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두대 뒤의 찰나
차가운 화강암 바닥을 쓸며 끌려가는 사슬 소리가 길게 늘어졌다. 연무장의 소란스러움은 무거운 철문 너머로 멀어졌지만, 강진혁의 목덜미에 서린 소름은 가실 줄 몰랐다. 기사들이 그를 거칠게 밀어 넣은 곳은 음습한 지하 독방이 아니었다. 발밑에는 화려한 붉은 카펫이 깔려 있었고, 정면의 벽면에는 거대한 대륙 지도가 걸려 있었다.
카스텔 요새의 심장부이자 지배자의 공간. 총독 에드하르트 폰 카스텔의 집무실이었다.
“모두 물러가라. 내 허락이 있기 전까지는 그 누구도 이 방에 들여보내지 마라.”
에드하르트의 낮고 위엄 있는 목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주인공의 양팔을 붙잡고 있던 중갑 기사들이 일제히 거수경례를 붙인 뒤 방을 나섰다. 묵중한 철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집무실 안에는 오직 두 사람만의 숨소리만이 남았다.
진혁은 바닥에 주저앉은 채 숨을 몰아쉬었다. 몸 안의 마력 회로가 완전히 비틀려 있었다. 단두대 위에서 억지로 기세를 부리기 위해 미세한 마력을 짜내 성대에 집중했던 반동이었다. 목구멍 안쪽에서 비린 피맛이 울컥 올라왔다. 영혼 동조율은 여전히 10% 미만. 여기서 조금이라도 마력을 더 유통하려 했다간, 에드하르트가 손을 쓰기도 전에 자아가 붕괴되어 사망할 것이 뻔했다. 무력은 철저히 봉인된 상태였다.
서적들이 가득한 책상 뒤에 서 있던 에드하르트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화려한 금색 견장이 달린 제국 총독 제복을 입은 그는, 날카롭고 야심 찬 눈빛을 지닌 40대의 미남이었다. 하지만 그 수려한 얼굴은 지금 차가운 살의로 일그러져 있었다.
스릉.
에드하르트가 제복 안쪽에서 은빛으로 빛나는 마도 권총을 꺼내 들었다. 황실에서 하사받았다는 명총, ‘레오폴트 스페셜’이었다. 권총의 총구가 정확히 진혁의 이마 정중앙을 겨누었다. 총구 끝에서 푸른빛의 마력 탄환이 일렁이며 살벌한 열기를 뿜어냈다.
“칼릭스 브리안.”
에드하르트의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네놈의 그 어설픈 기억상실 연극, 내 눈까지 속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나? 단두대 위에서 제국 헌법을 읊조리며 시간을 벌다니. 미치광이 반역자 대공이 하루아침에 영리한 법률가라도 되셨군.”
방 안의 공기가 숨이 막힐 정도로 무겁게 가라앉았다. 에드하르트의 손가락이 방아쇠를 천천히 당기기 시작했다. 마도 권총의 회로가 작동하며 윙윙거리는 기계음이 고막을 자극했다. 당장이라도 머리통을 날려버릴 기세였다.
하지만 진혁은 포커페이스를 잃지 않았다. 현대의 위기 협상가로서 수천 번의 실전 인질극을 해결하며 터득한 냉철한 이성이 그의 머리를 차갑게 식혔다. 진혁은 조용히 자신의 고유 스킬인 ‘거짓의 잔영’을 가동했다.
진혁의 외알안경 너머로 에드하르트의 전신이 관찰되었다. 그의 눈동자 움직임, 미세하게 떨리는 검지손가락, 그리고 총구 끝의 마력 파동.
‘거짓의 잔영’이 시각화한 지표들이 반투명한 푸른 텍스트로 진혁의 뇌리에 떠올랐다.
[대상: 에드하르트 폰 카스텔]
[살의 표출 수치: 75% -> 40% (하락 중)]
[등 뒤의 마력 아지랑이: 붉은색 점멸 (기만 및 은폐 상태)]
‘역시 그렇군.’
진혁은 속으로 확신했다. 에드하르트는 지금 당장 자신을 죽일 생각이 없다. 권총을 겨눈 것은 기선을 제압하고, 자신이 원하는 정보를 뜯어내기 위한 고도의 심리적 압박에 불과했다. 진짜 살의를 품은 자는 방아쇠를 당기기 전에 굳이 상대의 연극을 지적하며 말을 섞지 않는다.
“총독님.”
진혁은 이마에 총구가 닿은 상태에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레오폴트 스페셜의 마력 탄환은 파괴력이 대단하더군요. 하지만 그걸 쏘시기 전에, 당신의 왼쪽 소매 깃을 한번 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에드하르트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했다.
“무슨 수작이냐.”
“소매 끝동에 아주 미세하게 묻어 있는 푸른색 가루 말입니다. 요새의 일반적인 먼지가 아니더군요. 순도 90% 이상의 ‘청색 정석’ 가루입니다. 황실이 유통을 철저히 통제하는 그 귀한 마력 연료가, 어째서 국경 변경지대의 총독 소매에 묻어 있는 걸까요?”
