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의 빗장
신관 2층 화장실의 타일 바닥은 유난히 차갑고 축축했다. 환풍기가 돌아가는 둔탁한 기계음 사이로, 은수를 밀치는 신소희의 거친 숨소리가 섞여 들었다.
“야, 전학생. 귀가 먹었냐? 대가리 박고 반성하라고 했잖아.”
소희가 은수의 어깨를 다시 한번 강하게 밀쳤다. 은수의 등 뒤로 콘크리트 벽면이 닿으며 가벼운 충격이 전해졌다. 어깨가 뻐근하게 아려왔지만, 은수의 얼굴에는 한 치의 동요도 일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소희의 흔들리는 눈동자와 목덜미의 붉은 핏대를 차분히 응시할 뿐이었다.
‘맥박 분당 110회 이상. 흥분 상태. 전형적인 완력 위주의 가해 행동.’
은수는 머릿속으로 차분히 소희의 심리 상태를 프로파일링했다. 주머니 속 스마트폰에서는 이미 도윤과 연결된 무음 녹음 앱이 돌아가고 있었다. 교복 깃 안쪽에 숨겨둔 초소형 마이크가 소희의 포악한 목소리를 고스란히 수음하는 중이었다.
“내가 왜 반성해야 하는데?”
은수가 일부러 목소리를 가볍게 떨며 물었다. 유약해 보이는 전학생의 태도에 소희의 입꼬리가 비열하게 올라갔다.
“하, 이 기지배 보게? 서송고가 어떤 곳인지 감이 안 오지? 너 같은 흙수저 년이 한별이 눈에 거슬린 것 자체가 죄야. 이번 주 안으로 내 사물함에 성의 표시해라. 안 그러면 네 남동생이 누워 있는 병실 산소호흡기 줄이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동생 태수의 이름이 언급되는 순간, 은수의 눈빛이 찰나의 순간 칼날처럼 날카로워졌다. 가슴 깊은 곳에서 들끓는 살의가 치밀어 올랐지만, 은수는 허벅지를 꼬집으며 본능적인 분노를 억눌렀다. 사적인 폭력은 가해자와 자신을 같은 괴물로 만들 뿐이다. 오직 차가운 법과 완벽한 증거만이 저들을 파멸시킬 수 있다. 은수는 그것을 뼈에 새기고 있었다.
“알았어... 한별이한테는 비밀로 해줘.”
은수가 고개를 숙이며 겁먹은 표정을 지어 보이자, 소희는 만족스러운 듯 혀를 차며 은수의 뺨을 툭툭 쳤다.
“진작 그럴 것이지. 오늘 야간 자율학습 끝나고 구 체육관 뒤로 와라. 허튼짓 하면 죽는다.”
소희와 그녀의 패거리들이 낄낄거리며 화장실을 빠져나갔다. 홀로 남겨진 은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빛은 이미 얼음처럼 차갑게 식어 있었다. 주머니 속 스마트폰을 꺼내 녹음을 중지하자, 도윤으로부터 ‘녹음 파일 무결성 검증 완료. 음질 상태 최상’이라는 짧은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첫 번째 덫의 미끼가 완성된 순간이었다.
***
방과 후, 은수에게 내려진 처분은 예상대로 흘러갔다. 체육교사이자 학생안전부장인 최정만은 은수를 교무실로 불러 굳은 얼굴로 으름장을 놓았다.
“하은수, 전학 첫날부터 신소희랑 소란을 피웠다며? 서송고는 품행이 단정하지 못한 학생을 용납하지 않는다. 전학생 길들이기라 생각하고 오늘부터 일주일간 구 체육관 청소를 전담해라.”
박한별의 고모인 박혜란 회장의 지시를 받는 최정만다운 비겁한 처사였다. 신소희의 일방적인 폭력을 ‘쌍방 소란’으로 뭉개며 은수에게 벌을 내린 것이다. 하지만 은수는 반발하는 대신 묵묵히 고개를 숙였다. 구 체육관은 은수가 그토록 찾고자 했던, 학교 내부의 완벽한 감시 사각지대였기 때문이다.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가는 저녁 시간, 은수는 홀로 낡은 빗자루를 들고 구 체육관으로 향했다.
신축된 신관 체육관과 달리, 수년간 방치된 구 체육관은 먼지와 어둠으로 가득 차 있었다. 천장 높은 곳에서 들이치는 붉은 노을빛이 낡은 농구 코트 바닥을 쓸쓸하게 비추고 있었다. 삐걱거리는 마루바닥 소리만이 음산하게 울려 퍼졌다.
은수는 빗자루를 쥐고 코트 구석, 먼지가 뽀얗게 쌓인 낡은 뜀틀과 매트 더미 뒤편을 청소하기 시작했다. 거대한 먼지 폭풍 속에서 빗자루 끝이 무언가 단단한 것에 걸렸다.
탁.
바닥을 쓸어내자, 낡은 마루 틈새에 끼어 있던 묵직한 철제 열쇠가 모습을 드러냈다. 일제강점기 시절 만들어진 듯한 투박하고 녹슨 주물 열쇠였다. 은수가 흙먼지를 털어내며 열쇠를 들어 올리는 순간, 등 뒤에서 나직한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콜록, 콜록... 거기서 뭘 하고 있나, 전학생.”
은수는 깜짝 놀라며 열쇠를 손아귀에 움켜쥐고 뒤를 돌아보았다. 먼지 서린 노을빛 속에서 낡은 경비 모자를 쓴 노인이 서 있었다. 구관 매점 관리인이자 은퇴를 앞둔 노씨였다.
노씨는 은수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그녀의 낡은 백팩에 매달려 있는 은색 프레임의 형법전 펜던트로 시선을 옮겼다. 노인의 탁한 안광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 펜던트... 하진성 변호사의 물건이 맞군.”
