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재판소의 낙인
신소희의 내면 깊은 곳에 도사리고 있던 공포와 배신감이 마침내 임계점을 넘어 폭발했다. 그녀의 두 주먹이 터질 듯이 쥐어졌다. 은수의 시야 속에서, 소희의 얼굴은 이미 분노와 광기로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박한별…… 이 기회주의자 같은 년이 감히 날 총대 메게 해?”
소희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은수의 책상을 한 번 더 내리찼다. 쾅, 하는 날카로운 마찰음이 텅 빈 교실에 무겁게 울려 퍼졌다. 소희는 더 이상 은수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마치 미친 사람처럼 중얼거리며 교실 뒷문을 박차고 나갔다. 복도를 가로질러 박한별이 있는 학원가나 이사장실 방향으로 달려가는 그녀의 발소리가 멀어질 때까지, 은수는 미동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교실에 다시 고요가 찾아왔을 때, 은수는 천천히 고개를 내려 자신의 교복 재킷을 바라보았다. 위에서 두 번째 단추. 신소희가 멱살을 잡고 흔들었던 탓에 단추를 지탱하던 실이 미세하게 풀려 헐거워진 상태였다. 은수는 손가락 끝으로 그 단추를 가만히 만져보았다. 임도윤이 심혈을 기울여 개조한 초소형 무선 지향성 마이크가 내장된 단추였다.
‘조금만 더 거칠었으면 단추가 떨어져 나갔겠어.’
은수는 차가운 눈빛을 유지한 채 백팩을 메고 교실을 나섰다. 어깨와 등 뒤로 화장실 벽에 부딪혔던 타박상의 통증이 욱신거리며 올라왔지만, 은수의 머릿속은 이미 다음 단계의 실행 계획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녀는 아버지가 남겨두었던 법정 심리학 서적의 한 구절을 떠올렸다.
‘가장 견고해 보이는 동맹일수록 불신이라는 아주 작은 균열 하나에 한순간에 모래성처럼 붕괴한다.’
은수는 발걸음을 빠르게 옮겨 구 체육관으로 향했다.
***
수십 년 동안 방치되어 먼지와 어둠만이 가득한 구 체육관 지하실 폐창고. 무거운 캐비닛을 밀어내고 녹슨 철문을 열어젖히자, 차갑고 축축한 지하 방공호의 공기가 은수의 뺨을 스쳤다. 지하실 내부로 들어서자 웅웅거리는 컴퓨터 팬 소음과 함께 서너 개의 모니터가 청색광을 뿜어내고 있었다.
“도윤아, 수음 상태는?”
은수가 손전등을 끄며 묻자, 헤드폰을 쓰고 키보드를 두드리던 임도윤이 의자를 돌려 은수를 바라보았다. 그의 짙은 다크서클 아래로 흥분 어린 눈빛이 빛나고 있었다.
“완벽해, 은수 누나. 신소희 목소리 주파수가 워낙 하이톤이라 잡음 필터링하기도 쉬웠어. 화장실에서 멱살 잡고 협박한 부분부터 교실에서 50만 원 요구한 부분까지 1초의 오차도 없이 깨끗하게 따냈어.”
도윤은 마우스 클릭 몇 번으로 오디오 편집 파형을 보여주었다. 스피커를 통해 신소희의 포악한 육성이 흘러나왔다.
[오늘 야자 직후다, 전학생. 구 체육관 뒤편 공터로 50만 원 안 가져오면 네 동생 산소호흡기 진짜로 떼버릴 줄 알아.]
지하실 구석에서 팔짱을 낀 채 서 있던 김우진이 그 목소리를 듣자마자 주먹을 꽉 쥐었다. 그의 눈에 들끓는 증오가 스쳤지만, 은수의 단호한 시선과 마주치자 이내 숨을 가다듬었다.
“우진아, 준비는 됐어?”
“네, 재판장님. 지은이와 함께 야간 순찰 동선은 이미 초 단위로 확인해 뒀습니다.”
