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창 밑바닥의 공모자들
끼이이익, 콰르르릉.
블랙 팽 호의 거대한 목제 패들 휠이 바닷물을 짓이기며 회전하는 소리가 안개 낀 해수면을 타고 무겁게 울려 퍼졌다.
차가운 바닷물에 젖은 채 부서진 폐선 잔해 위에 엎드려 있던 칼리는 가만히 숨을 죽였다. 오른손 끝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단순히 저체온증 때문이 아니었다. 손톱 끝에서부터 시작해 손가락 세 개가 기괴한 황동빛 결정으로 변해 있었다. 두드리면 쇳소리가 날 것처럼 딱딱하게 굳어버린 손가락. 그것은 고대 황동 중력 망원경의 힘을 일깨우고 괴수 레비아탄의 돌격을 피하기 위해 마력을 억지로 쥐어짠 대가였다. ‘황동 결정화의 저주’가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칼리는 고통을 겉으로러 드러내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 아니 현대 한국의 천문지도학자 ‘한준우’의 이성은 차갑고 정교한 기계처럼 회전하고 있었다.
‘개릭 선장은 내가 완전히 죽었다고 믿고 배를 선회시키고 있다.’
쿵. 쿵. 쿵.
배의 흔들림이 젖은 판자를 통해 칼리의 온몸으로 전해졌다. 칼리는 눈먼 양안을 가린 안대 아래에서 감각을 곤두세웠다. 과거 늙은 핀치에게 배웠던 ‘음파 조류 감지술’이었다. 귀를 나무판자에 밀착한 채, 파도가 선체에 부딪히는 주파수와 엔진의 진동 소리를 분석했다.
‘배의 흘수선 깊이로 보아 현재 적재량은 약 120톤. 침로 북서쪽 15도, 속력은 4노트. 회전할 때 우현으로 쏠리는 각도를 보니 용골 하부에 미세한 균열이 있군.’
보이지 않는 눈 대신, 물리학적 수치들이 그의 머릿속에 완벽한 3D 공간 지도로 재구성되었다. 블랙 팽 호가 자신을 버린 해역을 확인하기 위해 크게 선회하는 순간, 칼리는 움직였다. 배 하부의 배수구 주변은 물살의 흐름이 느려지는 완벽한 중력적 사각지대였다.
스스슥.
칼리는 소리 없이 물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황동 망원경을 품에 단단히 안은 채, 배 하부의 따개비가 가득한 목재 용골을 붙잡았다. 그리고 선원들이 쓰레기를 버리기 위해 열어둔 하부 배수구 틈새를 타 소리 없이 선내로 밀입선했다.
그가 도달한 곳은 블랙 팽 호에서 가장 어둡고 습한 최하층 선창이었다. 썩은 청어 기름 냄새와 축축한 곰팡이 내가 코를 찔렀다. 발목까지 차오른 빌지 워터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찰랑거렸다.
[특수 능력 가동: 중력 투시안(重力透視眼) 2성]
안대 표면에 미세한 푸른색 마력 불꽃이 아른거리며 흘러나왔다. 감지 범위가 30미터로 확장되자,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사물들의 질량 밀도가 뇌내에 투시되었다. 선창 구석, 쇠지랑과 깨진 오크통들 사이에 주저앉아 있는 두 개의 실루엣이 보였다.
하나는 깡마른 체구에 쇠사슬로 묶인 채 벽에 기대어 있는 인물. 다른 하나는 구석에서 무릎을 안고 바들바들 떨고 있는 소년이었다.
“누구… 힉!”
구석에 있던 소년이 칼리의 기척을 느끼고 숨을 들이켜며 비명을 지르려 했다. 블랙 팽 호의 소년 조타수, 토비였다.
“조용히 해, 토비. 비명을 지르면 상층 갑판의 슬래셔 빌이 내려올 거다.”
칼리가 낮고 차가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의 목소리에는 거친 해적선에서 감히 상상할 수 없는 기묘한 평정심이 깃들어 있었다. 토비는 제 입을 두 손으로 틀어막으며 눈물을 흘렸다. 죽은 줄 알았던 눈먼 노역수가 유령처럼 살아 돌아온 것에 극도의 패닉을 느낀 것이다.
칼리는 토비의 옆, 쇠사슬에 묶여 있는 소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천재 기계공 소냐였다. 교단의 기술 독점에 저항하다가 장비를 빼앗기고 이곳에 감금된 채 노역을 강요당하고 있는 신세.
“칼리…? 네가 어떻게 살아 있는 거지? 개릭이 분명 널 바다에 던졌는데……”
소냐가 이빨을 딱딱 마주치며 경계의 눈빛을 보냈다. 칼리는 대답 대신 그녀의 다리를 묶고 있는 굵은 무쇠 사슬을 향해 다가갔다. 오른손의 황동 손가락이 사슬의 연결고리를 매만졌다.
‘질량 중심점 포착. 인력의 응축 주파수는 440헤르츠.’
칼리는 망원경의 미세한 중력 반동을 이용해 사슬의 가장 약한 균열점에 순간적인 압박을 가했다.
탁!
가느다란 파열음과 함께 굵은 무쇠 사슬이 힘없이 풀려나갔다. 소냐의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크게 흔들렸다. 열쇠도 없이, 오직 손끝의 감각만으로 쇠사슬의 물리적 결합을 해체한 것이다.
“넌 맹인이잖아. 그리고 그 손은… 무슨 짓을 한 거야?”
