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렌의 환각 분지
안개 너머에서 들려오는 거대 철갑선들의 웅웅거리는 추진음이 밤바다를 무겁게 짓눌렀다.
오크헤이븐 포구를 기적적으로 탈출했으나 기쁨은 찰나에 불과했다. 스타라이트 호의 용골 깊숙이 새겨진 붉은색 ‘태양교단 이단 인장’이 불길한 마력 파동을 사방으로 뿜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낙인이 가리키는 좌표를 따라, 이단심문관 빅토르가 이끄는 제4추격 함대의 거대 철갑선들이 자욱한 밤안개를 찢어발기며 무서운 속도로 좁혀오고 있었다.
“선장님! 적 기함과의 거리 3.2마일! 이대로 가다간 10분 뒤에 사정거리에 잡힙니다!”
조타수 토비가 키를 잡은 손을 바들바들 떨며 외쳤다. 포구 탈출 당시 무중력 도약 기동의 여파로 전신에 근육통을 앓고 있는 소년의 얼굴은 땀과 바닷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갑판 상황도 최악이었다. 엔진실에서 올라온 소냐가 그을음이 묻은 이마를 훔치며 소리쳤다.
“연료 과부하 때문에 우현 냉각관이 완전히 터졌어! 임시로 땜질은 해놨지만, 기함의 에테르 엔진 출력이 평소의 40%도 안 나와! 이 속도로는 저 괴물 같은 철갑선들을 따돌릴 수 없어!”
칼리는 은빛 중력 안대를 착용한 채, 굳어버린 오른손가락으로 고대 황동 중력 망원경을 만지작거렸다. 오른손가락 세 개는 이미 차가운 황동 결정으로 변해 감각을 상실한 상태였지만, 그 금속성 회로를 통해 흐르는 미세한 중력의 파동만큼은 누구보다 명확하게 뇌내로 흘러들고 있었다.
‘질량 분석. 추격해오는 적 철갑선들의 총 질량은 최소 1,200톤 이상. 반면 우리 스타라이트 호는 180톤에 불과하다. 이 속도 차이를 물리적인 추진력만으로 극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환경의 밀도를 바꿔야 한다.’
칼리의 머릿속 3D 중력 그리드 지도 위에서, 전방 해역의 특정 구역이 기묘하게 일그러진 밀도 공백 지대로 투사되고 있었다. 그곳은 연안 항해사들 사이에서 살아서 돌아온 자가 없다고 전해지는 금기 해역이었다.
“토비, 키를 좌현 15도로 꺾어라. 목표는 ‘사이렌의 안개 분지’다.”
그 말에 조타실의 공기가 순간적으로 얼어붙었다. 토비는 물론, 갑판을 정리하던 베테랑 포수 덩컨마저 숨을 들이켰다.
“선장님! 거기는 미친 안개와 환각 포자가 가득한 죽음의 구역입니다! 그곳에 진입한 선원들은 모두 괴수를 보았다며 서로 칼을 겨누다 자멸했습니다! 교단조차 감히 접근하지 못하는 비경인데 그곳으로 들어가자니요!”
“빅토르의 철갑선들은 우리 배에 새겨진 에테르 낙인 신호를 추적하고 있다.”
칼리가 낮고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흔들림 없는 수치적 확신이 깃들어 있었다.
“하지만 안개 분지의 독성 포자는 공기 중의 에테르 마력을 강하게 흡수하고 굴절시키는 특성을 지니고 있지. 즉, 그곳에 진입하는 순간 우리의 이단 낙인 신호는 포자 장막에 가로막혀 완벽하게 은폐된다. 적들의 압도적인 탐지망과 화력을 무력화할 유일한 물리적 공백지다. 안개 해역 생존 수칙에 따라 전원 해치를 폐쇄하고 대기하라.”
칼리의 단호한 명령에 선원들은 이빨을 악물며 움직였다. 스타라이트 호는 육중한 선체를 돌려, 보랏빛을 띠는 기괴하고 짙은 안개 장막 속으로 미끄러지듯 진입했다.
