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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닻을 올릴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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쿵. 쿵. 쿵.


계단을 타고 내려오는 묵직한 발소리가 선창 바닥에 고여 있는 지저분한 빌지 워터를 미세하게 흔들었다. 그 진동은 썩은 목재와 소금기에 찌든 공기를 타고 칼리의 발바닥으로 고스란히 전해졌다.


눈먼 소년 칼리, 아니 현대 한국의 천문지도학자 한준우의 영혼이 깃든 그의 감각 속에서 세상은 물리적인 수치와 질량의 궤적으로 재구성되어 있었다. 안대 아래 가려진 두 눈은 아무것도 보지 못했으나, 그의 뇌내에 펼쳐진 ‘중력 투시안(重力透視眼)’은 침입자의 정보를 소수점 단위까지 연산해 내고 있었다.


‘질량 약 82킬로그램. 가죽 장화의 마찰 계수로 보아 보폭은 약 72센티미터. 내려오는 속도는 초속 0.8미터. 슬래셔 빌이다.’


갑판장 슬래셔 빌의 발소리에는 특유의 가학적인 리듬이 있었다. 바닥을 끄는 가죽 채찍의 금속 가시가 목재 계단을 긁을 때마다 쇳소리가 어둠 속을 갈랐다. 그가 선창 밑바닥에 도달하기까지 남은 시간은 정확히 1분 14초.


칼리는 소리 없이 몸을 움직였다. 그의 오른손가락 세 개는 이미 차가운 황동 결정으로 변해 감각을 잃었지만, 오히려 그 단단한 손끝은 미세한 진동을 더 정밀하게 흡수하는 안테나가 되어 있었다. 칼리는 구석에 얼어붙어 있던 천재 기계공 소냐의 어깨를 굳은 손가락으로 짚었다.


“소냐, 우측 2시 방향으로 세 걸음. 그곳에 선체 내부 보강재가 썩어 들어간 틈새가 있다. 너의 체적과 질량이라면 그 틈새의 밀도 프로필과 완벽히 일치해. 숨소리를 죽이고 그 안으로 몸을 밀어 넣어라.”


소냐는 칼리의 기이할 정도로 차분한 목소리에 압도당해 군말 없이 움직였다. 그녀가 썩은 목재 벽 틈새로 몸을 숨기자, 칼리는 겁에 질려 전신을 떨고 있는 소년 조타수 토비의 목덜미를 가만히 눌렀다.


“토비, 호흡 주파수를 0.8헤르츠로 낮춰라. 배가 파도에 흔들리는 롤링 리듬에 네 심장박동을 일치시켜. 슬래셔 빌의 예민한 청각을 기만해야 한다.”


“하, 하지만… 무서워요… 빌이 알면 우린 끝장이에요….”


“계산상으로 빌이 이 구역의 음영을 수색할 확률은 12% 미만이다. 내 지시대로만 하면 살 확률은 100%에 수렴한다. 숨을 내쉬어라. 지금이다.”


토비는 칼리의 차가운 손길에서 기묘한 신뢰감을 느끼며 서서히 호흡을 가라앉혔다.


정확히 74초 뒤, 슬래셔 빌이 선창 밑바닥의 썩은 목재 문을 거칠게 걷어찼다. 쾅! 문이 부서질 듯 흔들리며 에테르 가등의 탁하고 붉은 불빛이 어둠을 찢었다. 빌의 허리춤에 매달린 가죽 채찍이 뱀처럼 요동쳤다.


“어이, 쥐새끼들. 아직 안 죽고 살아들 있나?”


빌의 비열한 눈빛이 선창 내부를 훑었다. 그의 시선이 칼리와 토비가 앉아 있는 구석을 스쳐 지나갔다. 빌은 코를 킁킁거리며 젖은 물기와 비린내를 맡으려 했으나, 늙은 요리사 바르톨로가 교묘하게 썩은 감자 자루를 걷어차며 먼지를 일으켰다.


