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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방 안의 관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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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문이 닫히는 육중한 쇠소리가 지하 감옥의 서늘한 공기를 갈랐다.


카스텔 요새 지하 독방 9번 방. 사방이 거친 화강암 벽으로 둘러싸인 그곳은 빛조차 차단된 완전한 암흑이어야 했다. 벽면에 매달린 철제 등잔에서 피어오르는 기묘한 푸른 마력 불꽃이 아니었다면 말이다. 열기 대신 기분 나쁜 한기를 내뿜는 푸른 불꽃은 사슬에 묶인 채 주저앉은 강진혁의 창백한 얼굴을 기괴하게 비추고 있었다.


“쿨럭, 욱…….”


진혁은 고개를 숙인 채 마른기침을 토해냈다. 입술 사이로 흘러내린 붉은 피가 바닥의 차가운 돌 표면에 얼룩을 남겼다. 총독 집무실에서 에드하르트의 권총을 마주하고 기세를 부렸던 대가는 혹독했다. 원래 몸 주인인 칼릭스의 8성급 마력은 완벽히 잠겨 있는 상태. 그런 몸으로 억지로 마력 회로를 뒤틀어 성대에 마력을 집중했으니, 후두 신경이 성할 리가 없었다.


‘영혼 동조율 10% 미만. 이 빌어먹을 육체는 껍데기만 대공일 뿐, 실질적인 무력은 일반인과 다를 바 없다.’


진혁은 양 손목을 옭아맨 마력 억제 쇠사슬을 내려다보았다. 사슬이 살을 파고들 때마다 미세한 마력 파동이 온몸의 신경을 바늘로 찌르는 듯한 통증을 유발했다. 하지만 육체적인 고통보다 그를 더 조여오는 것은 시간이었다. 에드하르트 총독을 협박해 일주일이라는 임시 사형 유예를 따내긴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일 뿐이었다.


그때였다. 독방 외부의 복도에서 무거운 가죽 장화 소리와 함께 휠체어 바퀴가 굴러가는 듯한 소리가 정적을 깨뜨렸다.


철컥, 철컥.


요새 간수장 베른의 다급한 열쇠 꾸러미 소리가 들리더니, 마침내 9번 방의 두꺼운 철문이 천천히 열렸다. 푸른 마력 불꽃이 흔들리며 문가에 선 두 그림자를 비추었다.


한 명은 정갈한 검은색 집사복을 입고 한쪽 눈에 모노클을 쓴 노신사였다.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슬픔과 안도가 뒤섞인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사내, 대공가의 수석 집사 요한이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휠체어에 앉아 차가운 시선으로 자신을 쏘아보는 젊은 여성이 있었다.


은발에 선명한 자줏빛 눈동자. 대공가의 품위를 잃지 않는 단정한 검은색 드레스를 걸친 수려한 외모의 소유자. 차가운 얼음 조각처럼 아름답지만, 그 이면에는 맹수 같은 날카로움을 품고 있는 여성.


칼릭스 브리안의 딸이자, 대공가의 소가주 대행인 엘리시아 브리안이었다.


“……대공 전하!”


요한이 문이 열리자마자 바닥에 무릎을 꿇으며 울먹였다. 그의 모노클 너머로 눈물이 고여 있었다. 진짜 칼릭스의 어린 시절부터 모든 비밀을 공유해 온 충신다운 반응이었다. 요한은 진혁의 처참한 몰골을 보며 가슴을 쥐어뜯었다.


“살아 계셨군요. 단두대 위에서 전하의 소식을 듣고 이 늙은이의 심장이 멎는 줄 알았습니다. 기억을 잃으셨다는 소문이 사실이었습니까? 저를 알아보시겠습니까?”


진혁은 요한의 물음에 즉각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눈동자를 굴렸다. 그의 시선은 요한의 뒤에 버티고 선 엘리시아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엘리시아는 감정의 동요를 전혀 드러내지 않았다. 아버지가 처형대에서 살아 돌아왔음에도 그녀의 자줏빛 눈동자에는 반가움이나 안도감 따위는 한 자락도 찾아볼 수 없었다. 오직 차가운 의심과 경계만이 서려 있을 뿐이었다.


