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 속의 날갯짓
카스텔 요새 지하 독방 9번 방의 무거운 철문이 닫히는 소리는 언제나처럼 둔탁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 잔향 뒤로 불길한 진동이 길게 이어졌다. 요새 중앙 마탑의 꼭대기에서 회오리치는 붉은색 마력 파동. 그것은 황실 파견 감찰관 알란 폰 크로이츠가 요새의 모든 외부 통신망을 차단하고 철저한 봉쇄 조치를 단행했다는 신호였다. 전령 비둘기 한 마리, 날개 달린 사역마 한 마리조차 감시망을 벗어날 수 없는 완벽한 고립.
강진혁은 등 뒤의 차가운 화강암 벽에 머리를 기댔다. 오른쪽 눈에서 끈적한 핏방울이 흘러내려 뺨을 붉게 물들였다. 정신 장벽인 ‘정신적 요새’를 극한으로 가동하여 오벨리아의 환술을 역류시킨 대가였다. 지독한 편두통이 관자놀이를 사정없이 찌르고 있었고, 고문용 마력 억제제의 약효 탓에 단전은 얼음장처럼 꽁꽁 잠겨 있었다. 육체의 실질적인 무력은 여전히 1성 이하. 손가락 하나 까딱하는 것조차 버거운 상태였지만, 그의 왼쪽 눈에 착용된 ‘진실의 눈 모노클’은 어둠 속에서도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철컥.
독방의 빗장이 조심스럽게 풀리며 간수장 베른이 미끄러지듯 들어왔다. 그의 뚱뚱한 몸은 사시나무 떨듯 떨리고 있었고, 이마에는 식은땀이 흥건했다.
“대, 대공 전하…… 큰일 났습니다.”
베른이 무릎을 꿇으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알란 감찰관이 요새 수비대장 제럴드 대위와 기사들을 동원해 요새의 모든 출입구를 봉쇄했습니다. 서신은 물론이고 요새 밖으로 나가는 모든 물자까지 정밀 검열하고 있습니다. 제 소지품까지 샅샅이 뒤지는 바람에 심장이 터지는 줄 알았습니다. 만약 보리스가 레이먼드 도련님의 자백 수정구를 다른 지하 감옥 보관함에 숨겨두지 않았다면, 즉시 들통났을 겁니다.”
진혁은 충혈된 오른쪽 눈을 천천히 감았다 뜨며 차분하게 대답했다.
“예상했던 범위 안이다. 알란은 원칙주의자야. 레이먼드가 독살에 실패하고 감옥 내부의 기류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눈치채자마자 손발을 묶으려 드는군.”
“그, 그럼 이제 어찌합니까? 제가 외부로 편지를 들고 나가는 것은 자살행위입니다. 기사단이 제 뒤를 그림자처럼 밟고 있습니다. 이대로 이틀 뒤 사형 유예 마감일이 되면, 저희는 꼼짝없이 황도로 압송되어 목이 잘릴 겁니다!”
베른의 눈동자에 서린 극심한 공포. 진혁은 현대 위기 협상가 시절, 인질극 현장에서 사방이 포위당한 채 이성을 잃어가던 납치범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이럴 때일수록 감정에 휘둘리면 판이 깨진다. 상대가 모든 공식적인 통로를 통제하고 있다면, 답은 하나뿐이다. 그들이 ‘보이지 않는 틈새’라고 여겨 아예 감시조차 하지 않는 가장 낮고 원시적인 경로를 찾는 것.
진혁은 시선을 돌려 독방의 구석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낡은 급사 모자를 눌러쓰고 식판을 정리하던 주근깨 가득한 소년이 서 있었다. 요새 내부를 자유롭게 드나들며 죄수들에게 물과 식사를 나르는 소년, 루카였다.
진혁은 왼쪽 눈의 모노클을 가볍게 튕기며 ‘눈동자 프로파일러’를 가동했다. 반투명한 푸른빛 텍스트가 소년의 머리 위로 떠올랐다.
