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한 거인의 성
“당신, 대체 누구야?”
엘리시아의 목소리는 마차 안의 공기를 순식간에 영하로 끌어내렸다. 그녀의 자줏빛 눈동자에는 아버지를 향한 증오나 슬픔 따위는 남아있지 않았다. 오직 눈앞의 거대한 기만을 포착한 사냥꾼의 잔혹한 확신만이 서려 있을 뿐이었다.
진혁은 가만히 자신의 오른손을 내려다보았다. 손가락 사이에 끼워져 있던 나무 펜대가 멈춰 있었다. 현대 시절, 수많은 위기 협상 테이블에서 피를 말리는 긴장을 해소하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하던 펜 돌리기 습관. 그것이 진짜 칼릭스의 치명적인 신체적 제약—10년 전 대전투에서 오른손 검지와 중지의 힘줄이 끊어져 왼손잡이로 살아왔다는 사실—과 정면으로 충돌해 버린 것이다.
오른손 힘줄 파열. 요한에게서조차 듣지 못했던 진짜 칼릭스의 신체적 비밀이었다. 치명적인 정보 공백이 정체 탄로라는 파국을 불러왔다.
진혁의 머릿속에서 경보가 요란하게 울렸다. 단전의 마력은 고문 약물로 인해 완전히 잠겨 있었고, 우측 안구는 정신 장벽을 과도하게 가동한 여파로 미세혈관이 터져 피눈물처럼 붉게 물들어 있었다. 무력으로는 4성 빙결 마법사인 엘리시아를 이 마차 안에서 제압할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진혁은 포커페이스를 잃지 않았다. 그는 현대 최고의 위기 협상가였다. 협상 테이블에서 가장 위험한 순간은 정체가 탄로 났을 때가 아니라, 정체가 탄로 났음에도 어설픈 거짓말로 상대를 기만하려 할 때다. 상대가 완벽한 패를 쥐고 흔들 때는, 그 패를 인정하되 판 전체의 이해관계를 뒤흔드는 ‘벼랑 끝 전술’이 유일한 해결책이었다.
진혁은 천천히 펜대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왼손으로 오른쪽 눈을 가린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피눈물처럼 충혈된 우측 안구로 엘리시아를 정면으로 마주했다.
“그렇다. 나는 네가 알던 칼릭스 브리안이 아니다.”
직설적이고 담대한 고백에 엘리시아의 동공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녀는 가죽 수첩을 쥔 손가락에 힘을 주며 뒤로 물러섰다.
“진짜 칼릭스 브리안은 황실 특별 심문소의 고문 마법에 영혼이 갈가리 찢겨 소멸했다. 나는 그가 가문을 살리기 위해 영혼의 계약을 통해 이 세계로 불러들인 ‘대역’이자 대리인이다.”
진혁은 목구멍 안쪽에서 역류하는 비릿한 피맛을 삼키며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그의 목소리에는 흔들림 없는 이성이 깃들어 있었다.
“이제 선택해라, 엘리시아. 내가 가짜라는 사실을 이 마차가 멈추는 순간 가신들 앞에 폭로하겠느냐? 그렇다면 기다리는 것은 아주 간단한 파멸이다. 진짜 칼릭스가 사라졌고, 대역마저 이단으로 몰려 처형당한다면, 브리안 가문은 오늘 밤이 지나기 전에 황실의 손에 갈가리 찢겨 멸문당할 것이다. 네 숙부 프란츠가 가문을 통째로 황실에 바치기 위해 성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으니까.”
“당신…….”
“나는 진짜 가주가 되려는 것이 아니다. 단지 계약에 따라 가문을 구원하고 내 목숨을 보존하려는 협상가일 뿐이다. 내가 황실의 칼날을 막아내는 완벽한 방패가 되어 주마. 그러니 엘리시아, 네가 내 왼손이 되어라.”
엘리시아의 자줏빛 눈동자가 극심한 정서적 혼란으로 요동쳤다. 그녀의 머릿속 계산기가 빠르게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가짜 가주를 폭로해 가문을 즉각 멸망으로 이끌 것인가, 아니면 이 유능하고 냉철한 이방인을 가주의 대역으로 삼아 가문을 보존할 것인가. 극도로 이성적이고 차가운 그녀의 성정은 결국 실리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오늘 밤 연회까지 지켜보겠어요.”
엘리시아가 떨리는 손으로 검은 가죽 수첩을 품에 넣으며 차갑게 속삭였다.
“만약 가신들의 칼날을 막아내지 못하고 가문의 명예를 실추시킨다면, 그 즉시 내 손으로 당신의 가슴에 얼음 가시를 박아넣을 테니까.”
“현명한 거래로군.”
진혁은 속으로 긴 한숨을 내쉬었다. 위태로운 임시 동맹 서약이 맺어지는 순간, 마차가 덜컹거리며 멈춰 섰다.
창밖으로 브리안 가문의 본거지, 브리안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늘을 찌를 듯 솟아오른 검은 돌벽과 삼엄하게 우거진 침엽수림. 지독한 북부의 칼바람이 성벽을 때리며 윙윙거리는 소리가 마치 몰락한 거인의 울음소리 같았다. 성문 앞은 이미 비정상적인 긴장감으로 얼어붙어 있었다.
