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이 삼킨 성당
“네놈이 바다 괴물의 아가리에서 살아 돌아온 장님 항해사 칼리구나.”
해리스 경비대장의 목소리가 좁은 성당 지하 기도실의 석조 벽면을 타고 축축하게 울렸다. 그의 은빛 판금 갑옷은 성당 벽면에 설치된 에테르 탐지 마법진의 붉은 경보 빛을 받아 피비린내 나는 붉은색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해리스의 거친 손에 쥐인 가죽 채찍 끝이 양어머니 마리아의 목덜미를 가볍게 짓누르고 있었다.
“오빠……!”
리나가 칼리의 허리를 꼭 안은 채 사르르 떨었다. 깡마른 여동생의 작은 손이 칼리의 황동 결정화된 오른손을 쥐고 있었기에, 영혼을 갉아먹던 결정화의 작열통은 일시적으로 가라앉아 있었다. 하지만 칼리의 내면에서 끓어오르는 분노의 중력만큼은 그 어떤 심해 괴수보다도 무겁게 가라앉고 있었다.
가장 아끼는 가족의 목숨을 담보로 한 비열한 협박.
보통의 인간이라면 이성을 잃고 비명을 지르거나 무릎을 꿇었을 상황이었다. 그러나 칼리의 가슴속 심장박동은 여전히 분당 50회를 유지하고 있었다. 현대 한국의 천문지도학자 한준우의 영혼이 각성시킨 차가운 이성은, 분노라는 감정마저 철저한 물리적 데이터와 승리의 공식을 유도하기 위한 에너지로 치환하고 있었다.
‘해리스 경비대장. 신장 190센티미터, 체중 100킬로그램 안팎. 그가 착용한 교단 공인 판금 갑옷의 무게는 최소 40킬로그램.’
은빛 중력 안대 너머, 칼리의 ‘중력 투시안(重力透視眼)’이 붉은 경보 빛을 뚫고 전방의 질량 분포를 완벽하게 해독해 내기 시작했다. 빛을 잃은 그의 시야는 암흑이었으나, 뇌내에 전개된 3D 중력 그리드 지도 위에서는 해리스와 20명의 정예 경비병들의 뼈 구조와 판금 갑옷의 밀도가 푸른색 실루엣으로 선명하게 그려지고 있었다.
‘좁고 폐쇄된 성당 지하 기도실. 바닥은 미끄러운 대리석. 중갑을 입은 기사들은 방어력이 극대화되지만, 그만큼 질량이 커져 관성의 지배를 강하게 받는다. 시야만 차단할 수 있다면, 저들의 무게는 스스로를 무너뜨리는 가장 완벽한 덫이 된다.’
칼리는 오른손에 쥔 무겁고 녹슨 고대 황동 중력 망원경의 경통을 미세하게 조율했다. 손가락 끝의 황동 비늘들이 차가운 금속 표면과 공명하며 미세한 진동을 일으켰다. 그의 곁에서 석궁을 쥔 채 대기하던 경비병 마크가 칼리의 미세한 손가락 움직임을 포착했다. 사전에 스타라이트 호에서 맞추었던 ‘암전(暗戰)’의 수신호였다.
“어이, 장님 놈아. 귀가 처먹었나? 내 말이 장난 같은가 보지?”
해리스가 채찍을 쥔 손에 힘을 주자, 마리아의 목덜미에서 붉은 핏방울이 한 방울 흘러내렸다. 마리아는 아들에게 해가 갈까 봐 이빨을 악물고 신음을 참았다. 그 옆에서 어깨에 깊은 자상을 입고 피를 흘리던 바스케스 신부가 비틀거리며 해리스의 앞을 가로막으려 했다.
“해리스 대장…… 교회의 신성한 기도실에서 이런 폭거를……!”
“시끄럽다, 타락한 사제 놈아! 이 장님 이단자를 숨겨준 죄로 네놈도 내일 아침 광장에서 화형에 처해질 테니!”