[대상: 루카]
[마력 반응: 1성 (비전투원)]
[신체 상태: 만성적인 영양실조, 낡은 장화 밑창의 마모도 극심]
[심리 상태: 황실 기사단에 대한 극도의 적개심 88%, 두려움 40%]
‘루카. 황실 기사들이 하찮은 벌레처럼 여기며 시선조차 주지 않는 요새의 급사 소년. 하지만 요새의 모든 지름길과 감시병들의 교대 시간을 완벽하게 외우고 있는 아이.’
진혁은 품 안에서 요한이 베른을 통해 보내왔던 비상 식량 중,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부드러운 하얀 빵 한 조각을 꺼냈다. 그리고 그것을 소년에게 천천히 내밀었다. 극도의 긴장 상태에 있던 루카의 코가 빵의 고소한 냄새에 미세하게 실룩였다.
“배가 고프겠구나, 얘야.”
진혁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성대 통증을 억누르며 내뱉은 어조였지만, 현대의 위기 협상 기법 중 하나인 ‘정서적 동조’가 실린 완벽한 톤이었다. 상대의 결핍을 먼저 채워주고 심리적 무장을 해제하는 기술.
루카는 마른 침을 삼키며 진혁과 빵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황실 군인들에게 누나를 잃고 하루하루를 지옥처럼 버티던 소년에게, 전설적인 대공이 건네는 따뜻한 온기는 단순한 음식이 아니었다. 소년은 낡은 모자를 벗어 쥐며 조심스럽게 다가와 빵을 받아 쥐었다.
“대…… 대공 전하…….”
진혁은 조용히 미소 지으며, 소년의 손바닥 위에 추적이 불가능한 ‘밀무역 은화’ 한 닢을 소리 없이 올려놓았다. 제국의 인장이 정교하게 지워진, 오직 암시장에서만 통용되는 은화였다.
“루카. 내게 요새 밖의 믿을 만한 사람에게 전해야 할 아주 중요한 소식이 있단다. 황실의 기사들은 내 눈과 귀를 막았다고 믿고 있지만, 자네라면 그들의 오만한 눈을 피해 이 요새를 나갈 수 있을 것 같구나. 자네 누이의 원수를 갚고, 이 부패한 요새의 지배자들에게 본때를 보여주고 싶지 않나?”
소년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두려움은 순식간에 깊은 증오와 복수심, 그리고 주군을 향한 맹목적인 신뢰로 뒤바뀌었다. 호혜성의 법칙과 공통의 적을 활용한 완벽한 포섭이었다. 루카는 은화를 꽉 쥐며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전하의 명령이라면……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감시병들은 저를 하찮은 고아로만 봐서 제 몸은 뒤지지도 않습니다. 요새 하수구의 비밀 가도를 통하면 밖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
“영민한 아이구나.”
진혁은 낡은 양장 일기장의 모퉁이를 찢어 깃펜으로 은밀하게 서신을 적어 내려갔다. 그가 적은 문자는 평범한 제국의 공용어가 아니었다. 전대 대공 칼릭스가 구축했던 정보망 ‘블랙 페더’의 비밀 파동 암호 위에, 현대 지구의 수학적 치환 암호 방식(Symmetric-key Algorithm)을 복합적으로 이식한 ‘블랙 페더 2중 대칭 암호화’ 서신이었다.
마법적인 파동 위에 수학적 난수를 중첩시킨 이 서신은, 제국의 그 어떤 고위 해독 마법사가 가로채더라도 무의미한 마력 패턴이나 기하학적 낙서로만 보일 뿐이었다. 오직 원래의 복호화 키를 가진 블랙 페더의 정예 요원만이 해독할 수 있는 완벽한 보안 장치.
진혁은 작성한 서신을 정교하게 접어 루카의 낡은 장화 밑창 가죽 틈새에 깊숙이 밀어 넣었다.
“자정의 감시병 교대 시간이다. 순찰조가 교대하기 직전 3분의 공백이 생긴다. 그 틈을 타 ‘밀수꾼의 지하 가도’ 하수구로 들어가라. 요새 외곽의 남쪽 부두로 나가면 낡은 가죽 조끼를 입고 콧수염을 기른 사내가 있을 것이다. 그의 이름은 레이븐. 그에게 이 서신을 전해라.”
