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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차 안의 침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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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텔 요새의 총독 집무실을 가득 채웠던 숨 막히는 긴장은 에드하르트 총독의 펜끝이 종이 위를 거칠게 스치는 소리와 함께 비로소 갈라졌다.


황실의 붉은 인장이 찍힌 ‘황실 특별 사면 유예장’이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에드하르트는 패배감과 분노로 일그러진 얼굴로 진혁을 노려보았지만, 진혁은 한 치의 흐름도 흐트러뜨리지 않은 채 그 문서를 요한에게 넘겼다. 마침내 합법적인 생명줄을 손에 넣은 것이다.


하지만 승리의 달콤함은 찰나에 불과했다.


요새 외곽으로 통하는 무거운 철문이 열리고, 대공가의 문양이 새겨진 검은 마차가 대기하고 있는 연무장으로 걸어 나가는 동안 진혁의 몸은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단전의 마력을 강제로 잠그는 고문용 마력 억제제의 차가운 기운이 여전히 혈관을 타고 흐르는 데다, 마력 사슬을 강제로 해제한 반동으로 성대 근처의 후두 신경이 찢어지는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


진혁은 소매 안에서 손수건을 꺼내 입가에 고인 검붉은 피를 소리 없이 닦아냈다. 오른쪽 눈은 오벨리아의 환술을 마음의 방으로 방어해 낸 과부하로 인해 미세혈관이 완전히 파열되어 피눈물을 흘린 것처럼 붉게 물들어 있었다. 은발의 긴 머리카락을 오른쪽 뺨으로 길게 늘어뜨려 상처를 가렸지만, 욱신거리는 편두통까지 지울 수는 없었다.


“전하, 마차가 준비되었습니다.”


요한이 마차 문을 열며 속삭였다. 그의 눈호위에는 깊은 우려가 담겨 있었다. 진혁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마차 안으로 몸을 실었다.


마차 문이 닫히는 순간, 진혁은 등에 소름이 돋는 듯한 차가운 시선을 느꼈다.


넓은 마차 내부의 맞은편 좌석, 은빛 조각 같은 차가운 미모를 가진 젊은 여성이 앉아 있었다. 은발에 선명한 자줏빛 눈동자를 지닌 대공가의 소가주 대행, 엘리시아 브리안이었다. 그녀는 다리가 마비된 채 휠체어 대신 마차의 고급 가죽 시트에 몸을 기대고 있었지만, 그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만큼은 4성급 빙결 마법사답게 서슬 퍼런 칼날 같았다.


달그락, 달그락.


마차가 요새의 거친 돌바닥을 지나 북부 영지를 향해 출발했다. 바퀴가 구르는 소리만이 밀폐된 마차 안의 침묵을 채웠다.


진혁은 왼손으로 턱을 괸 채 창밖을 바라보는 척했지만, 이미 그의 감각은 극도로 날카로워져 있었다. 맞은편에 앉은 엘리시아는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진혁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고 있었다. 진혁은 조용히 자신의 고유 스킬인 ‘눈동자 프로파일러’를 가동했다.


그의 시야가 미세하게 슬로우 모션으로 전환되며, 엘리시아의 얼굴 위로 반투명한 푸른빛 분석 데이터가 떠올랐.


[대상: 엘리시아 브리안]

[의심 및 경계 수치: 94% (극도로 위험)]

[호흡 주기: 1.1초 (극도의 긴장 상태)]

[특이사항: 품속의 검은 가죽 수첩에 손가락을 대고 있음. 피심문자의 미세한 모순점을 기록하려는 의도 확인.]


‘엘리시아. 나를 칼릭스가 아닌 다른 존재로 의심하고 있군. 요새에서 보여준 내 법리적 대처와 말투가 전대의 미치광이 대공과는 너무나 달랐기 때문이겠지.’