노씨의 나직한 한마디에 은수의 숨결이 멎었다. 은수는 경계 어린 눈빛으로 노씨를 응시했다.
“...저를 아시나요?”
“하 변호사는 과거 서송학원의 비리를 파헤치다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가셨지. 대쪽 같은 양반이었어.”
노씨는 깊은 한숨을 쉬며 은수의 굳은 손끝을 바라보았다. 은수의 눈빛에 서린 깊은 한(恨)과 복수심을 노인은 단번에 읽어내고 있었다.
“그 손에 쥔 열쇠... 지하실 캐비닛 뒤편에 숨겨진 무거운 철문을 여는 열쇠다. 일제강점기 시절 방공호로 쓰이던 지하 폐창고지. 학교의 어떤 감시 카메라도, 장필두 보안관의 눈길도 닿지 않는 완벽한 어둠의 공간이다.”
노씨는 빗자루를 돌려 잡으며 무심한 듯 덧붙였다.
“장필두 그 작자는 최정만에게 돈을 받고 밤마다 구관 주변을 순찰하지. 서치라이트의 회전 주기는 정확히 45초다. 그 사각지대를 뚫어야 지하실에 닿을 수 있을 게야. 내 눈은 이미 멀었으니, 오늘 밤 일은 보지 못한 것으로 하마.”
노씨는 은수에게 조용한 묵인의 미소를 지어 보인 뒤, 굽은 허리를 이끌고 어둠 속으로 천천히 사라졌다. 은수는 손바닥을 파고드는 차가운 철제 열쇠의 감각을 느끼며, 마침내 사설 재판소의 심장부가 될 공간의 빗장을 쥐었음을 확신했다.
***
밤 11시. 학교 전체가 깊은 침묵에 잠긴 시간.
은수는 검은색 후드티를 깊숙이 눌러쓰고 구 체육관 뒤편 야산 대나무 숲길을 통해 은밀히 접근했다. 밤바람이 대나무 잎을 스치며 스산한 소리를 냈다. 머릿속에서 극심한 긴장감으로 인한 이정표 없는 두통이 밀려왔지만, 은수는 차분히 호흡을 고르며 스마트폰의 타이머를 켰다.
‘장필두의 순찰 주기 45초. 서치라이트가 구관 동쪽 벽면을 비추고 돌아가는 순간이 타이밍이다.’
저 멀리서 서송고의 수석 보안관 장필두가 손에 든 강력한 서치라이트의 백색광이 구관 벽면을 쓸고 지나갔다. 눈이 부실 정도로 강렬한 빛이 어둠을 가르고 사라지는 순간, 타이머의 숫자가 작동하기 시작했다.
45.
은수는 몸을 날려 구관 뒤편 폐자재 적치장으로 달렸다. 소리 없는 잠입을 위해 맨손으로 거친 시멘트 벽면과 낡은 배수관을 타야 했다.
아차 하는 순간, 배수관 옆에 튀어나온 녹슨 철사 끝이 은수의 손등을 길게 긁고 지나갔다.
읏.
은수는 비명을 삼켰다. 차가운 밤공기 속에서 손등을 타고 뜨거운 핏방울이 흘러내렸다. 극심한 통증이 신경을 자극했지만, 은수는 멈추지 않았다.
30.
장필두의 거친 군화 소리가 구관 모퉁이 너머에서 들려왔다.
“어이, 장 반장! 교무실 퇴근 동태가 이상한데, 순찰 대충 돌고 경비실에서 컵라면이나 하나 때리지?”
그때, 구관 매점 뒤편에서 노씨의 쉰 목소리가 들려왔다. 노씨가 경비실에 들러 교사들의 야간 퇴근 동태를 흘리며 장필두의 발걸음을 의도적으로 지연시킨 것이다.
“아, 노 영감님. 귀찮게 왜 또 돌아다니십니까? 알겠습니다, 금방 가죠.”
장필두가 투덜거리며 발걸음을 돌리는 소리가 들렸다. 노씨의 묵인과 교란 덕분에 은수에게 결정적인 15초의 시간이 더 확보되었다.
15.
은수는 붉은 피가 흐르는 손으로 구 체육관 지하 폐창고 입구의 문틀 뒤편으로 슬라이딩하듯 몸을 숨겼다. 장필두의 서치라이트 불빛이 그녀가 방금 서 있던 자리를 차갑게 훑고 지나갔다. 호흡이 턱끝까지 차올랐지만, 은수는 입을 틀어막고 소리를 죽였다.
빛이 완전히 멀어지자, 은수는 지하 폐창고 안쪽의 무거운 먼지 쌓인 사물함 뒤편으로 기어 들어갔다. 사물함의 틈새를 밀어내자, 노씨가 말한 녹슨 철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은수는 떨리는 손으로 손등의 피를 옷자락에 훔쳐낸 뒤, 주머니에서 구형 철제 열쇠를 꺼냈다. 열쇠 구멍에 녹슨 열쇠를 꽂아 넣자, 뻑뻑한 쇳소리와 함께 열쇠가 반시계 방향으로 두 번 돌아갔다.
철컥.
무거운 철문이 소리 없이 열리며, 일제강점기 시절 방공호와 연결된 거대한 어둠의 공간이 드러났다. 지하 깊은 곳에서 불어오는 서늘하고 축축한 바람이 은수의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식혔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먼지 쌓인 콘크리트 벽면과 끝을 알 수 없는 지하 통로의 실루엣이 손전등 불빛 아래 서서히 정체를 드러냈다.
사설 재판소의 본부이자, 가해자들을 사회적으로 매장할 어둠의 법정이 마침내 빗장을 열어젖힌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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