선장의 붉은 가죽 코트가 기묘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크하하하! 이 쥐새끼들이 감히 족쇄를 풀고 기어올라? 겨우 에테르 엔진 하나 꺼뜨린 정도로 이 개릭의 배를 집어삼킬 수 있을 줄 알았더냐!”
개릭의 목소리는 쇠사슬이 녹슨 갑판 위를 긁는 듯한 불쾌한 쇳소리를 내뿜었다. 그의 오른손 자리에 장착된 강철 갈고리 의수 ‘데스 팽’이 어둠 속에서 붉은빛을 반사하며 기괴하게 궤적을 그렸다.
철컥, 웅웅웅!
개릭이 붉은 가죽 코트 안쪽에 숨겨진 기어 레버를 거칠게 잡아당겼다. 그 순간, 그의 코트 깃과 어깨 장식에 박혀 있던 수십 개의 고농축 에테르 결정들이 일시에 폭발적인 에너지를 방출하기 시작했다.
“에테르 증폭기(Ether Amplifier) 최대 출력!”
눈을 멀게 할 정도로 강렬하고 기만적인 백색의 광막이 순식간에 블랙 팽 호의 갑판 전체를 가득 채웠다. 어둠에 적응해 있던 노잡이들과 아군 선원들이 비명을 지르며 눈을 감았다.
“크악! 내 눈!”
“빛이… 너무 강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지휘권을 잡고 있던 덩컨과 그림마저 급격한 광학적 자극에 방향 감각을 잃고 비틀거렸다. 해적들은 자신들의 선장이 뿜어내는 기만적인 빛 아래에서 키득거리며 단검을 다시 치켜들었다. 그들에게 이 눈부신 광막은 아군의 시야를 가리고 자신들의 학살을 정당화하는 절대적인 무기였다.
“장님 꼬맹이 놈, 네놈이 무슨 잔대가리를 굴렸든 이 빛 앞에서는 무력한 쓰레기일 뿐이다!”
개릭이 포효하며 칼리를 향해 돌격했다. 그의 무거운 가죽 장화가 갑판을 디딜 때마다 둔탁한 진동이 선체를 흔들었다. 데스 팽이 공기를 찢으며 칼리의 목덜미를 향해 사선으로 낙하했다.
하지만, 개릭은 단 한 가지 치명적인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
칼리는 애초에 눈이 보이지 않는 맹인이었다.
은빛 중력 안대 아래 닫힌 칼리의 양안에는, 개릭이 뿜어내는 그 눈부신 백색의 광막이 단 1%의 시각적 자극도 주지 못했다. 오히려 칼리의 머릿속에 전개된 ‘중력 투시안(重力透視眼)’의 청색 그리드 지도 위에서, 개릭의 존재는 너무나 선명하고 거대한 질량체의 이동 경로로 투사되고 있었다.
‘질량 95킬로그램. 에테르 장치의 무게 12킬로그램 가중. 이동 속도 초속 5.8미터. 무게중심은 상체 전방 15도 쏠림.’
칼리에게 개릭의 광학 기만 전술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오히려 에테르 증폭기가 방출하는 엄청난 에너지는 중력 지도 위에서 거대한 에너지 스파이크를 일으키며, 그의 위치를 소수점 단위까지 정확하게 특정해 주는 가장 완벽한 이정표에 불과했다.
칼리는 심박수를 분당 50회로 유지한 채, 오른손에 쥔 고대 황동 중력 망원경의 경통을 미세하게 조율했다. 손가락 끝의 단단한 황동 결정이 차가운 금속 표면과 공명하며 마력을 흡수했다.
개릭의 데스 팽이 칼리의 콧등 앞 10센티미터까지 육박한 순간.
“인력의 덫(引力之陷阱).”
칼리의 입술 사이로 차가운 물리 공식과도 같은 나지막한 읊조림이 새어 나왔다.
웅-!
개릭이 디디려던 갑판 바닥의 국소적인 공간 좌표에 초고밀도의 가상 중력장이 형성되었다. 순간적으로 해당 구역의 중력 상수가 평소의 5배로 폭증했다.
“윽?! 갑자기 몸이……!”
전진 관성에 몸을 싣고 돌격하던 개릭의 육체가 갑작스러운 수직 하향 인력에 짓눌렸다. 무거운 중갑과 에테르 장치의 질량이 아래로 강하게 끌려내려 가며, 그의 중심축이 허무하게 무너졌다.
쩍! 소리와 함께 개릭의 무릎 뼈가 갑판에 처박히며 기괴한 각도로 꺾였다. 목덜미를 조준했던 데스 팽의 궤적은 허공을 크게 가르며 빗나갔다.
“그림! 지금이다! 쇠사슬을 던져라!”
칼리의 명령이 어둠 속에서 빛보다 빠르게 전파되었다.