현대의 위기 협상가 시절, 진혁은 수많은 위장 용의자들을 심문해 보았다. 그들은 정체를 숨기기 위해 완벽한 연기를 펼치지만, 가장 가까운 가족의 일상적인 질문이라는 ‘심리적 덫’ 앞에서는 결국 꼬리를 밟히기 마련이다. 엘리시아는 지금 자신에게 그 덫을 놓기 위해 독을 품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기억을 잃으셨다는 핑계가 참 편리하게 쓰이더군요, 아버님.”


침묵을 깨고 엘리시아의 차가운 목소리가 마차 안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그녀의 자줏빛 눈동자가 진혁의 얼굴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단두대 위에서 제국 헌법을 읊조리며 목숨을 구걸하고, 총독의 약점을 잡아 사면 유예장까지 뜯어내다니. 제가 알던 오만하고 무식하던 아버님이 하루아침에 영리한 협상가라도 되신 것 같아 낯설기만 합니다.”


진혁은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창밖에서 시선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왼쪽 눈에 걸쳐진 ‘진실의 눈 모노클’이 미세하게 공명하며 엘리시아의 마력 흐름을 읽어냈다.


“단두대 칼날 아래 목을 밀어 넣어본 적이 없다면 내 변화를 논하지 마라, 엘리시아.”


진혁은 칼릭스의 차갑고 오만한 성격을 모방해 목소리를 낮추었다. 성대 통증으로 인해 목구멍 안쪽에서 비릿한 피맛이 났지만, 어조는 한없이 단호했다.


“죽음의 공포는 인간의 뇌를 가장 극단적인 방식으로 재조합하지. 내가 살아남기 위해 제국법을 외우고 총독의 멱살을 잡은 것이 그리도 이상하더냐? 아니면, 내가 차라리 그곳에서 목이 잘려 가문이 멸문당하기를 바랐던 것이냐?”


엘리시아의 동공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하지만 그녀는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그녀는 품 안에서 작은 은빛 귀걸이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녀의 귀에 걸려 있는 ‘겨울눈물 귀걸이’와 쌍을 이루는, 차가운 장미 문양이 정교하게 세공된 귀걸이였다.


“어머니의 기일이 얼마 남지 않았어요.”


엘리시아가 귀걸이를 진혁의 눈앞에 들이밀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아버님은 늘 어머니의 기일이 되면, 남쪽 국경의 절벽에만 피는 ‘붉은 설화’를 직접 꺾어 어머니의 무덤에 바치겠다고 약속하셨죠. 그 약속을 위해 가문의 수호 결계 제어권을 제게 잠시 넘겨주기까지 하셨고요. 기억하시나요? 이번 기일에도 그 약속을 지키실 건가요?”


진혁의 뇌리 속에 경보가 울렸다.


동시에 모노클 너머로 엘리시아의 어깨 주위에서 피어오르는 미세한 붉은색 마력 아지랑이가 시각화되었다. ‘거짓의 잔영’ 스킬이 그녀의 질문 속에 도사린 악의적인 기만을 포착한 것이다.


[감지: 대상의 발화에 붉은색 거짓의 잔영 발생. 98% 확률로 유도성 가짜 시나리오.]


‘유도 심문이다. 요한에게 들은 정보에 따르면 대공비 레노어는 남쪽이 아닌 북부의 묘역에 묻혀 있으며, 칼릭스는 평생 아내의 무덤 근처에는 가지도 않았다. 게다가 가문의 수호 결계 제어권은 대공가의 가주만이 쥘 수 있는 절대적인 권한. 칼릭스가 그것을 딸에게 잠시라도 넘겼을 리가 없다.’


질문에 정답을 내놓으려 하는 순간, 상대가 파놓은 맹점에 걸려들게 된다. 협상론에서 상대의 유도 질문을 무력화하는 가장 완벽한 방법은, 질문의 전제 자체를 부정하고 상대의 도덕적 결함이나 모순을 역으로 저격하는 것이었다.


