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면을 쓴 교실
대한민국에서 가장 화려한 기득권의 요새, 명문 사립 서송고등학교의 정문은 거대한 성벽처럼 서 있었다. 봄기운이 완연한 날씨였지만, 교문 너머로 보이는 대리석 건물들은 이상하리만치 차갑고 위압적이었다.
하은수는 단정하게 단추를 채운 교복 차림으로 언덕길을 올랐다. 귀밑으로 가볍게 내려오는 단발머리가 봄바람에 흔들렸다. 은수의 무표정한 얼굴과 감정을 읽을 수 없는 건조하고 깊은 눈빛은 등교하는 다른 학생들의 활기찬 모습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었다.
어깨에 멘 낡은 백팩의 지퍼에는 작은 은색 프레임에 끼워진 가죽 펜던트가 매달려 있었다. 아버지가 생전에 가장 아끼던 형법전의 표지를 본떠 만든 작은 기념품이었다. 그것은 은수가 이 위선적인 성벽 안으로 걸어 들어온 진짜 이유이자, 스스로를 묶어둔 단 하나의 빗장이었다.
구 체육관 건물 옆을 지나갈 때였다. 신축된 화려한 본관과 달리, 붉은 벽돌이 바래고 담쟁이덩굴이 뒤덮인 구관은 버려진 섬처럼 고요했다. 그 앞 마당에서 낡은 빗자루로 낙엽을 쓸고 있던 백발의 노인이 은수의 발걸음 소리에 움직임을 멈췄다.
구관 매점의 은퇴한 관리인, 노씨였다.
노씨의 깊게 패인 눈 주름 사이로 탁하지만 날카로운 안광이 스쳤다. 그의 시선이 은수의 가방에 매달린 작은 법학 서적 모양의 펜던트에 머물렀다. 노씨는 빗자루를 쥔 채 은수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은수는 말없이 고개를 숙여 가볍게 목례를 하고는 걸음을 재촉했다. 노씨의 입술이 무언가 말하려는 듯 미세하게 들썩였으나, 이내 깊은 한숨과 함께 다시 낙엽을 쓰는 소리만이 구관 마당을 채웠다.
***
“오늘 우리 반에 전학 온 하은수다. 다들 친하게 지내도록.”
담임 교사이자 국어 담당인 한상우 교사의 차분한 목소리가 서송고등학교 2학년 3반 교실에 울려 퍼졌다. 한 교사의 눈빛에는 새로 온 전학생을 향한 미세한 우려와 걱정이 서려 있었다.
은수는 교단에 서서 교실을 천천히 내려다보았다.
창가 뒤편, 가장 햇살이 잘 드는 자리에 그녀가 앉아 있었다.
박한별.
서송학원 재단 이사의 조카이자, SNS에서 수만 명의 팔로워를 거느린 서송고의 실질적인 여왕. 단정하고 화려하게 커스텀한 교복을 입은 그녀는 천사처럼 무해하고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은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은수는 그 미소 밑에 숨겨진 잔인함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식물인간 상태로 병상에 누워 초점 없는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던 남동생, 하태수의 일그러진 얼굴이 한별의 얼굴 위로 겹쳐 보였다.
한별의 옆자리에는 화장기가 진하고 교복 치마를 짧게 줄인 신소희가 껌을 씹으며 짝다리를 짚고 있었다. 그녀의 눈빛은 사냥감을 찾는 늑대처럼 포악했다.
맨 앞줄에서는 전교 1등에 집착하는 서지혜가 문제집을 풀던 샤프를 멈추고 은수의 전학 서류를 매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새로운 경쟁자의 등장이 극도로 불쾌하다는 노골적인 적대감이었다.
“은수는 저기 아름이 옆자리에 앉으렴.”
한 교사의 지시에 은수는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은수의 짝꿍이 된 정아름은 움츠러든 어깨를 더 웅크리며 책상 깊숙이 고개를 묻었다. 박한별 패거리의 눈치를 보느라 전학생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으려는 소심한 방관자의 전형적인 태도였다.
가방을 내려놓으며 은수는 교복 주머니 속 스마트폰의 측면 버튼을 자연스럽게 세 번 눌렀다. 화면은 켜지지 않았지만, 도윤과 약속한 무음 녹음 기능이 가동되며 교실 안의 모든 주파수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
1교시가 끝나는 종소리가 울리기 무섭게, 교실 안의 공기가 미묘하게 요동쳤다.
“안녕, 은수야? 전학 오느라 힘들었지?”
가식적인 온기가 가득한 목소리와 함께 박한별이 은수의 책상 앞으로 다가왔다. 그녀의 손에는 최고급 수입 핸드크림이 쥐어져 있었다. 주변의 다른 학생들이 자연스럽게 한별의 뒤편으로 모여들며 보이지 않는 계급의 벽을 형성했다.
“응... 조금.”
은수는 일부러 어깨를 웅크리고 목소리를 가볍게 떨며 소심한 모범생의 가면을 깊숙이 눌러썼다. 시선은 한별의 화려한 구두 끝에 고정했다.
“이거 새로 나온 건데 한번 발라봐. 향 되게 좋아.”