스으으으-
분지에 발을 디딘 순간, 세상의 모든 소음이 일시에 차단된 듯한 기묘한 침묵이 배를 감쌌다. 공기 중에는 미세하고 달콤한 금속성의 냄새가 풍겼다. 독성 환각 포자였다.
“전원 마스크를 밀착해라! 포자를 흡입하면 안 된다!”
의무장 루시아가 긴급하게 조제한 심해 이끼 약초 주머니를 선원들에게 배분하며 외쳤다. 그러나 침투력이 강한 포자는 미세한 틈새를 타 갑판과 선실 내부로 빠르게 스며들기 시작했다.
“아악! 저기… 저기 괴수가 보인다! 바다 밑에서 거대한 이빨이 올라오고 있어!”
갑판을 지키던 한 선원이 갑자기 허공을 향해 칼을 휘두르며 비명을 질렀다. 그의 눈동자는 초점을 잃은 채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독성 포자가 뇌의 시각 피질을 자극해 가장 두려워하는 환각을 실체화시킨 것이다.
“그림! 쇠사슬을 치워! 네가 날 죽이려 하는 거지!”
또 다른 선원이 그림을 향해 돌진하려 했다. 그림은 당황하여 그를 밀쳐냈지만, 사방에서 선원들이 비명을 지르며 서로를 적으로 오인해 무기를 치켜들기 시작했다. 갑판은 순식간에 광기와 패닉의 아수라장으로 변해갔다. 루시아가 이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약사발을 들고 다가갔으나, 환각에 빠진 선원이 휘두른 거친 손짓에 약사발이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 났다.
“안 돼… 안 돼! 오빠, 살려줘!”
최하층 선창에서 들려오는 여동생 리나의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스피킹 튜브를 타고 조타실까지 울려 퍼졌다. 칼리의 심박수가 일시적으로 요동치려 했으나, 그는 이내 이빨을 지그시 깨물며 심박수를 분당 50회로 강제 고정했다.
‘감정의 동요는 연산의 오차를 낳는다. 이성적 관찰을 유지해라.’
그때, 조타 키를 쥐고 있던 토비가 기괴한 신음을 흘리기 시작했다.
“어머니… 리아 누나… 왜 피를 흘리고 있는 거야? 나 때문에… 내가 키를 잘못 잡아서 다들 죽은 거야? 안 돼!”
토비의 눈앞에는 과거 개릭 선장의 배에서 자신 때문에 죽어갔던 동료들의 피투성이 환영이 아른거리고 있었다. 극도의 패닉에 질린 토비가 비명을 지르며 키를 오른쪽으로 무작정 꺾으려 했다.
그 방향은 전방 100미터 지점에 우뚝 솟아 있는 거대한 칼날 암초 지대였다. 이 속도로 충돌한다면 스타라이트 호의 부식된 용골은 단번에 두 조각으로 쪼개질 터였다.
“토비, 멈춰라!”
칼리가 번개처럼 다가가 토비의 뺨을 거칠게 후려쳤다. 짝! 매서운 마찰음과 함께 토비가 고개를 돌렸지만, 그의 눈동자는 여전히 공포의 안개에 갇혀 있었다.
칼리는 주저 없이 자신의 안대를 벗어던졌다.
그의 눈꺼풀 아래 감겨 있던 양안이 열리며, 소용돌이치는 푸른 중력의 은하 안광이 칠흑 같은 조타실 내부를 은은하게 밝혔다.
물리적인 시력을 완전히 잃은 칼리의 어둠 속에는, 적들을 미치게 만든 보랏빛 환각 포자의 기만적인 광학 자극이 단 1%도 유입되지 않았다. 이것이야말로 눈을 잃은 자만이 진실을 볼 수 있다는 ‘눈먼 항해사의 역설(눈먼 항해사의 역설)’이었다. 세상의 눈이 보이는 모든 항해사들을 파멸로 몰고 간 죽음의 분지에서, 오직 칼리만이 유일하게 오염되지 않은 차가운 이성의 좌표를 유지하고 있었다.
칼리는 황동 결정화가 진행되어 딱딱하게 굳어버린 자신의 오른손을 토비의 떨리는 손 위에 얹었다. 차갑고 단단한 금속의 감각이 소년의 살결에 닿았다.
