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둥지
성문이 무겁게 닫히고 배신자들의 그림자가 완전히 멀어지자, 대공성 내부를 지배하던 팽팽한 긴장감이 일순간 가라앉았다. 그러나 그것은 평화가 아니었다. 폭풍이 몰아치기 직전, 바다 한가운데에 찾아오는 기괴하고 고요한 진공 상태에 가까웠다.
진혁은 마차에서 내려 요한의 부축을 받으며 대공 집무실로 향했다. 한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목구멍 안쪽에서 비릿한 피맛이 울컥 솟구쳤다. 아까 광장에서 숙부 프란츠와 가신들을 제압하기 위해 성대에 억지로 마력을 집중해 ‘위압의 메아리’를 가동한 반동이었다. 후두 신경이 갈가리 찢어지는 듯한 통증이 척추를 타고 흘렀지만, 진혁은 입가에 고인 핏자국을 실크 손수건으로 조용히 훔쳐내며 포커페이스를 유지했다.
오른쪽 눈은 미세혈관이 완전히 파열되어 피눈물을 흘린 것처럼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게다가 고문 약물의 여파로 단전의 마력은 굳게 닫혀 있었고, 진짜 칼릭스의 오래된 부상인 오른손 검지 힘줄 마비 때문에 오른손은 손가락 하나 제대로 까딱할 수 없었다. 육체적 상태는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오직 현대에서 단련된 냉철한 위기 협상가로서의 이성만이 그의 부서져 가는 정신을 단단히 붙잡고 있었다.
“전하, 몸 상태가 심상치 않사옵니다. 즉시 의관을 불러…….”
요한이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의 늙은 얼굴에는 주군을 향한 깊은 염려와 충성심이 가득했다.
“그럴 시간은 없네, 요한.”
진혁은 차가운 목소리로 요한의 말을 잘랐. 목소리는 여전히 낮고 단호했다.
“오늘 밤 연회에서 프란츠와 가스톤 자작이 무슨 음모를 꾸밀지 모르네. 그전에 이 성 내부의 보이지 않는 눈과 귀를 치워야 해. 피터를 집무실로 부르게.”
대공 집무실은 웅장하면서도 쓸쓸했다. 높은 천장에는 거미줄이 드리워져 있었고, 거 거대한 서재에는 먼지 쌓인 가문의 고서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잠시 후, 단정한 회색 정장에 둥근 안경을 쓴 차석 집사 피터가 숨을 몰아쉬며 집무실로 들어섰다. 피터는 요한이 요새에 가 있는 동안 성 내부의 살림과 가신들의 움직임을 감시해 온 영민한 행정 참모였다.
“대공 전하를 뵈옵니다.”
피터가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그의 품에는 두꺼운 재정 장부들이 안겨 있었다.
“피터, 인사할 여유가 없군. 즉시 보고하게.”
진혁이 책상 뒤의 거대한 가죽 의자에 몸을 깊숙이 묻으며 말했다. 왼손으로 책상을 짚은 채, 핏빛으로 물든 오른쪽 눈을 가늘게 뜨고 피터를 응시했다.
“예, 전하. 요한 선배님이 요새에 계시는 동안, 성 내부의 재정 장부에서 미세한 수치 조작 정황이 포착되었습니다. 특히 주방과 안뜰 관리용으로 지출된 청색 정석의 소비량이 비정상적으로 급증했습니다. 또한, 프란츠 숙부님의 가신들이 밤마다 성의 서쪽 화랑 근처에서 은밀히 회동했다는 하급 하녀들의 밀담을 확보했습니다. 성 내부에 황실 정보부의 세작이 깊숙이 침투해 있는 것이 확실합니다.”
피터의 보고는 정확하고 군더더기가 없었다. 진혁은 머릿속의 프로파일러 공식을 가동했다.
‘재정 장부의 유출과 청색 정석의 비정상적 소모. 그리고 가신들의 밀담. 이것은 단순한 횡령이 아니다. 성 내부의 마법 도청 장치나 결계 감시 아티팩트를 가동하기 위해 고순도 마력을 지속적으로 공급하고 있다는 증거다. 유출 경로는 이 집무실 내부일 가능성이 가장 크다.’
진혁은 왼손을 들어 손가락에 끼워진 검은 날개 문양의 ‘블랙 페더 암호 해독반’ 반지를 가볍게 만지작거렸다. 전대 대공 칼릭스가 정보원들과의 완벽한 보안을 위해 제작한 마력 반지였다. 진혁은 반지에 미세한 마력을 주입하며, 머릿속으로 현대의 수학적 비대칭 키 암호화 알고리즘을 이식한 ‘정보망 암호 규칙’을 떠올렸다.
지잉.