우진의 옆에는 소심한 표정으로 서 있던 미술부 에이스 최지은이 커다란 캔버스 가방을 꼭 쥔 채 고개를 끄덕였다. 지은의 가방 안에는 오늘 밤 교내에 살포할 대자보와 특수 아크릴 접착제가 들어 있었다.
“좋아. 사설 재판소의 첫 번째 기소이자 심판을 개시한다.”
은수는 테이블 위에 놓인 무겁고 차가운 주물 석제 인장을 집어 들었다. 사설 재판소의 공식 상징인 ‘Private Court’ 문양이 정교하게 각인된 붉은 도장이었다. 은수는 붉은색 유성 인크를 도장에 묻힌 뒤, 지은이 완성해 온 대자보 전면에 쾅, 하고 낙인을 찍었다. 선명하고 붉은 낙인이 대자보의 검은 바탕 위에서 피처럼 붉게 타올랐다.
“도윤이는 자정이 되는 순간 해외 VPN 프록시 서버를 통해 전교생의 익명 단톡방과 커뮤니티에 신소희의 자백 음성 링크를 살포해. 그리고 우진이와 지은이는 야간 경비원의 눈을 피해 2학년 복도 전체에 이 대자보를 부착한다.”
은수의 목소리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학교가 덮으려 했던 진실을, 학생들이 직접 듣고 보게 만드는 거야. 법이 침묵한다면, 여론의 힘으로 그들의 가면을 찢어발기겠어.”
***
새벽 1시 20분, 서송고등학교 교정은 유령선처럼 적막했다.
본관 2층 복도. 초록색 비상구 안내등만이 차가운 대리석 바닥 위로 음산한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리고 있었다. 어두운 남색 후드티를 머리 끝까지 뒤집어쓴 김우진과 최지은이 고양이처럼 소리 없이 복도 모퉁이를 돌았다.
지은은 극도의 긴장감으로 손가락이 가볍게 떨렸지만, 은수가 지시한 대로 신속하게 움직였다. 그녀는 가방에서 특수 코팅된 캔버스 대자보를 꺼내 들었다. 대자보에는 신소희가 저지른 학폭 가해 사실과 오늘 낮에 저지른 공갈 협박 내역이 시각적으로 가장 충격적인 레이아웃으로 디자인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정중앙에는 사설 재판소의 붉은 낙인 도장이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었다.
“지은아, 서둘러. 경비원 박 영감님이 본관 1층에서 올라오기까지 딱 4분 남았어.”
우진이 복도 끝 계단 쪽을 주시하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지은은 입술을 깨물며 대자보 뒷면에 초강력 산업용 아크릴 본드를 붓으로 빠르게 펴 발랐다. 일반 풀이나 테이프와 달리, 이 본드는 한 번 굳으면 커터칼로 긁어내지 않는 한 벽면이나 사물함에서 절대로 떨어지지 않는 특수 접착제였다. 학교 행정실이 아침에 발견하더라도 즉시 떼어내지 못하게 하려는 은수의 치밀한 지략이었다.
철컥, 척.
지은이 2학년 3반 교실 앞 게시판과 신소희의 개인 사물함 전면에 대자보를 단단히 밀착시켜 부착했다. 차가운 복도 공기 속에서 아크릴 본드의 알싸한 화학 약품 냄새가 번졌다. 밤샘 작업과 극심한 추위 탓에 지은의 손가락 끝은 이미 감각이 없을 정도로 굳어 가고 있었다.
그때였다.
벅, 벅, 벅…….
복도 저편 계단실 아래쪽에서 무겁고 느린 발소리가 들려왔다. 야간 경비원 박 영감의 발소리였다. 손전등의 백색 광선이 복도 벽면을 쓸어내리며 서서히 올라오고 있었다.
“누구야? 거기 누구 있나?”
늙은 경비원의 목소리가 복도의 정적을 깨뜨렸다. 손전등 불빛이 우진과 지은이 서 있는 2학년 3반 복도 모퉁이 바로 앞까지 뻗어 나왔다. 지은은 공포로 숨이 멎을 것 같아 본드를 쥔 채 자리에 굳어버렸다.