“눈을 감아라, 토비. 네 눈에 보이는 것은 교단이 주입한 가짜 빛의 망상에 불과하다. 보이지 않는 내 손의 무게를 느껴라.”
칼리의 나지막하고 깊은 목소리가 토비의 고막을 두드렸다. 소년은 오빠이자 선장인 그의 절대적인 평정심에 이끌리듯 천천히 눈을 감았다. 시각적 환각이 차단되자, 토비의 거친 호흡이 조금씩 가라앉기 시작했다.
“제가… 어떻게 해야 하나요, 선장님? 앞이 보이지 않아요…”
“내가 지시하는 수치대로만 키를 움직여라. 조류의 마찰력을 손끝으로 느껴라.”
칼리는 뇌내에서 ‘음파 조류 감지술’을 극한으로 가동했다. 귓바퀴가 미세하게 떨리며, 파도가 전방의 기암괴석에 부딪혀 되돌아오는 미세한 음향 주파수와 공기 중의 기압 변화가 그의 고막을 타고 뇌의 연산 회로로 유입되었다.
동시에 ‘중력 투시안’ 2성의 권능이 펼쳐졌다. 안개 속에 숨겨진 거대 암초들의 밀도 분포와 해저 지형의 질량 덩어리들이 정교한 3D 청색 그리드 홀로그램으로 그의 뇌리에 재구성되었다.
‘전방 45미터, 칼날 암초의 질량 450톤. 좌현으로 흐르는 역류 조류의 유속 초속 2.3미터. 풍향은 북서풍 3노트. 마찰 계수 보정 완료.’
“우현 4도. 돛의 각도를 바람의 사선에 맞춰라. 흘러드는 조류의 밀도를 타고 비껴간다.”
칼리가 지시하는 정밀한 기하학적 수치에 맞춰, 토비는 눈을 감은 채 손끝의 촉각에만 집중하여 조타 키를 미세하게 조율했다.
스타라이트 호의 선체가 파도에 밀려 좌우로 크게 흔들렸지만, 배는 마치 칼날 위를 미끄러지듯 거대한 기암의 가장자리를 단 몇 인치 차이로 아슬아슬하게 비껴 지나갔다. 배의 우현 장갑이 암초의 이끼 낀 표면을 긁으며 둔탁한 쇳소리를 냈으나, 선체는 부서지지 않았다.
“성공했습니다…! 암초를 통과했어요!”
토비가 감은 눈 사이로 눈물을 흘리며 외쳤다.
칼리는 쉬지 않고 다음 항로를 연산했다. 갑판 위의 선원들이 환각 속에서 더 큰 폭동을 일으키기 전에 이 분지를 빠르게 빠져나가야 했다. 그는 음파의 반사 주파수를 추적하며 안개 분지의 출구이자 가장 안전한 수로인 ‘푸른 노래의 암초’ 초입으로 함선의 기수를 정확하게 인도해 나갔.
눈이 보이는 자들이 환각에 속아 자멸하는 죽음의 바다에서, 오직 앞이 보이지 않는 장님 항해사만이 유일하게 진실된 물길을 인지하며 절대적인 주도권을 쥐고 전진하고 있었다.
가까스로 가장 험난한 암초 지대의 마지막 관문을 돌파하려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갑자기 함선의 목재 용골 전체가 미세하게 공명하며 기이한 진동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웅웅웅-
그것은 단순한 파도의 충격이 아니었다. 안개 분지 너머, 해저 깊은 곳으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극도로 낮고 정교한 주파수의 파동이었다.
그리고 이내, 자욱한 보랏빛 안개 장막을 타고 선원들의 고막을 파고드는 기괴하고도 아름다운 여성의 노랫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아아아… 아아……”
그 노랫소리가 고막에 닿는 순간, 겨우 안정을 찾아가던 토비의 눈동자가 다시 한번 허공을 향해 크게 뒤틀렸고, 갑판 위에서 쓰러져 있던 선원들이 짐승 같은 비명을 지르며 제 머리를 쥐어뜯기 시작했다. 포자의 환각을 수십 배로 증폭시키는 치명적인 음파 공격이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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