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왕의 고립
교문 저편에서 등교하는 신소희의 창백한 얼굴이 성난 학생들의 시선과 부딪치는 순간, 여왕의 견고했던 성벽에 거대한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수요일 아침 8시 10분, 서송고등학교 본관 2학년 복도는 평소의 활기찬 소음 대신 무겁고 축축한 침묵으로 가득 차 있었다. 평소라면 신소희의 기세에 눌려 길을 비켜주던 학생들이 이제는 노골적인 멸시와 혐오의 눈빛을 보내며 그녀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신소희의 개인 사물함 전면에는 어젯밤 사설 재판소가 부착한 거대한 검은색 대자보가 굳건히 붙어 있었고, 그 정중앙에는 피처럼 붉은 ‘Private Court’ 낙인 도장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야, 진짜 소름 돋는다. 단톡방 음성 파일 들었어? 전학생 동생 산소호흡기를 뗀다고 협박했다며?”
“평소에도 애들 패고 다니더니 결국 미쳤구나. 저거 완전 범죄자잖아.”
사방에서 비수처럼 꽂히는 속삭임에 신소희는 숨이 막히는 듯 제자리에 멈춰 섰다. 그녀의 눈동자가 극도의 불안감으로 흔들렸다. 사물함에 붙은 대자보를 뜯어내려 손을 뻗었지만, 지은이 밤새 발라둔 초강력 아크릴 접착제는 커터칼로 긁어내지 않는 한 끄떡도 하지 않았다. 뜯어내려 할수록 캔버스 종이만 찢어지며 붉은 낙인 문양은 더욱 흉측하게 일그러질 뿐이었다.
“비켜! 다 꺼지라고!”
신소희가 악에 받쳐 소리를 질렀지만, 아이들은 비웃음 섞인 야유를 보낼 뿐이었다. 한때 서송고의 무소불위 행동대장이었던 그녀가 단 하루아침에 전교생의 공공의 적, 낙인자로 전락한 순간이었다.
그때, 복도 저편에서 단정하고 화려하게 교복을 차려입은 박한별이 강다혜를 대동하고 걸어왔다. 평소와 다름없이 천사 같은 미소를 지으며 걸어오는 한별을 발견하자, 신소희는 구원줄이라도 잡은 듯 군중을 헤치고 달려갔다.
석 척, 척.
“한별아! 박한별! 이거 좀 봐봐, 어떤 쥐새끼들이 나한테 이런 짓을…….”
신소희가 땀에 젖은 손으로 박한별의 교복 소매를 꽉 움켜잡았다. 그러나 한별의 반응은 소희의 기대와 완전히 달랐다. 한별은 전교생의 시선이 자신들에게 쏠려 있음을 의식하자마자, 소희가 만진 소매 자락을 뱀이라도 보듯 혐오스러운 표정으로 거칠게 뿌리쳤다.
“손 치워, 신소희.”
한별의 목소리는 평소의 가식적인 온기가 완전히 거세된, 얼음처럼 차가운 저음이었다.
“한별아? 너 왜 그래? 나 학폭위 열리면 진짜 전학 처분당해! 네 고모님인 이사장님한테 말씀 좀 해줘, 어? 이번 한 번만 덮어달라고…….”
소희가 절박하게 애원하며 다시 손을 뻗으려 하자, 한별의 옆에 서 있던 지능적 책사 강다혜가 소희의 앞을 가로막았다. 다혜의 안경 너머 눈빛 역시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신소희, 정신 차려. 네가 개인적으로 저지른 일탈과 폭언을 왜 한별이한테 엮어? 그 더러운 음성 파일에 한별이 이름이라도 나왔니? 우린 네가 그런 질 나쁜 공갈 협박을 하고 다니는 줄 전혀 몰랐어.”
“뭐……? 다혜 너 지금 뭐라고 했어?”
소희의 입술이 경악으로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다혜 너머에 서 있는 박한별을 똑바로 응시했다. 한별은 거리를 둔 채, 마치 길가에 버려진 오물을 보듯 소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별에게 소희는 이제 자신 명문대 입시와 완벽한 모범생 평판에 치명적인 흠집을 낼 ‘오염 물질’에 불과했다.
“한별아, 네가 나한테 하태수 그 새끼 입단속 시키라고 시켰잖아! 네가 뒤에서 다 봐주겠다고 해놓고 이제 와서 꼬리를 잘라? 어떻게 네가 나한테 이럴 수 있어!”
소희가 폭주하며 악을 쓰자, 복도에 모여 있던 학생들 사이에서 거대한 웅성거림이 일었다. 박한별의 미간이 미세하게 찌푸려졌지만, 그녀는 이내 가식적인 슬픔의 가면을 썼다.