“명심하겠습니다, 전하.”
루카는 장화 밑창을 단단히 고쳐 매고, 식판을 든 채 조용히 독방을 빠져나갔.
자정이 되자 요새 내부의 마력 등불이 일제히 어두워졌다. 감시병들의 무거운 철갑 부츠 소리가 교대를 위해 멀어지는 찰나, 루카는 요새 하층 빈민가의 쓰레기 배출구 근처에 위치한 하수구 쇠창살을 들어 올렸다. 썩은 물 냄새와 축축한 독기가 코를 찔렀지만, 소년은 주저하지 않고 어둠 속으로 몸을 던졌다.
‘밀수꾼의 지하 가도.’
과거 대공가의 개척단이 요새 몰래 영지 외곽으로 물자를 나르기 위해 파놓았던 천연 동굴과 하수도가 얽힌 암흑의 길이었다. 루카는 쥐새끼처럼 몸을 웅크린 채 기척을 완벽히 지웠다. 머리 위 석판 너머로 순찰을 도는 황실 기사들의 단단한 발소리가 쿵쿵 울릴 때마다, 소년은 숨을 죽이고 벽면에 몸을 밀착했다. 차가운 오수가 몸을 적셨지만 손바닥 안의 은화와 대공의 차가운 눈빛을 떠올리며 앞으로 기어 나갔.
한 시간의 사투 끝에, 루카는 요새 외곽 산맥 밑바닥의 배수구를 통해 차가운 국경의 밤바람 속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한편, 카스텔 요새의 남쪽 외곽 부두. 얼어붙은 강바람이 불어오는 낡은 목조 창고 내부에는 한 사내가 횃불의 희미한 불빛 아래서 거친 가죽 조끼를 입은 채 목재를 정리하고 있었다. 대공가의 몰락 이후 부두 노동자로 위장해 살아가던 블랙 페더의 중간 관리자, 레이븐이었다.
창고의 낡은 목조 문이 삐걱거리며 열리고, 온몸이 오수로 젖은 소년 루카가 비틀거리며 걸어 들어왔다. 레이븐은 즉각 경계하며 허리춤의 단검으로 손을 가져갔으나, 소년이 장화 밑창을 뜯어내어 꾀죄죄한 종이 조각을 건네자 멈칫했다.
“대공 전하께서……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루카가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레이븐은 의구심 가득한 눈빛으로 종이 조각을 받아들었다. 표면에는 기괴한 수학적 기호와 알 수 없는 마법 기하학 문양만이 가득했다. 레이븐은 침을 삼키며 자신의 손가락에 끼워져 있던 검은색 ‘블랙 페더 암호 해독반’ 반지를 종이 위에 조심스럽게 가져다 대었다.
스우우우.
반지의 검은 보석이 서신의 특수한 마력 파동과 공명하는 순간, 종이 위의 문양들이 정교하게 회전하며 선명한 푸른빛의 텍스트로 재정렬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전대 대공 칼릭스만이 알고 있던 가문 비전의 비밀 인장과 함께, 현대의 완벽한 논리로 재구성된 구출 및 정보망 재건 지령서였다.
레이븐의 동공이 미친 듯이 지진을 일으켰다. 그의 단단한 어깨가 걷잡을 수 없이 떨리기 시작했다. 황실에 의해 영혼이 파괴되고 단두대에서 목이 잘릴 줄 알았던 주군이, 황실의 모든 감시망을 비웃듯 이토록 정교하고 치밀한 봉인 암호로 자신을 부르고 있었다.
“이…… 이 마법 파동은…….”
레이븐의 떨리는 목소리가 먼지 쌓인 창고 안의 침묵을 깨뜨렸다.
그는 서신 끝에 새겨진 날개 문양을 거친 손가락으로 쓸어내리며, 횃불의 붉은 불꽃 너머로 시선을 던졌다. 그의 눈에 뜨거운 열망과 전율이 차올랐다.
“그분이…… 돌아오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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