순간, 에드하르트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방아쇠를 당기려던 손가락의 움직임이 뚝 멈췄다.
진혁은 상대의 심리적 장벽에 첫 번째 균열이 생겼음을 읽어냈다. 그는 벼랑 끝 협상술의 프레임을 본격적으로 전개하기 시작했다. 상대방이 가진 가장 치명적인 약점을 쥐고 흔들어, 자신을 죽였을 때 얻는 이익보다 살려두었을 때 얻는 정치적 이익이 압도적으로 크다는 것을 수학적으로 증명해야 했다.
“당신은 황실 몰래 북부 대공가의 마력 광산에서 채굴된 미정제 원석을 드워프 밀수꾼들을 통해 세탁해 왔습니다. 그 세탁된 자금으로 요새 지하 창고에 군량미와 무기를 대량으로 축적하고 계시더군요.”
진혁은 에드하르트의 안색이 창백해지는 과정을 콜드 리딩으로 정밀하게 관찰하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세탁 채널은 드워프 상인 루크. 횡령한 세금과 정석 대금은 황도 은행의 가명 계좌로 분산 송금하셨습니다. 최근 3년간 횡령한 액수만 해도 제국 금화로 50만 닢에 달하더군요. 총독님, 황실에 충성하는 척하면서 뒤로는 사병을 기르고 군량미를 모으다니... 황위 찬탈이라도 계획하고 계신 겁니까?”
“네놈이... 그걸 어떻게...!”
에드하르트가 이빨을 갈며 권총을 쥔 손을 바르르 떨었다. 오만함으로 가득했던 그의 얼굴에 극도의 당혹감과 불안감이 스쳐 지나갔다. 기억을 잃었다던 반역자 대공이, 자신만 알고 있어야 할 극비 중의 극비를 정확한 수치와 인물명까지 대며 폭로하고 있었다. 정보의 완벽한 비대칭성이 가져온 압도적인 충격이었다.
“내가 기억을 잃었다고 해서, 내 정보망까지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진혁은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사실 전대 대공의 기억 파편과 프로파일링으로 짜 맞춘 도박이었지만, 에드하르트의 반응을 보니 100% 명중이었다.
“당신이 나를 여기서 즉결 처형한다면, 황실 감찰관 알란은 기뻐하겠지요. 하지만 내 목숨이 끊어지는 즉시, 당신의 모든 횡령 장부와 황위 찬탈 계획이 담긴 비밀 문서가 황도의 사법성으로 자동 송신되도록 설계해 두었습니다. 나와 함께 파멸의 단두대로 오르시겠습니까?”
에드하르트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그는 진혁의 눈동자를 똑바로 응시했다. 그 푸른 눈동자 속에는 죽음을 앞둔 죄수의 공포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상대를 완벽하게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흔드는 노련한 협상가의 차가운 이성만이 번뜩이고 있었다.
에드하르트는 직감했다. 이 자는 진짜로 자신과 동귀어진할 준비가 되어 있다.
철컥.
길고 긴 대치 끝에, 에드하르트가 천천히 마도 권총을 내렸다. 그의 이마에 식은땀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원하는 게 뭐냐, 칼릭스.”
“상호 파멸이 아닌, 상호 공생입니다.”
진혁은 쇠사슬을 짤랑이며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일주일 뒤면 황실에서 악명 높은 특별 심문관이 도착할 겁니다. 그들이 내 기억을 강제로 탐독하려 들겠지요. 내가 살아남아야 당신의 비밀도 안전합니다. 나를 일주일 동안 황실의 눈으로부터 완벽하게 보호해 줄 방패막이 되어 주십시오. 그 대가로, 대공가의 북부 마력 광산 채굴권 일부를 임시 양도해 드리지요.”
에드하르트는 입술을 깨물었다. 분하고 굴욕적이었지만, 진혁이 제시한 조건은 자신의 목숨과 야망을 지키기 위한 유일한 밧줄이었다.
“좋다. 일주일이다. 그동안 감찰관 알란의 접근을 차단하고 정밀 심문을 연기해 주지. 하지만 명심해라. 내 인내심을 시험하려 들지 마라.”
기묘하고 위태로운 임시 동맹이 체결되는 순간이었다. 진혁은 속으로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생존을 위한 안전 우산을 확보했다.
탁, 탁, 탁!
그때, 집무실 문을 급박하게 두드리는 소리가 정적을 깨뜨렸다. 에드하르트가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무슨 일이냐! 방해하지 말라 했을 텐데!”
철문이 벌컥 열리며, 요새의 전령 기사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들이닥쳤다. 기사는 무릎을 꿇으며 다급하게 보고했다.
“총독님! 황실에서 전령이 도착했습니다! 자비 없는 고문 마법과 정신 지배로 악명 높은 특별 심문관, 바르톨로 님이 예정보다 사흘 일찍 요새 정문에 입성하셨습니다!”
그 보고에 에드하르트의 얼굴이 굳어졌고, 진혁의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았다. 예상보다 너무 빠른 추격자의 등장이었다.
Chưa có bình luận nào. Hãy là người đầu tiê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