“콜록! 아구, 갑판장님. 이 먼지 구덩이에는 왜 내려오셨습니까? 보시다시피 노예 놈들은 굶겨 죽지 않을 만큼만 산소만 축내고 있습니다요.”


바르톨로가 비굴한 웃음을 지으며 빌의 시야를 가로막았다. 빌은 쯧 하고 혀를 차며 채찍을 한 번 휘둘렀다. 쫙! 채찍 끝이 칼리의 발치에서 단 10센티미터 떨어진 목재 바닥을 후려쳤다. 파편이 튀었으나 칼리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의 뇌내 연산은 이미 채찍의 궤적이 자신에게 닿지 않을 것임을 소수점 단위로 예측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르톨로, 개릭 선장님이 내일 포구에 도착하는 대로 쓸모없는 노잡이 놈들을 대거 정리하겠다고 하셨다. 이 장님이랑 꼬맹이 놈도 포함해서 말이야. 쓸데없이 식수 낭비하지 마라.”


“예, 예. 당연히 그래야지요.”


빌은 바르톨로의 뺨을 가볍게 툭툭 치고는 다시 계단을 올라갔다. 장화 소리가 멀어지고 마침내 상층 갑판의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린 후에야, 소냐가 벽 틈새에서 거친 숨을 몰아쉬며 기어 나왔다.


“미친… 진짜 심장이 터지는 줄 알았어. 칼리, 넌 어떻게 그렇게 차분할 수가 있는 거야?”


소냐가 이마의 식은땀을 닦으며 경탄 어린 눈으로 칼리를 바라보았다.


“감정은 연산 속도를 늦출 뿐이다.”


칼리는 그렇게 대답하며 품속에서 바르톨로가 건네준 양가죽 지도를 꺼냈다. 그리고 바르톨로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바르톨로, 선창 하층에서 노잡이들을 통솔하는 행동대장이 누구지?”


바르톨로는 침을 뱉으며 어두운 통로 끝을 가리켰다.


“한스라는 놈이다. 개릭 밑에서 가장 모진 채찍질을 버텨낸 덩치지. 하지만 그놈은 뼛속까지 냉소적인 인간이야. 눈먼 꼬맹이의 말 따위는 들으려 하지도 않을 거다.”


“그를 이리로 불러와라. 그가 거부할 수 없는 ‘사실’을 보여줄 테니.”


잠시 후, 바르톨로의 안내로 거구의 사내가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한스였다. 어깨가 떡 벌어지고 온몸에 채찍 흉터가 가득한 그는 칼리를 내려다보며 코웃음을 쳤다.


“이 눈먼 장님 꼬맹이가 나랑 거래를 하겠다고? 바르톨로, 이 늙은이가 드디어 노망이 났군. 이런 쥐새끼들과 놀아나다간 개릭의 갈고리에 목이 꿰어 바다 괴수의 미끼가 될 뿐이다.”


한스가 거친 손으로 칼리의 멱살을 움켜쥐며 위협했다. 그의 우람한 완력이 칼리의 가냘픈 목을 조여왔다. 토비가 비명을 지르려 하자, 칼리는 굳어버린 오른손 끝으로 한스의 손목 안쪽, 마력 순환의 흐름이 가장 취약한 급소점을 정확히 찾아내어 지그시 눌렀다.


“윽…!”


한스의 팔에서 순간적으로 힘이 빠져나갔다. 칼리는 멱살을 푼 채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차갑게 말했다.


“한스, 네 완력은 훌륭하지만 이 배는 6시간 뒤에 침몰한다. 너를 포함한 하층 노잡이 전원이 쇠사슬에 묶인 채 바다 밑바닥으로 가라앉게 된다는 뜻이다. 그것이 내가 제시하는 첫 번째 ‘사실’이다.”


“무슨 개소리냐? 개릭 선장은 베테랑이다. 안개 해역의 조류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


“그 베테랑이라는 자가 지금 우주의 물리 상수가 뒤틀린 ‘녹틸루카’의 역류를 일반적인 항해술로 돌파하려 하고 있지.”


