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소호흡기의 도발
신소희가 눈물을 흘리며 은수의 락커룸 틈새로 USB를 거칠게 투척했다. 툭, 하고 철제 사물함 바닥에 떨어지는 금속성 소리가 복도의 정적 속에 무겁게 울려 퍼졌다.
은수는 사물함 문을 닫고 바닥에 떨어진 은색 USB를 천천히 집어 들었다. 차갑고 묵직한 금속의 촉감이 손가락 끝을 타고 온몸으로 스며들었다. 박한별이 동생 하태수를 짓밟으라고 신소희에게 직접 지시했던 단톡방 원본 백업본. 이것만 있으면 박한별의 가식적인 가면을 전교생 앞에서 완전히 찢어발길 수 있었다.
하지만 승리감에 도취할 시간은 없었다. 은수의 교복 재킷 위에서 두 번째 단추—초소형 지향성 마이크가 내장된 단추가 미세하게 헐거워져 대롱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신소희와의 대치 과정에서 실밥이 풀린 탓이었다. 은수는 단추를 조심스레 매만지며 복도를 걸었다. 어깨의 타박상 통증이 여전히 욱신거렸지만, 뇌리는 이미 다음 단계를 향해 빠르게 회전하고 있었다.
그때, 주머니 속 스마트폰이 요란하게 진동했다. 발신자 제한 표시. 은수는 직감적인 불안감에 휩싸이며 액정을 밀어 전화를 받았다. 스피커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는 소름 끼치도록 맑고 부드러웠다.
“안녕, 은수야? 전학 첫날부터 아주 대단한 짓을 하고 다니더라.”
박한별이었다. 가식적인 웃음기가 걷힌, 지극히 차갑고 오만한 목소리. 은수는 걸음을 멈추고 복도 구석의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겼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 한별아.”
“시치미 떼지 마. 신소희 그 멍청한 년이 누구 머리에서 나온 대자보 때문에 저렇게 발작을 하겠어? 전학생, 네가 소희한테 무슨 바람을 불어넣었는지 모르겠지만…… 게임을 아주 재미있게 하네.”
수화기 너머에서 규칙적인 기계음이 들려왔다. 삐— 삐— 삐—. 심장 박동을 알리는 모니터 음. 그리고 소독약 냄새가 묻어나는 듯한 서늘한 정적. 은수의 심장이 쿵 떨어졌다. 그 소리는 너무나 익숙한, 동생 태수가 누워 있는 병실의 소리였다.
“너 지금 어디야.”
은수의 목소리가 얼음장처럼 굳어졌다.
“어디긴 어디겠어? 네 동생이 참 아주 편안하게 누워 있네. 얼굴이 반쪽이 됐어, 불쌍하게도.”
화면이 영상 통화로 전환되며 병실의 풍경이 비쳤다. 서울성모재활병원 305호. 창백하게 질린 채 인공호흡기에 의지해 숨을 쉬고 있는 태수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 머리맡에, 최고급 명품 백을 든 박한별이 서 있었다. 한별은 가식적인 천사표 미소를 지으며 카메라를 향해 브이를 해 보였다. 하지만 그녀의 다른 한 손은 태수의 목덜미와 인공호흡기 연결 밸브를 아주 가볍게 톡톡 건드리고 있었다.
“간병인 아줌마가 잠깐 자리를 비운 모양이야. 역시 병실 관리가 허술하네. 은수야, 네가 시작한 이 조잡한 연극…… 당장 멈추는 게 좋을 거야. 안 그러면 이 얇은 플라스틱 줄이 아주 실수로, 정말 우연히 빠져버릴지도 모르거든? 툭 하고 말이야.”
한별의 눈빛에 깃든 잔인한 가학성이 액정을 뚫고 은수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동생의 생명줄을 쥐고 흔드는 소시오패스의 도발. 은수의 이성이 순간적으로 툭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오른손 등의 찰과상 흉터가 터질 듯이 욱신거렸다.
“태수한테 손대지 마. 당장 거기서 나와.”
