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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류하는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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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단 장막이 쳐진 지하 독방 9번 방의 공기는 비정상적으로 무겁고 차가웠다.


6성급 정신 지배 마법의 대가인 특별 심문관 바르톨로는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격렬하게 각혈하고 있었다. 그가 자랑하던 아티팩트 ‘진실의 저울’은 청동 바늘이 툭 부러진 채 바닥을 뒹굴었다. 인과율의 역류. 이 세계의 상식을 초월한 현대 서울의 기하학적 미로—지하철 환승로와 유리 빌딩 숲의 환영—에 정신이 부딪친 결과물이었다.


“스승님! 정신 차리십시오!”


데미안이 비명을 지르며 바르톨로를 부축했다. 하지만 바르톨로는 대답조차 하지 못한 채 머리를 감싸 쥐고 신음할 뿐이었다. 그의 뇌 신경은 이미 심각한 인지 부조화로 인해 타들어 가고 있었다.


진혁은 사슬에 묶인 채 벽에 기대어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우측 안구의 미세혈관이 파열되어 피눈물 같은 붉은 충혈이 그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고문용 마력 억제제가 혈관을 타고 흐르며 온몸의 마도 회로를 완전히 잠가버렸기에, 손가락 끝 하나 움직일 수 없는 상태였다. 극심한 두통이 관자놀이를 짓눌렀지만, 진혁은 차가운 포커페이스를 유지했다.


그때, 바르톨로의 등 뒤에 서 있던 보랏빛 마법 로브의 여성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황실 마법 고문관이자 환술의 천재, 오벨리아였다. 그녀의 차갑고 날카로운 미모 위로 짙은 분노와 경계심이 스쳐 지나갔다.


“바르톨로가 당하다니…… 믿을 수 없군. 전하, 기억을 잃었다는 것은 역시 비열한 연극이었습니까? 하지만 내 환술 앞에서도 그 정신의 장벽이 유지되는지 보지요.”


오벨리아가 보랏빛 수정 반지가 끼워진 손가락을 가볍게 튕겼다.


스산한 바람과 함께 독방 바닥에서부터 기묘한 보랏빛 안개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황실 마탑의 비전 환술, ‘거짓의 밤’이었다. 이것은 바르톨로의 강제적인 정신 침투와는 궤를 달리하는 마법이었다. 대상의 자아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꿈과 현실의 경계를 허물어 스스로 자신의 존재를 의심하게 만들고, 결국 자아를 서서히 녹여 지워버리는 끈적끈적한 늪 같은 마법이었다.


“아, 윽…….”


보랏빛 안개가 진혁의 호흡기를 타고 들어오는 순간, 그의 머릿속이 뿌옇게 흐려졌다.


의식 속에서 또다시 진짜 칼릭스 브리안의 절망적인 기억 조각들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눈보라가 몰아치는 북부의 성벽, 차갑게 식어버린 아내 레노어의 손을 잡고 울부짖던 전대의 슬픔이 진혁의 자아를 잠식하려 들었다. 자아 균열 임계치가 다시금 위험 수위로 치솟기 시작했다. 이대로 은밀하게 녹아내린다면, 강진혁이라는 현대인의 영혼은 흔적도 없이 사라질 터였다.


‘방어만으로는 한계가 있어. 내 마력 회로는 완전히 잠겨 있고, 오벨리아의 환술은 안개처럼 미세하게 틈새를 파고든다. 장벽을 치는 것만으로는 이 서서히 조여오는 질식을 막을 수 없다.’


진혁은 핏빛으로 물든 오른쪽 눈을 가늘게 뜨고 오벨리아를 응시했다. ‘눈동자 프로파일러’가 가동되며 그녀의 마력 흐름이 투영되었다.


[대상: 오벨리아]

[마법 시전 상태: 거짓의 밤 (정신 동조율 85% 연결됨)]

[특이사항: 대상이 시전자의 뇌와 피심문자의 뇌를 하나의 마력 실선으로 정밀하게 연결하여 환각을 주입 중.]


정신적 빨대.

그녀는 지금 자신의 뇌와 진혁의 뇌를 다이렉트로 연결해 환각을 쏟아붓고 있었다.