우진은 찰나의 순간 냉정함을 유지했다. 그는 바닥에 흐트러진 소형 아크릴 본드 통을 지은의 가방 안으로 신속히 밀어 넣은 뒤, 주머니 속에서 미리 준비해 둔 소형 돌멩이를 꺼냈다.
우진은 팔을 뻗어 반대편 과학실 복도 저 멀리를 향해 돌멩이를 강하게 던졌다.
깡그랑!
돌멩이가 먼지 쌓인 구형 캐비닛에 부딪히며 날카롭고 요란한 쇳소리를 냈다.
“어라? 저쪽인가?”
발소리와 함께 손전등 불빛이 즉각 과학실 방향으로 돌아섰다. 박 영감이 기침을 콜록이며 반대편 복도로 빠르게 걸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지금이야. 뛰어.”
우진은 지은의 손목을 잡고 소리 없이 복도를 질주해 구관과 연결된 비밀 탈출로 통로 안쪽으로 몸을 숨겼다. 두 사람의 심장 박동 소리가 어두운 통로 안에서 미친 듯이 요동쳤다.
***
같은 시각, 구 체육관 지하실 아지트.
도윤은 컴퓨터 모니터 앞에서 해킹 단말기의 엔터 키를 강하게 눌렀다.
[DATA TRANSMISSION COMPLETED: 100%]
“보냈다, 누나.”
도윤이 헤드폰을 벗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해외 가상 사설망(VPN)과 프록시 서버를 5중으로 경유한 암호화 자백 음성 파일 링크가 서송고 2학년 전체 단톡방과 익명 커뮤니티 게시판에 일제히 투하된 순간이었다.
지하 통로를 통해 무사히 아지트로 귀환한 우진과 지은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은수의 앞에 섰다. 지은의 손가락 끝은 추위와 긴장으로 붉게 부어올라 있었고, 우진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은수는 아무 말 없이 수건을 가져와 지은의 차가운 손을 감싸 쥐며 따뜻하게 녹여주었다.
“고생했어, 얘들아. 너희가 진실의 통로를 열어준 거야.”
은수는 테이블 위의 붉은 석제 인장을 조심스럽게 마른 천으로 닦아낸 뒤, 벨벳이 깔린 낡은 나무 상자 안에 밀봉했다. 딸깍, 하고 상자가 닫히는 소리가 지하실에 엄숙하게 울렸다.
“이제 주사위는 던져졌어. 내일 아침, 서송고의 위선적인 평화는 끝날 거야.”
은수의 차가운 눈빛이 모니터 화면 속에서 붉게 타오르는 사설 재판소의 낙인 마크를 응시하고 있었다.
***
다음 날 아침, 등교 시간.
서송고등학교 정문을 통과해 본관 복도로 들어서는 학생들의 분위기가 평소와 완전히 달랐다. 평소라면 등교하기 바빴던 아이들이 스마트폰 화면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야, 너 이거 들었어? 대박이다 진짜……”
“이 목소리 신소희 맞지? 전학생 동생 산소호흡기를 뗀다고?”
“미친 거 아냐? 진짜 악마새끼네……”
학생들의 수군거림은 2학년 복도에 들어서는 순간 거대한 충격과 분노의 함성으로 변했다.
2학년 3반 앞 복도 게시판과 신소희의 개인 사물함 전면에 부착된 거대한 검은색 대자보 주변으로 수십 명의 학생들이 빽빽하게 몰려들어 포위망을 형성하고 있었다. 대자보 정중앙에는 마치 피로 찍어 누른 듯한 선명하고 거대한 붉은색 사설 재판소의 낙인 도장이 찍혀 있었고, 그 밑에는 신소희의 공갈 협박 전문이 붉은 글씨로 인쇄되어 있었다.
등교하던 학생들이 사물함에 붙은 붉은 낙인의 경고장을 보고 일제히 웅성거리며 분노의 여론이 들끓기 시작했다. 저마다 스마트폰을 들어 대자보를 촬영하고 자백 음성 링크를 공유하는 아이들의 눈빛에는 그동안 학교가 강요했던 침묵을 깨부수는 분노의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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