진혁은 조용히 자신의 고유 능력인 ‘눈동자 프로파일러’를 가동했다.


진혁의 시야가 미세하게 슬로우 모션으로 변하며, 엘리시아의 얼굴이 정밀하게 분석되기 시작했다. 그녀의 동공 지진 수치, 눈꺼풀의 미세한 떨림, 호흡의 주기, 그리고 그녀가 귀에 걸고 있는 어머니의 유품인 ‘겨울눈물 귀걸이’의 미세한 마력 반응까지.


[대상: 엘리시아 브리안]

[의심 및 경계 수치: 92% (극도로 높음)]

[호흡 주기: 1.2초 (극도의 긴장 상태)]

[미세 표정 분석: 입꼬리가 미세하게 처져 있음. 분노와 슬픔이 혼재된 상태.]


‘엘리시아 브리안. 아버지를 깊이 불신하고 증오하는 딸. 하지만 가문의 멸문을 막기 위해 이 끔찍한 감옥까지 찾아왔다. 그리고…… 나를 칼릭스가 아닌 다른 존재로 의심하고 있군.’


진혁은 현대의 위기 협상가 시절, 수많은 인질범과 용의자들을 대면하며 터득한 감각을 일깨웠다. 지금 이 순간, 자신을 가장 위협하는 적은 황실의 기사단이 아니었다. 바로 눈앞에 서 있는 이 영민하고 차가운 딸이었다.


“요한, 물러서세요.”


엘리시아의 목소리가 독방의 공기를 얼려버릴 듯 차갑게 울렸다. 요한이 움찔하며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소가주 전하, 대공 전하의 상태가…….”


“물러서라고 했습니다.”


단호한 명령에 요한은 입술을 깨물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엘리시아는 휠체어 바퀴를 천천히 굴려 진혁의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그녀의 드레스 자락이 바닥의 피웅덩이를 스쳤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스릉.


엘리시아가 품 안에서 작은 은빛 유리병을 꺼내 들었다. 병 안에는 맑은 액체가 담겨 있었고, 그 표면에는 대공가의 비전 마력이 푸른 서리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기억을 잃으셨다니, 가문의 예법도 잊으셨겠군요.”


엘리시아가 유리병의 마개를 열며 차갑게 말했다.


“브리안 가문의 피를 이은 자는, 사지(死地)에서 돌아왔을 때 반드시 가문의 정화 의식을 치러야 합니다. 이 정화수로 영혼에 묻은 부정을 씻어내지 않으면, 가문의 성소에 발을 들일 수 없으니까요.”


그녀는 은빛 병을 기울여 정화수 한 방울을 진혁의 이마를 향해 떨어뜨리려 했다.


진혁은 본능적으로 경보를 울렸다. ‘눈동자 프로파일러’가 그녀의 행동 이면에 숨겨진 정교한 덫을 포착했기 때문이다. 그녀의 눈동자가 아주 미세하게 오른쪽 아래로 향했다가 돌아왔다. 그것은 가짜 시나리오를 지어내거나 상대를 시험할 때 나타나는 전형적인 시선 이동이었다.


‘가문의 정화 의식? 그런 규칙은 칼릭스의 일기장이나 요한의 기억 어디에도 없었다. 게다가…….’


진혁은 요한의 표정을 슬쩍 훔쳐보았다. 요한의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크게 흔들렸다가 아래로 내려앉았다. 수석 집사조차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것은 가문의 예법이 아니었다. 엘리시아가 자신을 시험하기 위해 즉석에서 꾸며낸 철저한 ‘가짜 덫’이었다.


하지만 진짜 함정은 그 뒤에 있었다.


진혁이 기억상실증을 연기하기 위해 이 의식을 고분고분 받아들이거나, 혹은 가문의 예법을 아는 척하며 자연스럽게 행동하려 든다면, 그 즉시 그녀의 의심에 확신을 주게 될 터였다.


진혁은 짧은 0.1초의 순간 동안 최선의 선택지를 계산했다. 현대 협상론의 스승인 로버트 교수의 가르침이 뇌리를 스쳤다.