“그럼 얌전히 굴어. 소희가 넘겨준 USB든 뭐든, 전부 가지고 지하실 구석에 처박혀서 평생 숨죽이고 살란 말이야. 알겠어?”
뚝. 전송이 끊어지고 화면이 검게 변했다.
은수는 스마트폰을 꽉 쥔 채 본관 로비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머릿속이 온통 붉은빛 분노로 가득 찼다. 복도를 지나가던 학생들이 깜짝 놀라 은수를 쳐다보았지만, 은수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오직 동생을 지켜야 한다는 본능적인 공포와 가해자를 찢어발기겠다는 광기 어린 증오만이 그녀의 몸을 움직였다.
***
은수는 택시를 타고 병원으로 가는 내내 입술을 깨물었다. 피비린내가 입안을 가득 채웠지만 통증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머릿속에서는 아버지가 남긴 형법전의 글귀들이 어지럽게 뒤섞였다.
‘사적인 보복은 정의가 아니다. 그것은 또 다른 무법의 괴물을 낳을 뿐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아버지의 대쪽 같은 정의감도, 사설 재판소의 제1조 철칙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내 동생의 목숨이 위협받고 있는데, 법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은수의 눈빛은 평소의 이성적인 차분함을 완전히 잃고 광기로 번뜩이고 있었다.
병원 로비에 도착하자마자 은수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지 않고 비상구 계단을 단숨에 뛰어 올라갔다. 3층 복도의 차가운 공기가 폐부를 찔렀다.
305호 앞. 병실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은수는 거칠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이닥쳤다.
스르륵—!
문이 열리자, 소독약 냄새와 함께 하얀 커튼 사이로 빛바랜 햇살이 들이쳤다. 병상 위에는 여전히 산소호흡기를 낀 채 미동도 하지 않는 태수가 누워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박한별이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 손톱을 다듬고 있었다. 한별은 은수의 거친 숨소리를 듣고도 놀라지 않고, 천천히 고개를 돌려 생긋 미소를 지었다.
“어머, 생각보다 빨리 왔네? 역시 동생 일이라면 앞뒤 안 가리고 뛰쳐나오는구나.”
한별은 자리에서 일어나 태수의 인공호흡기 호스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쓸어내렸다.
“은수야, 가까이서 보니까 이 기계 소리 참 신경질적이지 않니? 삐— 삐— 거리는 게, 꼭 언제든 멈출 준비가 된 것처럼 말이야.”
그 손가락이 산소호흡기 밸브의 조절 나사에 닿는 순간, 은수의 내면에서 들끓던 폭력성이 폭발했다. 은수는 이성을 잃고 병상 옆 협탁 위로 달려들었다. 협탁 위에는 은수의 어머니 임선자가 태수에게 깎아주려다 남겨둔 낡은 과도가 놓여 있었다.
은수는 망설임 없이 과도를 쥐었다. 날카로운 쇠붙이의 감촉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비켜.”
은수의 목소리는 짐승의 으르렁거림과 같았다. 그녀는 과도 끝을 박한별의 목덜미를 향해 똑바로 겨누며 한 걸음 다가섰다. 칼끝이 한별의 하얀 피부에서 불과 몇 센티미터 떨어진 곳에서 파르르 떨렸다.
“태수한테서 그 더러운 손 치워. 안 그러면 진짜로 찔러.”
하지만 박한별은 칼끝을 보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입꼬리가 비열하게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한별은 소시오패스 특유의 광기 어린 눈빛으로 은수의 흔들리는 칼날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찔러봐. 어디 한 번 찔러보라고, 하은수.”
한별은 한 걸음 더 앞으로 다가와 자신의 목을 은수의 칼끝에 밀착시켰다. 칼날이 한별의 살갗을 미세하게 누르며 붉은 핏방울이 아주 작게 맺히기 시작했다.
“네가 날 찌르는 순간, 넌 복수자가 아니라 끔찍한 살인미수범이 되는 거야. 전교생이 널 살인자라고 손가락질하겠지. 네 동생 하태수는 평생 살인자 누나를 둔 식물인간으로 비참하게 살다 죽을 거고, 네 엄마 인생도 완전히 끝장날 거야. 자, 어서 찔러봐. 난 잃을 게 없거든?”
