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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송곳니의 피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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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정 정각. 배는 약속된 침묵의 무풍지대(無風地帶)에 진입했다.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검은 바다 ‘녹틸루카’의 수면은 마치 거대한 검은 거울처럼 매끄럽게 가라앉아 있었다. 돛은 힘없이 늘어졌고, 오직 배 하부의 패들이 규칙적으로 물을 가르는 둔탁한 소리만이 선체를 흔들었다.


이 지옥 같은 블랙 팽 호의 최하층 선창. 썩은 청어 기름 냄새와 피비린내가 뒤섞인 어둠 속에서, 칼리는 은빛 중력 안대 아래로 조용히 숨을 몰아쉬었다. 그의 오른손가락 세 개는 이미 차가운 황동 결정으로 변해 감각이 완전히 죽어 있었지만, 오히려 그 금속질의 손가락은 선체의 미세한 진동을 더 예민하게 흡수하고 있었다.


‘질량 분포 정상. 선체의 무게중심은 우현으로 1.2도 기울어짐. 상층 갑판의 해적 수, 총 열두 명. 순찰 주기는 180초.’


칼리의 뇌내에 전개된 ‘중력 투시안(重力透視眼)’은 선박 전체의 질량 구조를 3차원 격자 지도로 완벽하게 재구성하고 있었다. 눈이 멀었다는 제약은 오히려 그에게 우주의 배경 인력을 직접 인지할 수 있는 가장 완벽한 캔버스가 되어 주었다.


칼리는 옆에 서 있는 한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한스의 등은 지난밤 슬래셔 빌에게 맞은 채찍 자국으로 피가 베어 나와 누더기 천을 붉게 적시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눈빛만큼은 어둠 속에서도 맹수처럼 번뜩였다.


“한스, 등의 상처가 수축할 때마다 좌측 광배근의 반응 속도가 0.15초 지연될 거다. 백병전이 시작되면 왼쪽 측면 방어를 덩컨에게 맡겨라. 무리하게 왼팔을 뻗지 마.”


한스는 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맹인 소년의 입에서 나온 정교한 물리적 진단은 이제 그에게 신의 계시와도 같았다.


“알겠다, 칼리. 내 목숨은 이미 네 계산에 걸었어.”


“소냐는 이미 엔진실 하부의 에테르 밸브 인근에 자리를 잡았다. 신호가 울리면 그녀가 엔진을 과부하시켜 배의 모든 에테르 광원을 소멸시킬 거다. 그때가 우리의 진짜 전장이다.”


칼리는 품속에서 무겁고 녹슨 고대 황동 중력 망원경을 꺼내 굳어버린 오른손으로 단단히 쥐었다.


“시작해라.”


칼리의 나지막한 명령과 함께, 한스가 쇠사슬을 쥔 채 어두운 계단을 향해 소리 없이 움직였다.


첫 번째 목표는 갑판장 슬래셔 빌이었다. 그는 야간 순찰을 돌며 하층 선원들을 감시하는 개릭 선장의 가장 충직하고 잔인한 사냥개였다.


한스는 고양잇과 야수처럼 소리 없이 계단을 밟고 상층 갑판의 음영 지대로 스며들었다. 슬래셔 빌은 가죽 채찍을 허리에 찬 채, 에테르 전등의 붉은 불빛 아래에서 하품을 하고 있었다.


한스가 쇠사슬을 양손으로 팽팽하게 죄며 빌의 뒤편으로 덮쳤다. 쇠사슬이 빌의 목덜미를 휘감아 비명을 차단하려던 찰나.


쩍!


한스의 등 근육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과 함께 비틀거렸다. 칼리가 경고했던 0.15초의 지연. 그 미세한 틈을 타 슬래셔 빌이 한스의 손귀를 뿌리치며 뒤로 굴러떨어졌다. 빌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물들었다.


“이 노예 새끼가…!”


빌은 본능적으로 허리춤에 매달린 에테르 신호탄의 격발 고리를 잡아당겼다.


피융! 콰아아앙!


칠흑 같던 녹틸루카의 밤하늘 위로 기괴하고 눈부신 붉은색 섬광이 터져 나갔다. 붉은 빛이 안개 낀 바다를 피바다처럼 붉게 물들였고, 배 전체에 날카로운 경보음이 울려 퍼졌다.


“반란이다! 노예 놈들이 풀려났다!”


