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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 없는 전쟁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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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 촛대 장식 뒤편에 숨겨진 도청 아티팩트를 향해 가짜 정보를 흘려보낸 진혁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억지로 성대에 마력을 집중해 연기한 탓에 목구멍 깊은 곳에서 비릿한 피맛이 울컥 솟구쳤다. 그는 차가운 실크 손수건으로 입가를 묵묵히 닦아냈다.


오른쪽 눈은 미세혈관이 파열되어 피눈물을 흘린 것처럼 붉게 충혈되어 있었고, 오른손 검지는 힘줄이 마비되어 감각이 없었다. 그야말로 껍데기만 남은 대공의 육체였다. 하지만 진혁의 머릿속은 그 어느 때보다 차갑고 명석하게 회전하고 있었다.


“전하, 의복을 준비했사옵니다.”


요한이 정갈하게 다듬어진 검은색 대공 제복을 받쳐 들고 다가왔다. 목덜미의 고문 흔적과 찢어진 신경의 통증을 감추기 위해 깃이 높은 형태였다. 진혁은 요한의 도움을 받아 제복을 걸치고, 붉게 물든 오른쪽 눈을 가리기 위해 왼쪽 눈에만 ‘진실의 눈 모노클’을 깊게 눌러썼다.


서재 문이 열리자, 그곳에는 휠체어에 앉아 차가운 시선으로 자신을 기다리던 엘리시아 브리안이 있었다. 은발을 단정하게 빗어 넘긴 그녀는 자줏빛 눈동자로 진혁의 초라한 오른손과 충혈된 눈을 훑어보았다.


“실패하면 제 손으로 당신의 심장에 얼음 가시를 박아넣겠다고 했을 텐데요, 아버님.”


그녀의 목소리는 얼음 조각처럼 서늘했으나, 그 안에는 가문의 멸문을 막고자 하는 필사적인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진혁은 비틀려 올라가는 입꼬리를 숨기지 않은 채, 왼손으로 그녀의 휠체어 손잡이를 가볍게 잡았다.


“걱정 마라, 내 딸아. 협상 테이블에서 내가 피를 흘리는 일은 없다. 진짜 전쟁이 어떤 것인지 똑똑히 보여주지.”


* *


브리안성 대연회장의 문이 열리자, 화려하고도 숨 막히는 열기가 진혁의 전신을 감싸 안았다.


천장에 매달린 수십 개의 크리스탈 샹들리에가 황금빛 불꽃을 내뿜으며 백색 대리석 바닥을 눈부시게 비추고 있었다. 은반지 위에는 잘 구워진 멧돼지 고기와 붉은 포도주가 가득한 크리스탈 잔들이 즐비했다. 그러나 그 화려함 이면에는 썩은 고기를 노리는 하이에나들의 음산한 웅성거림이 가득했다.


“대공 전하께서 입장하십니다!”


시종의 외침과 함께 연회장의 모든 시선이 진혁에게 쏠렸다. 웅성거리던 가신들의 목소리가 순식간에 잦아들며 팽팽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연회장 중앙, 가장 거대하고 사치스러운 자리에 숙부 바론 프란츠 브리안이 앉아 있었다. 기름진 금발을 뒤로 넘기고 황실 사교계의 유행을 따른 붉은 벨벳 코트를 걸친 그는, 간사한 콧수염 아래로 비열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옆에는 사치스러운 코트를 입고 신경질적인 눈빛을 빛내는 배신자 가스톤 자작이 버티고 서 있었다.


진혁은 왼손으로 엘리시아의 휠체어를 밀며 천천히 상석을 향해 걸어갔다. 힘없이 늘어진 오른팔은 제복 주머니에 은밀히 찔러 넣은 상태였다.


‘콜드 리딩 프로파일링(Cold Reading Profiling) 가동.’


진혁의 왼쪽 눈에 장착된 모노클이 미세하게 공명하며 연회장에 모인 중소 영주들의 표정과 신체 반응을 실시간으로 분석해 뇌리로 전송했다.


[대상: 웰러 자작 - 손가락을 초조하게 교차함. 최근 도박 채무 수치 80% 상승.]

[대상: 크로이츠 남작 - 시선을 회피하며 포도주 잔을 강하게 쥠. 죄책감 수치 매우 높음.]

[대상: 가스톤 자작 - 품 안의 마도 통신기를 수시로 확인 중. 결계 해제 코드 전송 대기 상태.]


‘과연 그렇군. 프란츠에게 선동당한 영주들은 각자의 약점과 탐욕에 묶여 있다. 저들의 연대는 단단해 보이지만, 실상은 아주 작은 균열만으로도 스스로 무너질 모래성에 불과해.’


진혁이 상석에 앉기도 전에, 프란츠가 잔을 내려놓으며 오만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오, 살아 돌아오신 우리 대공 전하! 사형대 위에서 기억을 잃으셨다는 소문이 영지 전체에 파다하더니, 과연 몰골이 말이 아니시군 그래.”


프란츠의 조롱 섞인 외침에 가스톤 자작과 친황실파 귀족들이 나직하게 낄낄거렸다. 프란츠는 기세를 몰아 품 안에서 정교하게 양장된 가죽 서류철을 꺼내 테이블 위에 내던졌다. 쿵 하는 둔탁한 소리가 연회장에 울려 퍼졌다.