한별이 은수의 손등에 핸드크림을 부드럽게 짜주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근데 안산에서 전학 왔다고 들었는데, 갑자기 이 학군으로 이사 온 이유가 있어? 서송고는 내신 따기 진짜 힘들 텐데.”
친절을 가장한 날카로운 탐색전이었다. 은수의 가정 환경과 배경을 파악해 서열의 어느 칸에 배치할지 결정하려는 여왕의 영악한 질문.
은수는 손등에 묻은 크림을 조심스럽게 문지르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버지가... 얼마 전에 사고로 돌아가셔서. 남동생도 많이 아파서 여기 병원 근처로 이사 오게 됐어. 내신은 그냥... 열심히 해보려고.”
은수의 대답이 끝나자, 한별의 미세한 눈꼬리가 아주 잠깐 만족스럽게 휘어졌다. 부모의 배경도 없고, 아픈 동생의 짐까지 짊어진 흙수저 전학생. 자신들의 권력에 절대 도전할 수 없는 가장 안전하고 만만한 먹잇감이라는 판단이 끝난 표정이었다.
“아, 그렇구나. 힘들었겠네.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나한테 말해. 내가 반장이니까.”
한별은 가식적인 위로를 건네며 동정어린 시선으로 은수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주변 아이들도 한별의 태도에 맞춰 안도 섞인 비웃음을 흘리며 흩어졌다.
그들이 돌아서서 낄낄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은수는 가슴속 깊은 곳에서 솟구치는 뜨거운 분노를 차갑게 억눌렀다. 동생 태수를 사지로 몰고 간 가해자들이 이토록 평화롭고 화려한 일상을 누리고 있다는 사실에 심장이 터질 것처럼 요동쳤다. 머릿속에서 이정표 없는 두통이 밀려왔지만, 은수는 허벅지를 강하게 움켜쥐며 감정을 통제했다.
‘아직은 아니야. 더 깊은 곳까지 파악해야 해.’
은수는 조용히 고개를 돌려 옆자리의 정아름을 바라보았다. 아름의 교과서 모퉁이가 불안감으로 인해 심하게 구겨져 있었다.
“저기, 아름아. 혹시 다음 교시 인쇄물 어디서 받는지 알아?”
은수가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하지만 아름은 마치 무서운 전염병 환자를 대하듯 움찔하며 책상을 뒤로 밀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창가 쪽 박한별 패거리를 향해 극도로 불안하게 흔들렸다.
“나, 나 잘 몰라... 저기 다른 애한테 물어봐.”
아름은 황급히 교과서를 덮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교실 밖으로 도망치듯 빠져나갔다. 가해자들의 눈 밖에 나지 않기 위해 전학생을 철저히 고립시키려는 방관자들의 무언의 규칙이 작동하고 있었다.
***
점심시간 직전, 교실 안의 소음이 극에 달했을 때였다.
육중한 그림자가 은수의 책상 위를 덮쳤다.
의자가 거칠게 긁히는 소리와 함께, 신소희가 은수의 책상 모퉁이를 은밀하면서도 위협적으로 툭 찼다. 그녀의 손가락 끝에는 징이 박힌 가죽 지갑이 들려 있었다.
교실 안의 시끄럽던 대화 소리가 거짓말처럼 뚝 끊겼다. 아이들은 약속이나 한 듯 고개를 숙이거나 칠판을 바라보며 침묵의 방패 뒤로 숨어버렸다.
“야, 전학생.”
소희가 은수의 얼굴 앞으로 상체를 숙이며 껌을 탁 뱉었다. 그녀의 눈빛에는 먹잇감을 굴복시키려는 잔인한 흥분감이 서려 있었다.
“너 아까부터 눈빛이 되게 거슬린다? 가난한 냄새 풀풀 풍기면서 사람 밑바닥부터 훑어보는 거, 어디서 배운 버릇이야?”
은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소희의 포악한 얼굴을 마주했다. 심장 박동수가 가파르게 치솟았지만, 은수의 눈빛은 여전히 얼음처럼 고요했다.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어.”
“모르면 몸으로 배워야지.”
소희가 비열하게 웃으며 은수의 어깨를 강하게 밀쳤다. 은수의 몸이 뒤로 밀리며 책상이 날카로운 마찰음을 냈다. 교실 안의 그 누구도 이 폭력을 제지하려 들지 않았다. 심지어 창가에 앉은 박한별마저 거울을 보며 립밤을 바르는 척 방관하고 있었다.
소희가 은수의 멱살을 잡으려는 듯 손을 뻗으며 차갑게 명령했다.
“따라와. 신관 2층 화장실 안쪽 칸으로. 5분 준다. 대가리 박고 반성할 준비 하고 와라.”
소희는 은수의 책상 위에 침을 뱉듯 껌을 올려놓고는 유유히 교실을 빠져나갔다.
홀로 남겨진 은수의 시선이 책상 위의 더러운 흔적에 머물렀다. 은수는 주머니 속 스마트폰의 녹음 완료 진동을 느끼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면을 쓴 교실의 껍데기가 벗겨지고, 마침내 첫 번째 사냥감의 숨통을 쥘 덫이 화장실 어둠 속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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