박한별은 은수가 분노로 인해 스스로 파멸의 덫에 걸려들기를 바라고 있었다. 은수가 칼을 휘두르는 순간, 가해자와 피해자의 위치는 완벽하게 역전될 터였다. 한별은 그 추악한 승리감을 맛보기 위해 스스로를 미끼로 던지며 사악하게 웃었다.
“으아아아아!”
은수의 머릿속이 붉은 안개로 뒤덮였다. 이 괴물을 죽이고 자신도 지옥으로 가겠다는 극단적인 충동이 온몸의 근육을 지배했다. 칼을 쥔 은수의 손에 힘이 들어가며 한별의 목을 향해 내리꽂히려는 찰나.
쾅—!
병실 문이 거칠게 열리며, 누군가 은수의 팔목을 강하게 낚아챘다.
“은수야, 멈춰!”
익숙하고 단단한 목소리. 담임 한상우 교사였다.
한 교사는 은수의 폭주를 막기 위해 자신의 맨손으로 과도의 날카로운 칼날을 움켜쥐었다. 서슬 퍼런 칼날이 한 교사의 손바닥을 깊게 베고 들어가며, 붉은 피가 은수의 교복 소매와 하얀 병실 바닥 위로 후두둑 떨어졌다.
“선생님……?”
은수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한 교사의 손바닥에서 흘러내리는 뜨거운 피를 보는 순간, 머리를 지배하던 붉은 안개가 순식간에 걷히며 차가운 현실이 돌아왔다. 은수의 손에서 힘이 빠지자, 과도가 바닥으로 쨍그랑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한 교사는 신음 소리조차 내지 않고, 다른 손으로 은수를 자신의 품으로 강하게 끌어안았다. 그의 넓은 어깨가 은수의 떨리는 몸을 완벽히 감싸 안았다. 한 교사는 피가 철철 흐르는 손을 움켜쥔 채, 병상 옆에 서 있는 박한별을 매서운 눈빛으로 쏘아보았다.
“박한별. 당장 이 병실에서 나가라.”
한 교사의 목소리에는 평소의 온화함 대신, 참된 교육자로서의 엄중함과 분노가 서려 있었다.
“내가 이 병실에서 벌어진 네 모든 악행과 협박을 똑똑히 목격했다. 더 이상 내 학생들을 위협한다면, 나 역시 교사로서의 모든 직을 걸고 네 고모와 재단에 맞설 것이다. 경찰에 신고하기 전에 당장 꺼져.”
박한별은 한 교사의 강경한 태도와 피 흘리는 손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는 가식적인 미소를 지우고, 교복 깃을 정리하며 차갑게 돌아섰다.
“선생님도 참…… 눈치가 없으시네요. 알겠어요, 갈게요.”
한별은 병실 문을 나서며 은수를 향해 뱀처럼 서늘한 미소를 남겼다.
“은수야, 다음에는 병실 문을 더 잘 잠그고 다녀야겠어. 다음에 봐.”
쾅. 문이 닫히고 박한별의 발자국 소리가 복도 저편으로 사라졌다.
병실 안에는 심장 모니터의 규칙적인 기계음만이 울려 퍼졌다. 은수는 한 교사의 품에 안긴 채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손끝이 차갑게 식어갔고, 동생을 잃을 뻔했다는 공포와 스스로 괴물이 될 뻔했다는 자책감이 파도처럼 밀려와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한상우 교사는 은수를 더욱 깊이 품에 안으며, 피 묻은 손으로 그녀의 단발머리를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그의 목소리는 한없이 따뜻하고 슬펐다.
“은수야, 네가 저 괴물과 똑같이 손에 피를 묻히면…… 태수가 깨어나서 누구를 보고 웃겠느냐.”
한 교사의 뜨거운 눈물 한 방울이 은수의 교복 어깨 위로 떨어졌다. 아버지가 지키고자 했던 사법 정의의 가치, 그리고 동생 태수의 맑은 미소가 은수의 뇌리 속에 다시금 선명한 이정표로 일어서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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