소냐의 시선이 칼리의 오른손 끝, 차갑게 빛나는 황동 결정에 닿았다. 칼리는 망원경의 초점 다이얼을 미세하게 비틀며 차갑게 대답했다.
“눈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세상을 읽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 소냐, 네 셔츠깃에 묻은 기름때를 봐라. 단순한 타르가 아니군. 교단 수송선에서나 사용하는 고농도 정제 에테르 3종 유실물이지? 네가 기계를 고칠 때 쓰는 윤활유의 성분과 일치해.”
소냐는 숨을 들이켰다. 자신의 정비 비밀을 단 한 번의 ‘관측’으로 알아맞힌 맹인 소년의 능력에 공학자로서의 전율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말도 안 돼… 그걸 어떻게 알았지? 그 황동 망원경 내부의 기어 구조… 대체 어떤 미친 천재가 설계한 거야? 기어비가 소수점 다섯 자리까지 맞물려 있어……”
소냐의 눈이 칼리가 쥔 황동 망원경으로 향했다. 그녀의 손끝이 직업적인 열망으로 미세하게 떨렸다. 칼리는 그녀의 눈빛에서 기술적 신뢰의 가능성을 보았다.
“나를 도와라, 소냐. 이 망원경을 마학 공학적으로 개조해 준다면, 이 지옥 같은 배를 탈출시켜 주지. 이건 감정적인 의리가 아니라, 너와 나의 생존율을 수치로 계산한 이성적인 제안이다.”
“하, 하지만…!”
토비가 울먹이며 끼어들었다.
“우린 탈출할 수 없어요! 개릭 선장은 괴수도 따돌렸고, 내일이면 교단의 세관 구역으로 진입한다고요! 도망치려다 들키면 슬래셔 빌의 채찍에 가죽이 벗겨져 죽을 거예요!”
칼리는 토비의 겁에 질린 주근깨투성이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토비, 개릭이 괴수를 따돌렸다고 생각하나? 아니, 틀렸다. 30분 뒤, 이 배는 그레이 고스트 해역의 급격한 역류 구역에 진입한다. 조타륜을 우측으로 15도 꺾어 해류의 밀도 차이를 타지 않으면, 용골이 암초에 긁혀 배 전체가 침몰할 거다.”
“그,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맹인이 바다의 흐름을 본단 말이야?”
“내 말이 틀린지 지켜봐라. 30분이다.”
칼리는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하며 선창 구석의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겼다.
시간이 흘렀다. 정적만이 가득한 선창 밑바닥에서 토비는 침을 삼키며 배의 진동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소냐 역시 칼리가 제시한 수치들을 머릿속으로 연산하며 초조하게 대기했다.
정확히 29분 뒤.
우드드득!
배 전체가 비명을 지르듯 격렬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상층 갑판에서 해적들의 당황한 고함과 발소리가 분주하게 울렸다. 물결이 배의 좌현을 강하게 때리며 선체가 한쪽으로 급격히 기울어졌다. 용골 밑바닥에서 무언가 긁히는 듯한 소름 끼치는 마찰음이 들려왔다.
“정말… 정말로 암초에…!”
토비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물들었다. 칼리가 예언한 시각과 물리적 현상이 단 1초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맞아떨어진 것이다. 소년 조타수는 이제 칼리를 단순한 맹인이 아닌, 보이지 않는 바다의 지배자를 보듯 경외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때, 선창 구석의 비밀 통로 문이 스르륵 열렸다.
피로 얼룩진 요리사 앞치마를 두른 뚱뚱한 노인, 요리사 바르톨로가 낡은 가죽 물통과 마른 빵 몇 조각을 들고 나타났다. 그는 살아 있는 칼리를 보고도 크게 놀라지 않았다. 이미 선내 하층 선원들의 동태를 살피며 칼리의 반란 계획을 은밀히 돕기로 결심한 자였다.
“살아 있었군, 꼬맹이. 괴수의 이빨 사이에서 걸어 나오다니, 네놈 보통 놈이 아니야.”
바르톨로가 텁수룩한 수염을 쓸어내리며 칼리에게 물통을 건넸다. 그리고 품속에서 낡은 양가죽 종이 한 장을 꺼내 조심스럽게 내밀었다. 그것은 개릭 선장의 방 내부 구조와 탈출용 소형 보트의 열쇠 위치가 적힌 조잡한 지도였다.
“밀고하지 않는 대가다. 나 역시 개릭 그 미친 자식 밑에서 평생 썩고 싶진 않으니까.”
칼리는 물통을 받아 굳어버린 황동 손가락으로 쥐었다. 차가운 물이 목구멍을 넘어가자 저체온증으로 떨리던 몸이 조금은 진정되었다.
“고맙군, 바르톨로.”
“고마워할 시간 없다.”
바르톨로의 얼굴이 어둡게 굳어졌다.
“갑판장 슬래셔 빌 놈이 선창 하층의 보초 주기를 평소보다 두 배나 앞당겼어. 네놈이 살아 돌아왔을지 모른다는 의심을 품은 건 아니겠지만, 노잡이 놈들이 동요하는 걸 눈치챈 모양이야. 지금 당장이라도……”
쿵! 쿵! 쿵!
바르톨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머리 위 갑판으로 연결된 나무 계단에서 묵직한 가죽 장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채찍을 바닥에 쓸며 내려오는 슬래셔 빌의 음산한 발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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