빌의 고함과 함께 선원 침실의 문들이 열리며 무장한 해적들이 갑판 위로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제길, 계산이 어긋났어!”


토비가 조타실 구석에서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칼리의 심박수는 여전히 분당 50회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의 안대 아래 푸른 안광이 미세하게 요동쳤다.


“어긋나지 않았다. 확률의 변수 범위 내다. 한스, 뒤로 물러서라! 그림, 덩컨, 갑판 중앙의 엄조물을 등지고 방어 대형을 갖춰라!”


칼리의 차갑고 명확한 목소리가 전장의 소음을 뚫고 아군들의 귀에 박혔다.


갑판 위는 순식간에 처절한 백병전의 전장으로 변했다. 쇠창과 몽둥이를 든 노잡이들과 잘 길들여진 단검과 머스킷 총을 든 해적들이 뒤엉켰다. 붉은 에테르 불빛 아래에서 쇠가 부딪히는 비명과 살점이 찢어지는 파열음이 난무했다.


그때, 선장실 방향의 두꺼운 목재 갑판이 쿵, 쿵 흔들리며 거대한 질량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구릿빛 피부에 털이 덥수룩한 거구, 블랙 팽 호의 부선장 브론즈였다. 그의 한 손에는 사람 머리통만 한 크기의 거대한 ‘브론즈 철퇴’가 쥐여 있었다. 그 철퇴가 움직일 때마다 공기가 무겁게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쥐새끼들이 감히 족쇄를 풀었구나!”


브론즈가 포효하며 철퇴를 휘둘렀다. 앞장서 가던 노잡이 한 명이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선외로 날아갔다. 한스가 황급히 나무 방패를 들어 브론즈의 앞길을 막아섰다.


쿠우웅!


“크아아악!”


압도적인 완력의 차이였다. 브론즈의 철퇴가 한스의 방패를 종잇장처럼 짓이기며 그의 왼팔 뼈를 그대로 부러뜨려 버렸다. 한스는 비명을 지르며 갑판 위를 굴렀다. 부러진 뼈가 살을 뚫고 나올 듯 기괴하게 꺾여 있었다.


“다음은 네놈이다, 장님 꼬맹이!”


브론즈의 붉게 충혈된 눈이 갑판 한가운데 서 있는 칼리를 향했다. 브론즈는 거대한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폭발적인 속도로 돌격하며, 칼리의 머리를 향해 철퇴를 수평으로 강하게 휘둘렀다.


‘질량 18킬로그램의 철퇴. 휘두르는 궤적의 가속도는 초속 14미터. 타격 점의 물리적 에너지는 내 육체를 분쇄하기에 충분함.’


칼리는 도망치지 않았다. 그의 중력 투시안이 철퇴가 그리는 공기 중의 미세한 중력 왜곡 선을 역학적으로 완벽히 읽어내고 있었다.


철퇴의 금속 가시가 칼리의 안대 끝자락에 닿기 직전의 찰나.


“무중력 회피(無重力回避).”


칼리가 심장 부근의 마력 회로를 극도로 압축해 방출했다. 그의 몸 주변의 중력 상수가 순간적으로 제로(0)로 떨어졌다. 질량을 잃어버린 칼리의 신체는 물리적인 관성의 법칙을 완전히 초월했다.


스우우웅!


브론즈의 철퇴가 엄청난 풍압을 일으키며 칼리의 목덜미를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칼리의 육체는 그 풍압이 만들어낸 공기의 기류에 가볍게 밀려나듯, 마치 한 장의 깃털처럼 소리 없이 사선으로 미끄러져 내려앉았다.


“뭐, 뭐야?! 놈이 어디로 간 거지?”


자신의 완벽한 타격이 허공을 가르자 브론즈가 균형을 잃고 비틀거렸다. 칼리는 바닥에 가볍게 착지하며 구동관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소냐, 지금이다! 동력을 역류시켜라!”


그 목소리가 전도관을 타고 엔진실 깊은 곳의 소냐에게 도달했다.


엔진실에 대기하고 있던 소냐가 이를 악물고 만능 태엽 렌치를 이용해 에테르 주입 밸브를 반대 방향으로 강하게 꺾어버렸다.


쿠구구구궁!


배의 심장부인 에테르 엔진이 비명을 지르며 역류하기 시작했다. 과부하된 에테르 에너지가 불꽃을 뿜으며 소멸했고, 그와 동시에 블랙 팽 호의 모든 에테르 서치라이트와 전등의 붉은 불빛들이 일시에 탁 소리를 내며 꺼져 버렸다.