칼리는 바닥의 흙먼지 위에 굳어버린 황동 손가락 끝으로 정교한 기하학적 궤적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현대 천문학의 타원 궤도 역학과 뒤틀린 중력 법칙을 결합한 ‘성궤 작도 기하학’의 기초 공식이었다.


“보아라. 현재 블랙 팽 호의 침로는 북서쪽 15도, 속력은 4노트다. 하지만 이 해역 하부에는 고대 성소의 붕괴로 발생한 보이지 않는 중력 왜곡원(Gravitational Anomaly)이 존재한다. 이 왜곡원이 만드는 인력 편차는 매 시간당 1.2밀리갈(mGal)씩 증가하고 있지. 결과적으로 배는 자신도 모르게 북동쪽으로 미세하게 끌려가고 있다.”


한스는 칼리가 그리는 기이한 공식들과 그의 이성적인 목소리에 자신도 모르게 시선을 빼앗겼다.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이냐?”


“이 궤적의 끝에는 ‘침묵의 암초’라 불리는 가라앉은 암벽 지대가 존재한다. 현재의 오차율을 대입하면, 정확히 10분 뒤인 23시 42분에 배의 우현 하부가 잠긴 암초의 외곽 기슭에 긁히게 된다. 쿵 하는 충격과 함께 용골이 비명을 지르겠지. 내 계산이 틀린다면 내 목숨을 취해도 좋다. 하지만 내 계산이 소수점 단위까지 일치한다면… 너희는 내 보이지 않는 닻을 올리고 반란의 선봉에 서야 할 것이다.”


선창 내부에 지독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한스는 칼리의 안대 너머를 꿰뚫어 보려는 듯 노려보았으나, 소년의 얼굴에는 오직 차가운 확신만이 감돌고 있었다. 소냐와 토비 역시 침을 삼키며 선창 벽의 낡은 회중시계를 응시했다.


째깍. 째깍.


시간은 물리 법칙의 상수대로 흘러갔다. 5분, 8분, 그리고 마침내 10분이 되는 순간.


쿠구구구구궁!


배 전체가 찢어지는 듯한 비명과 함께 거대하게 요동쳤다. 우현 하부에서 묵직한 바위가 나무판자를 긁고 지나가는 소름 끼치는 마찰음이 선창을 울렸다. 빌지 워터가 출렁이며 칼리의 발목을 적셨고, 상층 갑판에서는 해적들의 당황한 비명과 발소리가 분주하게 울려 퍼졌다.


“정말… 정말로 정확히 10분 뒤에…!”


한스의 거구의 몸이 미세하게 떨렸다. 맹인 소년이 어둠 속에서 그려낸 기하학 공식이 바다의 진실을 완벽하게 관통한 것이다. 한스는 천천히 칼리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너… 대체 정체가 뭐냐? 보이지 않는 눈으로 어떻게 바다의 뼈대를 보는 거지?”


“나는 보이지 않는 별빛의 인력을 믿을 뿐이다.”


칼리는 황동 망원경을 가만히 어루만지며 말했다.


“이제 약속을 지킬 시간이다, 한스. 하층 선원들을 규합해라. 개릭이 다음 정박지에서 너희를 숙청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이 배의 키를 잡는다.”


“좋다. 내 목숨을 너의 계산에 걸지.”


한스가 굳은 결의를 다지며 어둠 속으로 물러섰다. 드디어 반란의 가장 강력한 물리적 우군이 확보된 순간이었다.


그러나 위기는 예기치 못한 곳에서 찾아왔다. 선창 구석에서 칼리의 황동 망원경 내부 기어 장치를 분해해 정비하던 소냐가, 망원경의 기어 마찰을 줄이기 위해 ‘마학 공학 기어 조율법’을 가동하는 순간이었다.


그녀의 손끝에서 미세한 마공 진동이 일어났고, 낡고 녹슨 황동 톱니바퀴들이 서로 맞물려 회전하기 시작했다. 아주 정밀한 작업이었으나, 오랜 세월 쌓인 녹의 저항은 완벽히 계산되지 못했다.