‘상대가 완벽한 증거가 아닌 심증만으로 몰아붙일 때는, 논쟁에 응하지 마라. 판을 깨뜨리고 상대방이 가진 가장 깊은 정서적 결핍을 역으로 찔러라.’


진혁은 정화수가 이마에 닿기 직전, 고개를 거칠게 옆으로 돌렸다.


탁!


은빛 물방울이 그의 뺨을 스쳐 바닥의 먼지 위로 떨어졌다. 진혁은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리듯 목소리를 낮추었다. 성대의 통증으로 인해 목소리가 긁히며 기묘한 위압감이 서렸다.


“치워라.”


엘리시아의 손길이 공중에서 우뚝 멈췄다. 자줏빛 눈동자가 무섭게 가라앉았다.


“……치우라고 했습니다, 아버지. 기억을 잃었어도 내 몸이 이 기분 나쁜 주술을 거부하는군. 브리안의 정화수? 하, 그 위선적인 물장난을 내가 평생 얼마나 혐오했는지 정녕 기억나지 않는 모양이구나.”


진혁은 칼릭스의 오만하고 타협 없는 성격을 그대로 모방해 내뱉었다. 사실 칼릭스가 정화 의식을 싫어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대공가의 오만한 가주가 딸이 주는 정체불명의 약물을 고분고분 받아먹을 리가 없다는 포커페이스의 연장이었다.


그러나 엘리시아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거짓말.”


엘리시아가 상체를 앞으로 숙였다. 그녀의 은발이 진혁의 뺨에 닿을 듯 가까워졌다. 그녀의 눈동자 속에서 서리 같은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당신, 누구야?”


그녀의 나직한 목소리는 칼날보다 예리했다.


“내 아버지는 오만하고 잔인한 미치광이였지만, 결코 영리한 자는 아니었어. 단두대 위에서 제국 헌법의 맹점을 찔러 감찰관을 침묵시키고, 총독과의 독대에서 비리를 저격해 사형 유예를 따내다니. 내 아버지는 그런 정교한 심리전을 펼칠 머리가 없는 인간이야.”


엘리시아가 진혁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쇠사슬이 요란하게 짤랑였다. 그녀의 손아귀 힘은 마력 4성의 강자답게 무시무시했다. 목이 조여오며 후두 신경의 통증이 극에 달했다.


“기억을 잃었다는 얄팍한 핑계로 황실의 눈을 속였을지는 몰라도, 내 눈은 못 속여. 당신의 그 눈빛, 사소한 호흡의 주기, 그리고 펜을 돌리거나 대화할 때 상대의 반응을 관찰하는 그 기묘한 습관들…… 전부 내 아버지가 아니야. 진짜 칼릭스 브리안은 어디 있지? 당신이 그를 죽이고 대역을 서고 있는 건가?”


독방 안의 공기가 완전히 얼어붙었다. 요한은 공포에 질린 얼굴로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지만, 감히 끼어들지 못했다. 엘리시아의 손가락 끝에서 푸른 서리 마력이 피어오르며 진혁의 목덜미를 얼려가기 시작했다.


진혁은 숨이 막히는 고통 속에서도 ‘눈동자 프로파일러’를 가동해 그녀의 사각지대를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그녀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눈동자 깊은 곳에는 분노 뒤에 숨겨진 거대한 불안감과 결핍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녀는 가짜 아버지를 처단하고 싶은 것이 아니었다. 진짜 아버지가 자신을 버리고 반역을 저질렀다는 사실, 그리고 가문이 멸문당할 위기에 처했다는 현실 앞에서의 극도의 무력감에 비명을 지르고 있는 것이었다.


진혁은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포커페이스는 깨지지 않았다.


“엘리시아.”


진혁은 그녀의 이름을 나직하게 불렀다.


“그렇게 나를 부정하고 싶으냐?”


“……뭐?”


“내가 진짜 칼릭스가 아니기를 바라는 모양이군. 그래야 네 마음에 평화가 찾아올 테니까.”


진혁은 콜드 리딩을 가동해 그녀가 착용하고 있는 ‘겨울눈물 귀걸이’를 지시했다.