스스스슥…….


갑판 위는 순식간에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완전한 어둠 속에 잠겼다. 짙은 밤안개와 녹틸루카의 영원한 암흑이 배를 통째로 집어삼켰다.


“앗! 눈이 안 보여!”


“불을 켜라! 에테르가 어디 간 거야!”


해적들이 비명을 지르며 우왕좌왕했다. 에테르 광원에 맹목적으로 의존해 전투를 치르던 그들에게 시각의 상실은 곧 완전한 무력화와 패닉을 의미했다. 그들은 어둠 속에서 서로의 무기에 찔리며 자멸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칼리에게 이 어둠은 가장 완벽하고 찬란한 전장이었다.


그의 중력 투시안은 어둠 속에서도 적들의 뼈 구조와 심장 박동의 진동, 그리고 그들이 쥐고 있는 강철 무기의 질량 밀도를 푸른색 홀로그램처럼 선명하게 그려내고 있었다.


“그림! 3시 방향, 5미터! 사슬을 던져라!”


칼리의 차가운 명령이 어둠을 갈랐다.


그림은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도 칼리의 목소리가 가리킨 정확한 좌표를 향해 묵직한 가시 쇠사슬을 내던졌다.


쇠철컹!


“끄아악!”


어둠 속에서 갈팡질팡하던 해적 한 명의 목뼈가 그림의 쇠사슬에 감겨 그대로 바스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덩컨! 10시 방향, 적의 화포 장전 완료 1.5초 전. 아래로 숙여라!”


덩컨이 반사적으로 바닥에 몸을 던졌다. 0.5초 뒤, 그의 머리 위 허공을 뚫고 적의 머스킷 탄환이 날카로운 바람 소리를 내며 지나갔다.


“그림! 11시 방향, 거대 질량 접근. 브론즈다. 바닥을 향해 쇠사슬을 휘둘러라!”


브론즈가 어둠 속에서 철퇴를 무차별적으로 휘두르며 다가오는 질량 궤적을 포착한 칼리가 소리쳤다.


그림은 망설임 없이 낮게 자세를 잡고 쇠사슬을 쓸어내리듯 바닥으로 휘둘렀다.


촤르르릉! 턱!


“윽!”


보이지 않는 쇠사슬이 브론즈의 거대한 두 다리를 단단히 옭아맸다. 브론즈가 무거운 질량을 이기지 못하고 앞으로 고꾸라지며 갑판 바닥이 무겁게 흔들렸다.


“지금이다, 그림! 쇠사슬을 당겨 고정해라!”


그림이 괴성을 지르며 쇠사슬을 자신의 몸에 감고 갑판 기둥에 고정시켰다. 브론즈는 거구의 몸이 쇠사슬에 완전히 결착된 채 버둥거렸으나, 무거운 철퇴의 무게와 쇠사슬의 장력 때문에 스스로 일어서지 못하고 갑판 위에 짓눌려 버렸다.


노잡이들과 아군 선원들의 환호성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어둠과 중력의 지배자인 칼리의 지휘 아래, 무장한 해적단 졸개들과 부선장 브론즈가 완벽하게 제압당한 것이다.


그러나 그 환호는 오래가지 못했다.


쿠구구구궁!


선장실의 두꺼운 목재 문이 안쪽에서 가해진 엄청난 물리적 충격에 의해 사방으로 찢어지며 폭발하듯 부서져 내렸다.


파편들이 갑판 위로 휘날리는 어둠 속에서, 지독하리만큼 무겁고 피비린내 나는 마력의 압박이 배 전체를 짓눌렀다. 그것은 지금까지의 잔챙이들과는 차원이 다른, 진정한 포식자의 질량이었다.


스슥, 스슥.


찢어진 문틈 사이로 붉은 가죽 코트를 걸친 거대한 사내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의 머리 위에는 거대한 삼각모가 비스듬히 쓰여 있었고, 그의 오른손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어둠 속에서도 기괴한 살기를 뿜어내는 강철 갈고리 의수 ‘데스 팽’이 장착되어 있었다.


블랙 팽 호의 선장이자, 칼리를 바다 괴수의 미끼로 유기했던 장본인.


개릭 선장이 피비린내를 풍기며 갑판으로 내려서고 있었다.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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