진혁의 입꼬리가 피어오르는 보랏빛 안개 속에서 미세하게 비틀려 올라갔다. 현대 위기 협상가로서, 그는 인질범이 인질의 목에 칼을 대고 있을 때가 역으로 가장 취약한 순간임을 잘 알고 있었다. 자신과 상대방의 거리가 제로가 되는 순간, 방어선을 푸는 것이 가장 강력한 공격이 될 수 있다.


‘기억의 역류(Memory Backflow).’


진혁은 자신의 의식 속에 지어두었던 현대 서울의 지하철 미로 장벽의 한쪽 모퉁이를 고의로 완전히 열어젖혔다.


오벨리아는 진혁의 정신 장벽에 거대한 균열이 생겼다고 오판했다. 그녀의 자수정 반지가 승리를 확신하듯 밝게 빛났고, 그녀의 환술 마력이 기세 좋게 진혁의 열린 무의식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하지만 그녀가 연결한 정신적 빨대를 통해 흘러들어온 것은, 칼릭스의 나약한 기억 파편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 세계의 인과율과 역사로는 도저히 해석할 수 없고, 소화할 수도 없는 방대한 이질적 데이터의 폭포수였다.


쿠아아아아!


진혁은 자신이 평생 동안 머릿속에 축적해 두었던 현대 지구의 지식들을 역으로 오벨리아의 정신 회로를 향해 무자비하게 뿜어냈다.


대한민국 형법과 민법의 수백 개 조문, 경찰 행정학의 복잡한 매뉴얼, 현대 위기 협상 가이드라인의 세부 수치들, 그리고 학창 시절 억지로 외워야 했던 미적분학의 정밀한 수식들과 국가 통계국의 방대한 인구 통계 데이터까지. 인과율의 규칙을 따르지 않는 고차원적 정보들이 번역 마법의 필터를 거치며 오벨리아의 뇌 신경으로 가차 없이 역류했다.


“……아? 아아악!”


오벨리아가 갑자기 머리를 쥐어뜯으며 비명을 질렀다.


그녀의 보랏빛 마법 로브가 거칠게 펄럭였다. 그녀가 시전하던 보랏빛 안개가 순식간에 흩어지며 역방향으로 휘몰아쳤다. 오벨리아의 뇌는 지금 비상사태였다. 마력의 언어로 번역되어 들어오는 정보들이 ‘지하철 환승 체계’, ‘헌법 제1조’, ‘한계효용 체감의 법칙’ 같은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개념들이었기에, 그녀의 정신 회로는 이를 해석하려다 급격한 과부하를 일으켰다.


“이, 이게 뭐야……! 이게 대체 무슨 지식이야! 멈춰…… 멈춰줘! 머리가, 머리가 깨질 것 같아!”


오벨리아의 고막과 코에서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그녀의 자수정 반지가 과부하를 견디지 못하고 파르르 떨리다 쩍 금이 갔다.


진혁은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현대 문명이 쌓아 올린 수백 년간의 정교한 학술 데이터다. 마법이라는 편리한 도구에만 의존해 온 너희의 뇌 용량으로 이 방대한 시스템을 감당할 수 있을 것 같나?’


콰아앙!


의식의 연결고리가 폭발하듯 끊어졌다. 오벨리아는 흰자위를 보이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녀의 몸이 몇 번 경련하더니, 이내 완벽한 혼절 상태에 빠졌다. 6성급 심문관에 이어 5성급 환술사까지, 단 한 번의 물리적 타격도 없이 오직 지식의 역류만으로 완벽하게 무력화된 순간이었다.


“오벨리아! 스승님……!”


데미안은 이제 공포를 넘어 경악에 질려 있었다. 그의 눈에 비친 진혁은 더 이상 무력이 상실된 쇠약한 죄수가 아니었다. 오른쪽 눈이 피로 붉게 물든 채, 차가운 미소를 짓고 있는 눈앞의 사내는 마치 심연에서 기어 올라온 기괴한 괴물처럼 보였다.


“데미안.”


바르톨로가 간신히 정신을 차리며 데미안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그의 목소리는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철수…… 철수해야 한다. 이 자는…… 단순한 기억상실이 아니다. 가자…….”


바르톨로는 직감했다. 이 방에 계속 머물다가는 자신들의 자아마저 영구히 붕괴될 것임을. 데미안은 서둘러 쓰러진 오벨리아를 들쳐멨고, 바르톨로를 부축하며 도망치듯 독방 철문을 열고 빠져나갔다. 그들이 설치했던 차단 장막 결계가 연기처럼 사라졌다.