끼이이이익!


날카롭고 신경질적인 금속 마찰음이 좁은 선창 통로를 타고 울려 퍼졌다. 쇳소리는 목재 보를 타고 순식간에 상층 갑판의 계단으로 전도되었다.


칼리의 중력 투시안이 급격하게 경보를 울렸다. 상층 갑판에서 쇠를 깎는 듯한 숫돌 소리가 멈추고, 거구의 질량체가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질량 120킬로그램. 발걸음의 압력으로 보아 브론즈다. 그가 철퇴를 다듬다 이 소리를 들었다.’


브론즈는 개릭의 오른팔이자 짐승 같은 직감을 지닌 일등항해사였다. 그의 거대한 철퇴가 계단을 긁으며 내려오는 음산한 소리가 들려왔다. 슥, 슥, 슥….


“소냐, 정지해라! 브론즈가 오고 있다. 남은 시간은 45초.”


칼리가 경고했으나, 이미 톱니바퀴는 마력 진동에 묶여 회전을 멈추지 않고 있었다. 브론즈의 예민한 청각에 이 소리가 완전히 포착되는 순간, 반란 계획은 거사도 치르기 전에 발각되어 몰사할 터였다.


칼리는 즉시 한스를 바라보았다.


“한스, 더 큰 소음으로 이 마찰음을 덮어야 한다. 지금 당장 하층 선원들과 배급 식량을 두고 격렬한 싸움이 벌어진 것처럼 소란을 피워라!”


“하지만 갑자기 소란을 피우면 빌이나 브론즈의 채찍이 가만있지 않을 텐데…!”


“지금 매를 맞지 않으면 내일 아침은 시체로 맞이하게 된다. 선택해라.”


한스는 이를 악물었다. 그는 즉시 통로로 달려나가 쇠사슬을 벽에 거칠게 부딪히며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다.


“이 개자식들아! 내 빵 내놔! 굶겨 죽일 작정이냐!”


“죽여버릴 거야! 으아악!”


노잡이들이 단체로 쇠사슬을 흔들며 비명을 지르고 오크통을 걷어찼다. 선창 전체가 떠나갈 듯한 소음이 소냐의 망원경 기어 소리를 완벽하게 덮어버렸다.


쾅! 계단 문이 열리며 거구의 브론즈가 무시무시한 철퇴를 들고 선창으로 난입했다. 그의 비열한 눈동자가 광기로 번뜩였다.


“이 노예 새끼들이 감히 어디서 소란이야!”


브론즈는 한스의 멱살을 잡고 그를 갑판 바닥에 거칠게 내팽개쳤다. 그리고 가죽 채찍을 든 슬래셔 빌이 뒤따라 내려와 한스의 등에 가차 없는 채찍질을 가했다. 쫙! 쫙! 한스의 거친 등에 붉은 선혈이 터져 나왔으나, 그는 이를 악물고 비명을 참으며 소란의 연극을 이어갔다.


칼리는 어둠 속에서 안대 아래로 그 광경을 지켜보며 주먹을 꽉 쥐었다. 그의 황동 결정화된 손가락이 차갑게 식어갔다.


브론즈는 한참 동안 한스를 짓밟고 서 선원들을 노려보더니, 쯧 하고 침을 뱉으며 철퇴를 거두었다.


“내일 포구에 도착하면 이 새끼들부터 괴수 먹이로 던져버려라.”


브론즈와 빌이 다시 계단을 올라가고 문이 닫히는 순간, 선창에는 무거운 침묵과 피비린내가 가득했다. 한스는 피투성이가 된 등을 바닥에 댄 채 거친 숨을 내쉬며 칼리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에는 고통 속에서도 꺾이지 않는 처절한 살기가 서려 있었다.


칼리는 한스에게 다가가 그의 상처를 가만히 짚었다. 그리고 나지막이 속삭였다.


“더 이상 거사를 미룰 수 없다. 개릭이 우리를 숙청하기 전에… 오늘 밤, 보이지 않는 닻을 올린다.”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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