진혁은 코웃음을 치며 의자 뒤로 몸을 깊숙이 묻었다. 그의 붉게 충혈된 오른쪽 눈을 가린 머리카락 사이로 차가운 살기가 흘러나왔다.


“조잡한 연극이군, 엘리시아.”


진혁의 나직한 꾸짖음에 엘리시아의 호흡이 순간적으로 멎었다.


“내 기억상실을 시험하기 위해 죽은 네 어머니의 이름까지 파는구나. 레노어는 차가운 북부의 대지에 묻혀 있고, 나는 그녀의 무덤에 단 한 번도 꽃을 바친 적이 없다. 또한, 브리안 가문의 수호 결계는 오직 가주의 피와 인장 반지로만 제어되는 법. 내가 그것을 네게 넘겼을 리가 없지. 가짜 약속을 진짜처럼 꾸며 아비를 기만하려 들다니, 참으로 가상한 불효로구나.”


엘리시아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하게 질렸다. 그녀의 손가락이 들고 있던 은빛 귀걸이를 움켜쥐며 미세하게 떨렸다. 동공 지진 수치가 85%까지 치솟는 것이 모노클을 통해 선명하게 보였다. 질문 자체가 완벽한 함정이었음을 역으로 간파당하자, 그녀의 심리 장벽이 일시적으로 무너져 내린 것이다.


“……아버님.”


엘리시아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자줏빛 눈동자에는 당혹감과 함께, 아버지가 진짜 칼릭스가 맞을지도 모른다는 기묘한 혼란이 서려 있었다. 진혁은 차가운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내쉬는 숨에 섞여 나오는 뜨거운 피맛을 억지로 삼켰. 미세한 마력을 계속 운용해 기세를 연출한 대가로 단전에서 뿜어지는 오한과 신경 마비 통증이 전신을 엄습했지만, 그는 겉으로 추호의 흔들림도 보이지 않았다.


마차는 무거운 침묵 속에서 국경선 산맥의 험준한 협곡 도로를 달렸다. 요새의 삼엄한 경계구역을 벗어나 마침내 대공가 영지의 경계를 나타내는 거대한 석조 관문이 창밖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진혁은 긴장이 풀리며 자신도 모르게 오른손가락을 움직였다.


탁, 탁, 탁.


그는 책상 위에서 만년필을 돌리던 현대 시절의 오랜 습관대로, 마차 시트 옆에 놓여 있던 작은 나무 펜대를 오른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정교하고 빠르게 돌리기 시작했다. 고도의 심리전을 끝마친 협상가 강진혁의 무의식적인 스트레스 해소 동작이었다.


그 순간, 창밖을 보던 엘리시아의 시선이 번개처럼 진혁의 오른손으로 향했다.


그녀의 자줏빛 눈동자가 무섭도록 차갑게 가라앉으며, 동공이 극도로 수축했다. 엘리시아는 천천히 상체를 앞으로 숙여 진혁의 오른손을 뚫어지게 주시했다. 마차 안의 온도가 순식간에 영하로 떨어지는 듯한 혹독한 한기가 몰아쳤다.


진혁은 뒤늦게 이상함을 감지하고 펜대를 멈추었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아버지는 오른손잡이가 아니었어요.”


엘리시아의 목소리가 귓가를 스치는 서리 바람처럼 낮고 서늘하게 울렸다.


“칼릭스 브리안 대공은 10년 전 황실 기사단과의 대전투에서 오른손 검지와 중지의 힘줄이 완전히 끊어졌죠. 펜을 쥐는 것조차 왼손으로만 하던 분이었어요. 오른손가락을 그렇게 정교하게 놀리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해요.”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진혁의 왼쪽 눈에 걸쳐진 모노클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 눈빛에는 가문에 대한 책임감도, 아버지를 향한 증오도 아닌, 오직 눈앞의 거대한 기만을 포착한 사냥꾼의 잔혹한 확신만이 서려 있었다.


“당신, 대체 누구야?”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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