반지가 미세하게 반응하며, 최근 성 내부에서 발송된 은밀한 마력 파동의 궤적을 뇌리에 시각화하여 보여주었다. 예상대로였다. 파동의 진원지는 바로 이 대공 집무실 내부, 정확히는 벽면의 촛대 장식 부근이었다.
“피터, 훌륭한 보고였네. 주방과 가사 노동자들의 동선을 완벽히 장악해야 하네. 하녀장 마르타를 이리로 부르게.”
피터가 물러가고, 잠시 후 정갈한 검은색 하녀장 드레스를 입고 허리에 묵직한 열쇠 꾸러미를 찬 마르타가 들어섰다. 50대의 엄격하고 강직한 인상을 가진 그녀는 대공가 내부의 기강을 잡는 살아있는 보안관이었다.
“하녀장 마르타, 전하의 부름을 받잡니다.”
“마르타, 지금 이 성 내부에 황실의 쥐새끼들이 돌아다니고 있네.”
진혁은 모노클을 착용한 왼쪽 눈으로 마르타의 미세한 표정 변화를 관찰했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충성심과 깊은 분노가 서려 있었다.
“오늘 밤 연회가 시작되기 전까지, 가사 노동자들과 하녀들의 근무 교대 시간과 청소 동선을 완전히 재배치하게. 특히 내 집무실과 소가주 엘리시아의 침소 주변에는 오직 자네가 직접 선별한, 3대 이상 가문에 헌신한 하녀들만 배치해야 하네. 외부 장교나 방계 귀족들과 사적으로 서신을 주고받은 흔적이 있는 자들은 즉각 격리하고 지하 감옥으로 압송하게. 군법 위반 혐의로 즉결 처분할 준비를 해두게.”
“명령대로 거행하겠습니다, 전하. 쥐새끼들의 목줄을 소리 없이 끊어놓겠습니다.”
마르타가 단호하게 대답하며 허리를 숙였다. 그녀의 열쇠 꾸러미가 덜컹거리는 소리가 집무실의 무거운 정적을 깨뜨렸다. 그녀가 물러가자, 방 안에는 오직 진혁과 요한 둘만이 남았다.
진혁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른손 힘줄 마비로 인해 힘없이 늘어진 오른팔을 왼손으로 감싸 안은 채, 벽면에 설치된 거대한 청동 촛대 장식 앞으로 다가갔. 촛불의 붉은 불꽃이 흔들리며 진혁의 창백한 얼굴에 음산한 음영을 만들어냈다.
그는 모노클을 쥔 채 촛대 뒤편의 미세한 틈새를 들여다보았다. 아주 미세한 마력 진동. 황실 정보부가 사용하는 고위 감청 아티팩트인 ‘마법 도청기’가 숨겨져 있었다.
요한이 기겁하며 손을 뻗었다.
“전하! 즉시 파괴하겠옵니다!”
“멈추게, 요한.”
진혁이 왼손을 들어 요한의 움직임을 제지했다. 그의 입꼬리가 가늘게 호선을 그리며 비틀려 올라갔다. 피눈물처럼 붉은 오른쪽 눈과 대조되는 차가운 기만의 미소였다.
“이것을 파괴하면 황실 정보부는 즉각 자신들의 세작이 들통났음을 눈치채고 더 은밀한 수하를 보내올 걸세. 협상가는 적이 파놓은 함정을 발견했을 때 그것을 메우지 않네. 역으로 그 구멍 속으로 적들이 스스로 걸어 들어오도록 가짜 이정표를 세울 뿐이지.”
진혁은 도청 장치가 숨겨진 촛대 장식 바로 앞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요한을 향해 눈짓을 보냈다. 요한은 즉각 주군의 의도를 간파하고 침묵을 지켰다.
진혁은 목소리에 미세한 마도 울림을 실어, 외부의 감청자에게는 마치 은밀한 밀담을 나누는 것처럼 들리도록 아주 나직하고 떨리는 어조로 연기를 시작했다.
“요한…… 황실이 필사적으로 찾고 있는 가문의 비밀 문서와 일급 기밀의 단서들 말일세.”
그는 일부러 침을 꿀컥 삼키며 초조한 숨결을 연출했다.
“그것들은 성 내부가 아니라…… 카스텔 요새 뒤편의 ‘통곡의 절벽’ 중간에 숨겨진 비밀 동굴에 보관되어 있네. 오늘 밤 연회가 끝나면, 알란 감찰관의 눈을 피해 카이를 그곳으로 비밀리에 급파하여 수색하게 만들게. 절대로 황실 기사단에게 들켜서는 안 되네.”
진혁의 나직하고 떨리는 거짓 음성이 촛대 뒤편의 도청 장치를 타고 황실 스파이 길버트의 수신기로 흘러 들어갔다. 완벽한 역정보 함정이 설계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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