“그 귀걸이…… 네 어머니가 사망하던 날 밤, 내가 너에게 던져주었던 유품이지. 너는 그날 이후로 단 한 번도 그 귀걸이를 빼놓지 않았다. 왜일까? 아버지가 자신을 한 번이라도 더 바라봐 주기를, 어머니를 잃은 슬픔을 알아채 주기를 바라는 처절한 구걸이었지.”


엘리시아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손아귀의 힘이 미세하게 풀렸다.


“하지만 나는 너를 돌아보지 않았다. 공허의 마력에 미쳐서, 황실과의 전쟁에 미쳐서 너를 철저히 방치했지. 네가 그 휠체어에 앉아 다리를 쓰지 못하게 되었을 때조차, 나는 네 무능함을 꾸짖었을 뿐이다.”


진혁은 칼릭스의 잔향이 영혼 속에서 속삭여준 단편적인 기억들을 한데 엮어, 그녀의 가슴 가장 깊은 상처를 자비 없이 후벼 팠다. 이것은 잔혹한 공격이 아니었다. 협상 테이블에서 주도권을 잡기 위해 상대의 감정적 장벽을 무너뜨리는 필연적인 수단이었다.


“네가 지금 내 목을 꺾어 내가 가짜임을 밝혀내면, 브리안 가문은 어떻게 되지? 감찰관 알란은 즉각 단두대의 칼날을 내릴 것이고, 네 숙부 프란츠는 황실과 결탁해 영지를 찢어발기겠지. 너는 가문의 파멸을 방관한 소가주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진혁은 엘리시아의 얼굴 앞까지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의 푸른 눈동자가 차갑게 번뜩였다.


“진짜 칼릭스를 원하는가? 가문을 파멸로 이끌고 너를 평생 외면했던 그 미치광이 아버지를 되찾고 싶은가? 아니면…… 비록 기억은 잃었을지언정, 차가운 이성으로 황실의 목줄을 쥐고 가문을 살려낼 이 가주를 따르겠는가?”


엘리시아의 호흡이 완전히 가빠졌다. 자줏빛 눈동자에 서린 서리 마력이 흔들리더니, 이내 거짓말처럼 사그라들었다.


그녀의 손가락이 진혁의 멱살에서 힘없이 떨어졌다. 엘리시아는 뒤로 물러서며 거친 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평생 느껴보지 못한 감정적 패배감과 함께, 눈앞의 사내가 뿜어내는 압도적인 논리와 기세에 짓눌려 있었다.


진혁은 가볍게 옷깃을 정리하며 잔인한 미소를 지었다. 협상은 성공적이었다. 그녀는 더 이상 물리적인 위협을 가하지 못할 터였다.


“……당신은 영악해.”


엘리시아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녀는 품 안에서 작은 검은 가죽 수첩을 꺼내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그것은 그녀가 주인공의 달라진 습관과 모순점을 기록하기 시작한 ‘비밀 수첩’이었다.


“기억은 잃었어도, 그 잔인한 통찰력만큼은 여전하군요. 하지만 명심하세요. 나는 당신이 진짜 아버지인지 아닌지 끝까지 지켜볼 겁니다. 단 한 번이라도 가문을 위험에 빠뜨리는 실수를 저지른다면…… 그때는 내 손으로 당신의 목을 칠 테니까요.”


엘리시아는 휠체어 바퀴를 돌려 차갑게 독방을 나섰다. 요한은 복잡한 눈빛으로 진혁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를 올린 뒤, 그녀의 뒤를 따랐다.


육중한 철문이 다시 닫히고, 독방 안에는 다시 푸른 마력 불꽃과 진혁만이 남았다. 진혁은 뺨에 흐르는 땀을 닦아내며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아슬아슬한 줄타기였다.


‘정체 탄로의 위기는 넘겼다. 하지만 엘리시아의 의심은 완전히 꺼지지 않았어.’


진혁이 다음 대책을 구상하려던 찰나.


쿵, 쿵, 쿵.


독방 외부 복도의 끝에서, 요새 전체를 진동시키는 듯한 음산하고 묵직한 발소리가 9번 방을 향해 서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에드하르트 총독과의 밀약마저 무시하고 들이닥치는, 황실의 진짜 추격자이자 고문 전문가의 발소리였다.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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