“소희야, 네가 많이 불안해서 헛소리가 나오는 모양인데…… 참 안타깝다. 하지만 난 네 폭력 행위를 옹호해 줄 수 없어. 학교의 규율은 공정하니까.”
박한별은 차갑게 몸을 돌려 교실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 뒤를 강다혜가 은밀한 미소를 지으며 따랐다. 복도 한복판에 홀로 남겨진 신소희는 온몸을 부르르 떨며 주먹을 쥐었다. 자신을 철저히 소모품으로 쓰고 버린 여왕의 잔인한 위선에 심장이 찢겨 나가는 듯한 배신감이 밀려왔다.
그 모습을 복도 구석에서 묵묵히 지켜보던 하은수는 차가운 포커페이스를 유지한 채 주머니 속 스마트폰의 수음 상태를 확인했다. 은수의 교복 재킷 위에서 두 번째 단추—초소형 지향성 마이크가 내장된 단추가 미세하게 헐거워져 대롱거렸지만, 마이크는 소희의 절규와 한별의 싸늘한 방출 선언을 한 자도 놓치지 않고 지하실 마스터 서버로 실시간 송출하고 있었다.
‘첫 번째 균열이 완벽하게 들어맞았어.’
은수는 다친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생각했다. 가해자들의 모래성 같은 연대는 불신이라는 아주 작은 쐐기 하나에 이토록 허무하게 무너져 내린다.
***
1교시가 시작되기도 전에, 신소희는 교무실로 호출되었다.
학생안전부장실의 무거운 침묵 속에서, 체육교사 최정만은 붉게 상기된 얼굴로 침을 튀기며 소희를 압박했다. 최정만의 목에는 항상 걸려 있던 휘슬이 신경질적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신소희! 전교에 퍼진 그 음성 파일이 대체 뭐냐? 학교의 명예를 이따위로 실추시켜? 당장 교육청 감사관실에서 특별 감사가 나오겠다고 난리다!”
“선생님, 그거 박한별이 시켜서 한 일이에요! 저 혼자 한 게 아니라고요!”
소희가 억울함에 눈물을 흘리며 외쳤지만, 최정만은 오히려 책상을 쾅 내려치며 그녀의 입을 강제로 틀어막았다.
“닥쳐! 이사장 조카 이름이 여기서 왜 나와? 정신 못 차려? 너 선에서 다 안고 합의서 써라. 한별이 이름 한 자라도 교육청 보고서에 올라가는 순간, 네 아버지가 하는 하청 사업부터 네 가족 인생까지 진짜로 끝장나는 줄 알아!”
최정만의 비열한 협박은 소희의 숨통을 완벽히 끊어놓았다. 이사장의 사냥개로 불리는 체육교사는 오직 재단의 안위와 자신의 승진만을 위해 소희에게 모든 죄를 뒤집어씌우고 ‘꼬리 자르기’를 강요하고 있었다. 소희는 이 거대한 권력의 장벽 앞에서 자신이 철저히 버려진 고립무원의 처지임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점심시간 직전, 정신적으로 완전히 피폐해진 신소희는 보건실로 도망치듯 들어섰다. 보건 교사가 자리를 비운 조용한 보건실. 소희는 하얀 커튼이 처진 침대에 주저앉아 무릎에 얼굴을 묻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전교생의 멸시, 담임 한상우 교사의 차가운 시선, 그리고 믿었던 박한별과 최정만의 잔인한 배신이 그녀의 영혼을 갈기갈기 찢어놓고 있었다.
스르륵.
하얀 커튼이 조용히 걷히며, 단정한 단발머리에 감정을 읽을 수 없는 건조한 눈빛을 한 하은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은수의 손에는 따뜻한 물이 담긴 종이컵이 들려 있었다.
“너…… 네가 여긴 왜 와? 나 비웃으러 왔냐?”
소희가 충혈된 눈으로 은수를 쏘아보며 날카롭게 경계했다. 하지만 은수는 아무런 대꾸 없이 종이컵을 소희의 옆 테이블에 나직이 내려놓았다.
“비웃을 시간 없어, 신소희. 난 그저 네가 참 어리석다고 생각해서 온 거야.”
은수의 차분하고 나직한 목소리가 보건실의 정적을 깨뜨렸다. 은수는 침대 옆 의자에 조용히 앉아 소희의 흔들리는 생리적 반응—가빠지는 호흡과 미세하게 떨리는 손가락 끝을 거짓말 탐지기처럼 프로파일링하기 시작했다.
“뭐라고? 어리석어?”
“그래. 아직도 눈치채지 못한 게 어리석지. 박한별은 처음부터 널 친구로 생각한 적이 없어. 넌 그저 한별이의 화려한 가면 뒤에서 더러운 일을 대신 처리해 주는 사냥개이자, 일이 터지면 언제든 버릴 수 있는 소모품 방패막이였을 뿐이야.”