해리스가 거칠게 채찍을 휘둘러 바스케스 신부를 밀쳐냈다. 신부의 몸이 바닥을 쓸며 쓰러졌다. 해리스의 시선이 다시 칼리의 오른손에 쥔 황동 망원경으로 향했다. 탐욕에 가득 찬 그의 눈동자가 번들거렸다.
“마지막 경고다. 망원경을 바닥에 버리고 무릎을 꿇어라!”
칼리는 안대 아래에서 입꼬리를 차갑게 올렸다. 그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성당의 무거운 공기를 갈랐다.
“해리스 대장, 당신은 두 가지를 틀렸습니다.”
“뭐라?”
“첫째, 중갑을 입은 군인은 좁은 공간에서 아군을 지키기에 가장 적합하지 않다는 것.”
칼리가 손가락을 미세하게 튕겼다.
“둘째, 눈먼 자에게 빛은 아무런 무기가 되지 못하지만, 어둠은 완벽한 아군이 된다는 것입니다. 마크, 지금이다.”
그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칼리의 뒤에 서 있던 마크가 주저 없이 석궁의 방아쇠를 당겼다.
슝-! 콰아아앙!
강철 볼트가 해리스의 머리 위가 아닌, 성당 천장 중앙에 매달려 있던 거대한 청동 샹들리에의 쇠사슬 연결 고리를 정확히 타격했다. 쇠사슬이 비명을 지르며 끊어졌고, 수백 개의 촛불을 밝히고 있던 거대한 청동 덩어리가 해리스의 경비병들이 밀집해 있던 중앙 바닥으로 굉음과 함께 추락했다.
콰창! 파수수수수!
순식간에 성당 내부의 모든 빛이 소멸했다. 붉게 타오르던 에테르 탐지 마법진마저 샹들리에의 추락 충격으로 파괴되며, 지하 기도실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완전한 암전(暗戰) 속에 잠겼다.
“으악! 불을 켜라! 에테르 등을 가동해라!”
“침입자다! 무기를 잡아라!”
갑작스러운 어둠 속에서 경비병들이 비명을 지르며 우왕좌왕했다. 시각 정보가 완전히 차단되자, 40킬로그램의 중갑을 입은 기사들은 서로의 갑옷이 부딪히는 쇳소리에 극도의 패닉에 빠졌다. 그들은 보이지 않는 허공을 향해 무차별적으로 장창과 검을 휘둘렀다. 좁은 공간에서 무거운 질량체들이 엉키며 자멸적인 혼란이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눈이 먼 칼리에게 이 어둠은 가장 완벽하고 정교한 홈그라운드였다.
칼리의 안대 뒤에서 푸른 은하의 광륜이 맹렬하게 회전했다. 중력 투시안의 그리드 위에서, 경비병들의 뼈 구조와 관절의 움직임이 마치 대낮처럼 선명하게 투사되었다. 칼리는 리나와 마리아를 자신의 등 뒤로 끌어당기며, 해리스의 거대한 질량체가 서 있는 좌표를 정확히 록온했다.
“인력의 덫(引力之陷阱).”
칼리가 황동 망원경의 초점을 해리스의 발밑 대리석 바닥에 맞추고 마력을 주입했다.
웅-!
해리스가 서 있던 반경 1미터의 공간 좌표에 초고밀도의 가상 중력장이 형성되었다. 지구에서 통용되던 만유인력의 상수가 비틀리며, 수직 하향 인력이 순간적으로 5배로 폭증했다.
“어…… 억?! 몸이……!”
해리스가 비명을 질렀다. 그의 체중 100킬로그램과 중갑 40킬로그램, 총 140킬로그램의 질량에 5배의 중력이 가해지는 순간, 그의 육체는 무려 700킬로그램에 달하는 초고중력의 짓눌림을 받았다.
대리석 바닥이 콰드득 소리를 내며 미세하게 균열이 갔고, 해리스의 무릎 관절이 중갑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기괴한 소리를 내며 꺾였다.
쾅!
해리스가 대리석 바닥에 처참하게 무릎을 꿇으며 신음을 흘렸다. 그의 거구는 바닥에 자석처럼 달라붙어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대장님! 무슨 일이십니까?!”