눈을 질끈 감고 귀를 기울이고 있던 그림이 칼리의 정확한 음성 좌표를 향해 온 힘을 다해 가시 쇠사슬을 내던졌다.
철컹! 촤르르륵!
“크아아악!”
중력이 비틀려 무릎을 꿇고 있던 개릭의 상반신에 묵직한 쇠사슬이 뱀처럼 감겨들었다. 그림이 괴성을 지르며 쇠사슬을 잡아당겨 갑판의 강철 지지대에 고정시켰다. 개릭은 에테르 증폭기를 폭주시켰으나, 이미 중력 왜곡과 물리적 사슬에 이중으로 묶여 거동이 완전히 제한된 상태였다.
“덩컨! 12시 방향, 적의 기어 장치 중심부 조준. 격발해라!”
갑판장 덩컨이 눈을 비비며 칼리가 지시한 방향을 향해 구식 함포의 조준선을 고정했다. 그의 손끝이 대지 동조 호흡법으로 흔들림 없이 가라앉았다.
콰아아앙!
포탄이 개릭의 가죽 코트 등에 장착된 에테르 증폭 장치의 핵심 기어를 정면으로 타격했다.
쿠구구궁! 콰앙!
에테르 에너지가 불안정하게 폭주하며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적색과 백색의 불꽃이 뒤엉키며 개릭의 상체를 통째로 집어삼켰고, 그 파괴적인 충격파는 개릭의 육체를 쇠사슬째로 찢어발기며 스타라이트 호의 부서진 난간 너머, 검푸른 녹틸루카의 심해 속으로 날려버렸다.
풍덩-!
거대한 물보라와 함께 블랙 팽 해적단의 군주였던 개릭 선장은 바다 괴수들이 들끓는 어둠 속으로 영원히 가라앉았다. 그의 비명은 채 몇 초도 가지 못하고 차가운 심해의 수압 속에 묻혀버렸다.
갑판 위에는 지독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살아남은 해적 졸개들은 무기를 떨어뜨리며 무릎을 꿇었다. 그들의 맹목적인 빛이었던 개릭이 단 한 명의 눈먼 소년이 설계한 정교한 역학적 덫에 걸려 한순간에 수장되는 것을 똑똑히 목격했기 때문이다.
칼리는 안대를 바로잡으며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오른손가락 세 개는 여전히 차갑고 딱딱한 황동 결정으로 변해 있었지만, 가슴속에는 알 수 없는 해방감이 요동쳤다.
“모두 무기를 내려놓아라.”
칼리의 목소리가 갑판에 울려 퍼졌다.
“이제 이 배에 채찍과 족쇄는 없다. 개릭의 시대는 끝났다.”
선원들과 하층 노잡이들이 서로를 바라보다가, 이내 칼리를 향해 무릎을 꿇으며 폭발적인 함성을 질렀다.
“칼리 선장님! 장님의 구원자시여!”
그들의 목소리에는 단순한 복종이 아닌,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자신들을 기적으로 이끈 항해사에 대한 절대적인 경외가 담겨 있었다. 칼리는 그들의 환호 속에서 선장실의 부서진 문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의 중력 투시안이 개릭의 시체가 흘리고 간 톱니 문양의 구리 열쇠, ‘블랙 팽 선장실 열쇠’의 질량을 포착해 냈다.
칼리는 바닥에서 열쇠를 집어 들고 선장실 안쪽의 비밀 금고로 향했다.
철컥, 스르륵.
열쇠를 꽂고 이중 태엽 장치를 돌리자, 금고의 육중한 강철 문이 열렸다. 그 안에는 약탈한 에테르 코인들과 밀수 장부들이 가득했다. 하지만 칼리의 중력 투시안은 금고 가장 깊은 곳, 평범한 종이와는 다른 이질적인 질량 밀도를 가진 양가죽 서류 한 장을 정확히 짚어냈다.
칼리는 떨리는 황동 손가락으로 그 문서를 꺼냈다.
서류의 우측 하단에는 차가운 은실로 정교하게 수놓아진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눈먼 칼리였지만, 그의 손끝 감각은 문장의 기하학적 형태를 너무나 명확하게 재구성하고 있었다.
‘이것은…….’
제국 최고 권위의 천문학 가문이자, 실명한 자신을 가차 없이 버렸던 친가.
‘델라크루아 가문’의 공식 가문 인장이었다.
그 문서는 단순한 거래 장부가 아니었다. 가문의 가주이자 친부인 에드워드가 태양 교단의 이단심문관들과 결탁하여, 별을 되찾으려던 고대 천문학자들과 자신의 증조부 아서를 조직적으로 밀고하고 처형시키는 데 앞장섰다는 추악한 공모의 기록이었다.
칼리의 은빛 안대 아래 감겨 있던 눈꺼풀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의 내면 깊은 곳에서 얼음처럼 차갑고도 거대한 분노의 인력이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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