“대공 전하의 마차가 도착했다!”
성문을 지키던 사병들의 외침과 함께, 마차 문이 열렸다. 요한이 굳은 표정으로 진혁을 부축했다. 요한의 눈빛은 이미 성문 앞의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경고하고 있었다.
성문 앞 광장에는 수십 명의 무장 사병들이 주인공의 마차를 위협적인 반원형 진형으로 포위하듯 늘어서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기름진 금발에 사치스러운 귀족 제복을 입은 사내가 서 있었다. 칼릭스가 감옥에 갇힌 사이 가주 자리를 찬탈하려 황실과 결탁한 숙부, 바론 프란츠 브리안이었다.
그의 곁에는 대공가의 차석 가신이자 은밀한 배신자인 가스톤 자작이 붉은 벨벳 코트를 걸친 채 비열한 미소를 지으며 서 있었다.
“이게 누구신가. 황실의 단두대 위에서 목이 잘려 나갔어야 할 반역자 숙부님이 용케 살아 돌아오셨군.”
프란츠가 오만한 걸음걸이로 다가와 진혁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의 손에는 두꺼운 양장 문서가 들려 있었다.
“기억을 잃은 미치광이 대공은 더 이상 영지를 다스릴 자격이 없다. 가문 이사회의 결의에 따라, 영지 자치권의 60%를 황실과 방계 가문들에 즉각 양도한다는 서류다. 여기에 가주의 피와 인장을 찍어라. 그렇지 않으면, 이 성의 문은 열리지 않을 것이다.”
프란츠의 사병들이 일제히 무기를 고쳐 잡으며 위협적인 마력 파동을 뿜어냈다. 가스톤 자작은 프란츠의 뒤에서 비열하게 웃으며 주인공의 반응을 살폈다. 그들은 기억을 잃고 쇠약해진 칼릭스가 순순히 서명하거나, 미치광이처럼 날뛰다 사병들의 칼에 맞아 죽기를 바라고 있었다.
진혁은 왼손으로 마차 문을 짚은 채 그들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단전의 마력은 여전히 봉인되어 있었고, 오른손 검지는 힘줄이 끊어져 감각이 없었다. 무력으로 부딪치면 0.1초 만에 참수당할 판이었다.
‘가주로서의 법적 권한을 주장해 보았자, 황실과 결탁한 이 배신자들은 제국의 처형 유예 상태를 빌미로 법을 무시할 것이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뿐이다.’
진혁은 성대에 미세하게 남아있는 마력의 흔적을 쥐어짜기 시작했다. 전대 대공 칼릭스가 전장에서 뿜어내던 군주의 위압감을 성대의 진동으로 모방하는 기술, ‘위압의 메아리’였다.
성대에 억지로 마력을 집중하자 목구멍 안쪽이 찢어지는 듯한 내상과 함께 뜨거운 피가 역류했지만, 진혁은 그것을 억지로 삼키며 입을 열었다.
“바론 프란츠 브리안.”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목소리는 평범한 인간의 음성이 아니었다.
기묘한 울림과 함께 사방의 공기가 순간적으로 극저온으로 얼어붙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는, 소름 끼치도록 차갑고 웅장한 목소리였다. 목소리에 실린 기세가 광장 전체를 무겁게 짓눌렀다. 전성기 시절 8성 대마도사였던 칼릭스 브리안의 살기가 형상화되어 사방으로 뿜어져 나가는 듯했다.
“……윽!”
프란츠는 자신도 모르게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그의 품속에 있던 황실의 ‘정신 차단 펜던트’가 미친 듯이 진동하며 경고를 보냈지만, 영혼 깊숙한 곳에서 밀려오는 근원적인 공포를 막을 수는 없었다. 가스톤 자작 역시 얼굴이 흙빛으로 변하며 비열한 미소를 잃어버렸다.
사병들의 무기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들은 진짜 칼릭스의 절대적인 힘이 부활한 것으로 오판하고 있었다.
진혁은 피눈물처럼 붉게 물든 오른쪽 눈을 가린 머리카락 사이로 프란츠를 차갑게 쏘아보았다. 그리고 왼손을 뻗어 프란츠가 들고 있던 양장 문서를 낚아채듯 빼앗았다.
그는 문서의 서명란 위에 펜을 쥔 채, 서명하는 대신 프란츠와 가신들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그의 창백한 얼굴에는 오만함과 냉혹함이 가득했다.
“이 조잡한 종이쪼가리에 내 피를 묻히라는 말이냐, 프란츠?”
진혁은 펜대를 쥔 손에 힘을 주며, 그들의 영혼을 얼려버릴 듯한 차가운 목소리로 선언했다.
“오늘 밤 연회장에서, 가문의 진짜 주인이 누구인지 보여주지. 그때 서명해도 늦지 않을 터다.”
그 묵직한 카리스마와 살기에 압도당한 프란츠와 가신들은 더 이상 서명을 강요하지 못하고 길을 열 수밖에 없었다. 성문이 무겁게 열리며 침묵이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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