“반역죄로 가문을 멸문지화의 위기로 몰아넣은 미치광이 가주를 더는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이 우리 가신들의 공통된 의견이오. 여기 가문 이사회의 결의서(가문 이사회 결의서)를 준비했으니 서명하시오, 칼릭스.”


그것은 영지 자치권의 60%를 황실과 방계 가문들에 강제 양도한다는, 가문을 찬탈하기 위한 사법적 덫이었다.


엘리시아의 자줏빛 눈동자가 분노로 파르르 떨렸다. 그녀의 손끝에서 미세한 서리 마력이 피어오르려 하자, 진혁은 왼손을 뻗어 그녀의 어깨를 지시하듯 나직하게 눌렀. 그리고는 일부러 약한 모습을 연출하기 위해 손수건을 입에 대고 거칠게 기침을 토해냈다.


“콜록! 쿨럭…….”


창백한 입술 사이로 붉은 혈흔이 묻어 나오자, 프란츠와 가스톤의 눈빛에 확실한 승리의 도취감이 스쳐 지나갔.


“이사회 결의서라…….”


진혁은 힘없는 목소리로 서류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는 ‘정보 통제 전술’을 가동하여, 가신들의 탐욕을 묶어주고 있는 가장 핵심적인 연결고리를 정조준했다.


“프란츠 숙부. 그리고 여기 모인 영주들이 이 결의서에 동조한 이유는 단 하나겠지. 황실이 약속한 ‘북부 영지 세금 10개년 면제’ 조항 때문이 아닌가?”


영주들의 동공이 일제히 흔들렸다. 자신들의 은밀한 이해관계가 단숨에 폭로되자 연회장에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진혁은 서류를 툭 내려놓으며 모노클 너머로 웰러 자작을 쳐다보았다.


“웰러 자작. 자네는 황실이 세금을 면제해 주면 영지의 도박 채무를 청산할 수 있을 거라 믿었겠지. 크로이츠 남작, 자네 역시 황실의 비호 아래 무역로를 독점할 단꿈에 젖어 있을 테고.”


“그, 그것이 무슨 상관이란 말이오! 가문을 망친 반역자 밑에 있느니, 황실의 자비로운 통치 아래 들어가는 것이 영민들을 위한 길이다!”


가스톤 자작이 악을 쓰며 프란츠를 옹호했다. 진혁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


“자비로운 통치라니, 참으로 무식하군. 제국 변경법 제4조 2항을 아는가? ‘황실 사면령에 의해 자치권이 반납된 영토의 사유지는 즉각 황실 국유지로 귀속되며, 현지 영주들은 영구 임대 계약자로 전환된다’고 명시되어 있네.”


진혁의 목소리가 연회장 구석구석을 송곳처럼 파고들었다.


“즉, 자네들이 프란츠의 결의서에 서명하는 순간, 자네들의 영지는 대공가가 아니라 황실의 소유가 되며, 세금 면제는커녕 매년 황실이 제시하는 터무니없는 마력 정석 쿼터를 채우지 못하면 영지 자체를 몰수당하게 된다는 뜻이네. 프란츠는 자네들의 영지를 황실에 제물로 바치고 자신만 백작 작위를 보장받기로 밀약을 맺었으니까.”


“뭐, 뭐라고?!”

“그게 무슨 소리요, 바론 프란츠!”


영주들 사이에서 격렬한 동요가 일어났다. 그들의 머리 위로 의심과 분노의 붉은 실선들이 기괴하게 얽히기 시작했다. 프란츠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게 달아올랐다. 자신의 정교한 사기극이 단 몇 마디의 법리적 해석과 정보 폭로로 인해 뿌리째 흔들리고 있었다.


“이, 이 미치광이 반역자 놈이 감히 어디서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거냐!”


프란츠가 이성을 잃고 테이블을 걷어차며 진혁의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의 3성급 마력이 거칠게 뿜어져 나와 연회장의 촛불들을 거세게 흔들었다.


그는 진혁의 멱살을 잡으려는 듯, 쇠약해진 칼릭스의 오른쪽 어깨를 거칠게 움켜쥐었다. 뼈가 으스러지는 듯한 통증이 진혁의 전신을 강타했다. 오른손가락은 마비되어 그의 손을 쳐낼 수조차 없었다.


연회장의 기사들이 검자루에 손을 올리고, 엘리시아의 주변에 차가운 성에가 끼기 시작하는 일촉즉발의 위기.


그러나 진혁은 단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피눈물처럼 붉은 오른쪽 눈으로 프란츠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리고는 멱살을 잡힌 채, 프란츠의 귓가로 고개를 아주 미세하게 숙였다.


진혁의 나직하고 차가운 음성이 프란츠의 귓가를 뚫고 뇌리에 직접 박혀 들어갔다.


“레오폴디아 중앙 은행, 계좌 번호 774-09. 예금주 바론 프란츠 브리안. 잔액 150,000골드.”


프란츠의 전신이 돌처럼 굳어졌다. 그가 쥐고 있던 진혁의 어깨 손아귀에서 스르륵 힘이 빠져나갔다.


“황태자 직속 특별 심문소에서 자네의 비밀 계좌로 송금된 뇌물의 일련번호를…… 이 자리에서 대공가 가신들 앞에 전부 읊어줄까, 숙부?”


프란츠의 눈동자가 극도의 공포와 경악으로 무참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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