어둠 속에서 해리스의 비명을 들은 부하 두 명이 그를 부축하기 위해 다가오다, 해리스의 발밑에 형성된 중력 왜곡 지대에 발을 들였다.
“윽!”
“몸이 무거워……!”
두 명의 경비병 역시 갑작스러운 질량 가중을 견디지 못하고 무거운 중갑의 관성에 이끌려 해리스의 위로 도미노처럼 쓰러졌다. 쇠와 쇠가 부딪히는 요란한 굉음이 지하 기도실을 가득 채웠다.
피융! 피융!
그 혼란을 틈타 마크의 특제 야간 석궁이 불을 뿜었다. 칼리가 중력파 신호로 알려준 좌표를 향해 발사된 볼트들이, 어둠 속에서 갈팡질팡하던 경비병들의 무릎 관절과 갑옷 틈새를 정확히 꿰뚫었다.
“크아악!”
“보이지 않는다! 이단자의 마법이다!”
경비병들은 서로 엉켜 쓰러지며 완전히 전투 능력을 상실했다. 칼리는 단 한 번의 직접적인 물리적 타격 없이, 오직 저들의 질량과 관성이라는 역학적 약점만을 파고들어 20명의 정예 병력을 무력화시켰다.
칼리는 신속하게 움직여 마리아의 손을 잡았다.
“어머니, 리나. 제 옷자락을 잡으세요. 여기서 나가야 합니다.”
“칼리…… 정말 네가 이 어둠 속에서 우리를 구한 것이냐?”
마리아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지만, 칼리는 대답 대신 그녀의 손을 굳게 쥐어 안심시켰다. 리나는 오빠의 황동 결정화된 차가운 손을 다시 꼭 잡았다. 그 순간, 리나의 손끝에서 은은한 온기가 흘러나와 칼리의 어깨뼈까지 뻗쳐 있던 결정화의 마비를 다시 한 번 뒤로 밀어냈다.
‘리나의 이 마력…… 역시 평범한 것이 아니다.’
칼리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쓰러져 있던 바스케스 신부를 부축해 일으켰다.
“신부님, 가셔야 합니다.”
“콜록…… 고맙네, 칼리. 지하 제단 뒤편에 성당 외곽 하수도로 통하는 비밀 통로가 있네. 어서 그곳으로 가세.”
바스케스 신부가 피 묻은 손으로 제단 옆의 사자 머리 조각을 잡아당기자, 묵직한 석조 벽면이 삐걱거리며 열리고 어두운 지하 통로가 모습을 드러냈다. 칼리 일행은 신속하게 통로 안으로 몸을 던졌다.
그러나 그들이 통로 내부로 완전히 진입하여 석문을 닫으려던 찰나.
우웅-!
성당 외곽 지상에 설치되어 있던 교단의 초거대 에테르 탐지 마법진이 맹렬하게 반응하기 시작했다. 리나가 오빠의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무의식중에 방출한 은빛 성광 마력이, 성당 지하의 두꺼운 석벽을 뚫고 지상의 탐지 센서에 포착된 것이다.
지상에서부터 고주파의 마력 진동이 벽을 타고 내려왔다.
성당 외곽 하늘을 향해 거대한 붉은색 경보 빛이 기둥처럼 사방으로 뿜어지기 시작했다. 오크헤이븐 포구 전체를 깨우는 교단의 비상 사이렌 소리가 밤공기를 찢어발기며 울려 퍼졌다.
위이이이이이잉-!
“경보를 울려라! 성당 지하에서 강력한 이단 마력 파동이 감지되었다!”
“포구의 모든 경비병들은 성당 외곽을 봉쇄하라! 쥐새끼 한 마리도 빠져나가지 못하게 해라!”
지상에서 들려오는 수백 명의 경비병들의 고함과 군화 소리가 지하 통로의 천장을 흔들었다. 붉은색 경보 빛의 잔영이 닫히기 직전의 비밀 석문 틈새로 피비린내 나게 스며들며, 탈출하려는 칼리 일행의 등 뒤에 무거운 그림자를 드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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