은수의 냉혹한 팩트 폭격이 소희의 심장부를 정확히 찔렀다. 소희는 부정하고 싶었지만, 오늘 아침 복도에서 자신을 밀쳐내던 박한별의 차가운 손길이 머릿속에 선명하게 떠올라 입술을 깨물었다.
“시끄러워! 한별이가 그럴 리가 없어…….”
“학폭위가 열리면 넌 8호 처분을 받고 강제 전학을 가게 될 거야. 생기부에는 빨간 줄이 그어지고, 네가 꿈꾸던 대학 입시는 완전히 끝장나겠지. 최정만 교사는 이미 널 독박 씌우기 위해 보고서를 작성 중이야. 반면에 박한별은? 아무런 상처도 없이 깨끗하게 명문대에 진학해서 승승장구하겠지. 억울하지 않아?”
은수의 목소리는 지극히 이성적이었지만, 소희의 내면에 잠재된 배신감과 열등감이라는 불씨에 기름을 붓는 가장 잔인한 가스라이팅 해체 전술이었다.
“억울해…… 억울해서 미칠 것 같아! 왜 나만 죽어야 하는데? 왜 나만!”
소희가 결국 이성을 잃고 울부짖었다. 그녀의 눈에 박한별을 향한 지독한 증오와 광기가 서리기 시작했다. 은수는 그 붕괴의 순간을 차갑게 응시하며, 마지막 결단의 쐐기를 박았다.
“나만 죽을 순 없잖아, 신소희. 한별이를 지옥으로 보낼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무기를 나한테 넘겨. 그러면 최소한 네 억울함은 풀릴 테니까.”
소희는 눈물을 흘리며 은수의 건조하고 깊은 눈빛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은 단순한 동정이 아니었다. 확실한 복수를 집행해 줄 수 있는 어둠의 재판관의 눈빛이었다. 소희는 마른침을 삼키며 은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한편, 교실 구석에서 태블릿 PC를 빠르게 두드리던 강다혜의 안경 너머 눈빛이 기묘하게 번뜩였다.
다혜는 신소희의 몰락 과정을 지켜보며 사설 재판소의 배후에 하은수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품고 있었다. 그녀는 은밀히 인터넷 사설 인맥망과 익명 데이터베이스를 이용해 하은수의 과거 전학 기록과 가족사를 역추적하기 시작했다.
[검색 결과: 하진성 법률사무소 - 10년 전 파산 및 변호사 자살.]
[가족 관계: 모 임선자, 남동생 하태수(서송고 1학년 휴학 중).]
다혜의 입꼬리가 비열하게 올라갔다.
“하은수…… 너였구나. 감히 우리를 겨냥해?”
은수의 아버지가 누명을 쓰고 자살했다는 참혹한 가문의 비극을 손에 넣은 다혜는, 이를 이용해 은수를 사회적으로 완전히 매장할 거대한 사이버 마녀사냥의 덫을 설계하기 시작했다. 가해자 카르텔의 지능적 왼팔다운 냉혹한 역공의 서막이었다.
***
방과 후, 노을이 서송고 교정을 피처럼 붉게 물들이는 저녁 시간.
학생들이 대부분 하교하고 조용해진 교실 복도. 은수는 사물함 정리와 야간 자율학습 준비를 핑계로 자신의 락커룸 앞에 서 있었다. 복도 모퉁이 저편에서 인기척이 들리더니, 후드를 깊게 눌러쓴 신소희가 그림자처럼 다가왔다.
소희의 얼굴은 눈물과 먼지로 얼룩져 있었고, 눈빛은 완전히 초점을 잃은 채 텅 비어 있었다. 그녀는 은수의 락커룸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소희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은수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주머니 속에서 낡은 은색 USB 하나를 꺼내 들었다.
“이거…….”
소희의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박한별 그 가식적인 년이 하태수를 괴롭히라고 나한테 직접 지시했던 단톡방 원본 백업본이야. 사진, 텍스트, 날짜까지 전부 들어있어. 나만 죽을 순 없어. 그 년도 똑같이 지옥으로 보내버려.”
소희는 눈물을 흘리며 은수의 락커룸 틈새로 USB를 거칠게 투척했다. 툭, 하고 철제 사물함 바닥에 떨어지는 금속성 소리가 복도의 정적 속에 무겁게 울려 퍼졌다.
소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복도 저편 어둠 속으로 빠르게 사라졌다. 은수는 사물함 문을 열고 바닥에 떨어진 은색 USB를 천천히 집어 들었다. 차갑고 묵직한 금속의 촉감이 은수의 손끝을 타고 뇌리로 스며들었다.
박한별의 숨통을 완벽히 끊어놓을 사설 재판소의 가장 치명적인 핵심 물증이 마침내 은수의 손안에 들어온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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