철문이 쾅 닫히고, 독방 안에는 다시 고요함이 찾아왔다.


진혁은 거친 숨을 내쉬었다. 기억 역류의 반동으로 머릿속이 깨질 듯 아팠고, 현대 지구에서의 사소한 어린 시절 기억 몇 자락이 안개처럼 흐려지는 정신적 대가를 치렀다. 하지만 그는 쉴 틈이 없었다.


진혁은 고개를 돌려 철문 옆의 어두운 구석을 바라보았다.


“거기 숨어서 숨소리만 죽이고 있으면, 내가 모를 줄 알았나? 베른 간수장.”


독방 철문 너머, 어두운 복도 구석에서 거친 호흡 소리가 멈칫했다.


이내 덜컹거리는 열쇠 소리와 함께, 뚱뚱한 체구에 간수장 제복을 느슨하게 걸친 베른이 창백한 얼굴로 기어 들어왔다. 그는 황실 심문관들이 무단으로 침입해 불법 고문을 감행하는 현장을 방조하고 멀리서 관망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심문관들이 처참하게 패배해 도망치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목격한 베른의 온몸은 눈에 띄게 떨리고 있었다.


“대, 대공 전하…… 저, 저는 그저…….”


베른은 진혁의 피로 물든 오른쪽 눈과 마주치자마자 털썩 무릎을 꿇었다.


진혁은 ‘눈동자 프로파일러’를 가동해 베른의 상태를 분석했다. 그의 시선은 끊임없이 진혁의 사슬과 바닥에 떨어진 부러진 아티팩트 바늘을 향하고 있었다. 두려움과 탐욕, 그리고 어떻게든 책임을 회피하려는 비열한 잔머리가 실시간으로 읽혔다.


진혁은 성대에 아주 미세한 힘을 주어 차갑고 무거운 울림을 실었다.


“베른 간수장. 자네 품 안의 주머니에 들어있는 은화들의 일련번호를 내가 읊어줄까?”


“……네, 예? 그게 무슨…….”


“카스텔 하층민 구역의 밀무역 상인들이 사용하는, 황실 인장이 정교하게 지워진 밀무역 은화 말일세. 자네가 지난주 수요일 밤, 요새 서쪽 하수구 근처에서 상단 연락책에게 받은 뇌물 상자 속에 들어있던 것들이지.”


베른의 눈동자가 찢어질 듯 커졌다. 등 뒤로 식은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진혁은 현대에서 수많은 부패 공직자들을 상대하며 터득한 프로파일링 데이터를 기반으로, 요새 간수장의 전형적인 비리 경로를 정확히 저격한 것이었다. 베른이 뒷골목 밀무역 자금을 세탁해 주며 뇌물을 받아왔다는 사실은, 그의 가죽 주머니에서 풍기는 특유의 광산 정석 냄새와 소매 끝의 때만으로도 충분히 도출할 수 있는 결론이었다.


“자네가 황실 심문관들의 불법 침입을 방조한 것만으로도, 에드하르트 총독의 자치령 사법권을 침해한 중죄네. 거기에 황실의 추적 마법이 통하지 않는 밀무역 은화를 수수한 비리 장부까지 총독부와 황도 사법성에 동시에 발송된다면…… 자네뿐만 아니라 하층민 구역에 숨겨둔 자네 가족들의 목숨은 어떻게 될 것 같나?”


“전, 전하! 살려주십시오! 제발 살려주십시오!”


베른은 머리를 바닥에 찧으며 절규했다. 주인공이 자신의 가족이 거주하는 구역의 안전 비밀까지 정확히 언급하자, 그의 얄팍한 잔머리는 완전히 박살 나 버렸다. 무력 대신 철저한 정보의 비대칭성과 심리적 결핍을 공략한 완벽한 굴복이었다.


진혁은 피눈물이 흐르는 오른쪽 눈을 번뜩이며, 거칠게 떨고 있는 간수장의 눈앞에 조용히 다가갔다.


“선택해라, 베른. 황실의 죽은 사냥개들과 함께 단두대에 오를 것인가, 아니면 내 그림자가 되어 살아남을 것인가.”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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