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랑 끝의 체스판
카스텔 요새의 일곱 번째 아침은 유독 시린 서리를 품고 찾아왔다. 사형 집행 유예의 마지막 날. 독방의 창살 틈새로 스며드는 새벽빛은 푸른 마력 불꽃과 뒤엉켜 음산한 보랏빛 그림자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짤랑.
무거운 철문이 아주 미세한 소리만을 내며 열렸다. 들어온 이는 대공가의 수석 집사 요한이었다. 평소 단정함을 목숨처럼 여기던 노신사의 백발은 헝클어져 있었고, 모노클 너머의 눈동자는 극심한 초조함으로 잘게 떨리고 있었다. 그가 진혁의 앞으로 다가와 다급히 무릎을 꿇었다.
“전하, 레이븐에게서 급보가 왔습니다. 총독 에드하르트가 움직였습니다.”
요한의 나직한 목소리가 차가운 바닥을 타고 낮게 깔렸다.
“그자가 황실 감찰단과 비밀리에 독대하여 거래를 마쳤습니다. 오늘 아침, 감찰관 알란의 정예 기사단이 요새 내부로 진입할 예정입니다. 총독이 전하를 압송 마차에 태워 황도로 강제 송환하기로 합의했습니다. 유예 기간이 끝나자마자 우리 대공가를 통째로 황실의 칼날 위에 올려놓겠다는 뜻입니다.”
진혁은 천천히 눈을 떴다. 오른쪽 눈은 오벨리아의 환술을 깨부순 정신적 반동으로 인해 여전히 미세혈관이 파열되어 피눈물을 흘린 듯 붉게 물들어 있었다. 지독한 두통이 관자놀이를 사정없이 지르는 고통 속에서도, 진혁의 머릿속은 차갑다 못해 시리도록 투명해졌다.
‘에드하르트. 결국 사냥개의 본성을 버리지 못했군. 내가 죽으면 자신의 횡령 비리가 폭로된다는 협박을 받았으면서도, 황실이 제시한 새로운 이권과 신분 보장에 흔들린 거다. 혹은 내가 가진 장부의 실체에 의문을 품었거나.’
이것이 위기 협상가로서 진혁이 수없이 겪었던 배신의 메커니즘이었다. 인간의 탐욕은 언제나 더 큰 안전과 이익을 좇아 움직인다. 에드하르트는 황실 감찰단과의 거래를 통해 대공가의 비자금을 가로채고, 자신의 비리를 덮을 더 확실한 면책권을 약속받았을 터였다.
“전하, 이대로 압송 마차에 타시면 황도에 도착하기도 전에 소리 소문 없이 독살당하거나 영혼이 파괴될 것입니다. 기사단을 동원해 요새를 뚫어야 하옵니다!”
요한이 눈물을 머금으며 제안했다. 하지만 진혁은 차갑게 고개를 저었다.
“안 되네, 요한. 지금 우리에게 남은 사병은 고작 수십 명에 불과해. 요새의 정규군 3천 명과 황실 기사단을 상대로 무력을 쓰는 것은 자살행위일 뿐이야. 협상가는 판이 깨졌을 때 칼을 뽑지 않네. 더 치명적인 체스판을 들이밀 뿐이지.”
진혁은 손목과 발목을 옥죄고 있는 ‘마력 억제 쇠사슬’을 내려다보았다. 고문 약물로 인해 마력 회로는 완전히 마비되어 실질적인 무력은 1성 이하의 일반인 상태. 하지만 그에게는 ‘블랙 페더’가 물어다 준 치명적인 패가 있었다.
“요한, 준비해 둔 그것을 꺼내게. 그리고 내 사슬의 자물쇠를 임시로 해제해 주게.”
“하지만 전하, 사슬을 강제로 해제하면 요새 중앙 마탑의 마력 경보가…….”
“경보가 울리기 전에 내가 총독의 집무실에 도착하면 되네. 가세나. 사냥꾼의 멱살을 잡으러.”
요한은 주저하지 않고 소매 안에서 대공가 비전의 미세한 마력 실을 꺼내 자물쇠 내부의 마도 회로를 일시적으로 우회시켰다. 찰칵하는 가벼운 소리와 함께 온몸을 짓누르던 무거운 사슬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온몸의 신경이 타들어 가는 듯한 신경통과 함께 성대에서 검붉은 피가 울컥 솟구쳤지만, 진혁은 손수건으로 입가를 닦아내며 단호하게 일어섰.
그의 오른쪽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고, 창백한 얼굴에는 쇠약함이 가득했으나, 그 기세만큼은 전성기의 대공 칼릭스 브리안 그 자체였다.
* * *
카스텔 요새의 총독 집무실은 삼엄한 긴장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에드하르트 총독은 화려한 금색 견장이 달린 제복을 입은 채, 창밖으로 멀리 보이는 황실 감찰단의 주둔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책상 위에는 황실 감찰관 알란이 서명한 공식 행정 지원서와 주인공의 압송 명령서가 놓여 있었다.
“총독님, 정말로 대공을 황도로 넘기실 생각입니까? 그자가 죽으면 우리 가문의 비리 장부가 황실에 폭로된다고 경고하지 않았습니까?”
부총독이 불안한 목소리로 묻자, 에드하르트는 코웃음을 쳤다.
“그 미치광이 반역자의 허풍에 언제까지 놀아날 셈인가? 일주일 동안 블랙 페더의 흔적은커녕 요새 내부의 쥐새끼 한 마리도 움직이지 못했다. 알란 감찰관이 모든 통신망을 장악하고 있는 이 상황에서 외부로 서류를 송신하는 것은 불가능해. 칼릭스는 그저 단두대 앞에서 살아남기 위해 블러핑을 한 것뿐이다.”
에드하르트는 자신의 허리춤에 찬 마도 권총 ‘레오폴트 스페셜’의 차가운 총신을 매만졌다. 황실이 약속한 차기 재상직의 약속과 가문의 안전 보장 서류가 그의 탐욕을 완벽히 자극하고 있었다.
쾅!
그때, 집무실의 두꺼운 참나무 문이 거칠게 열렸다.
문가에 서 있던 친위대 기사들이 경악하며 즉각 검을 뽑아 들었다. 기사들의 검끝이 향한 곳에는, 쇠사슬도 없이 정갈한 죄수복 차림으로 서 있는 칼릭스 브리안—강진혁이 서 있었다. 그의 등 뒤에는 수석 집사 요한이 묵묵히 그림자처럼 버티고 있었다.
“네놈이 어떻게…… 사슬을 풀고 여기까지 온 거냐!”
에드하르트가 경악하며 소리쳤다. 그의 손이 즉각 레오폴트 스페셜 권총으로 향했다. 기사들이 진혁의 목덜미를 향해 날카로운 검날을 겨누며 그를 위협적인 진형으로 포위했다. 일촉즉발의 위기. 검끝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벌한 검기가 진혁의 뺨을 스쳤다.
하지만 진혁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의 왼쪽 눈에 걸쳐진 ‘진실의 눈 모노클’이 차갑게 빛나며, 집무실 내부 기사들의 마력 흐름과 에드하르트의 미세한 행동을 프로파일링하기 시작했다.
[대상: 에드하르트 폰 카스텔]
[살의 표출 수치: 85%]
[등 뒤의 마력 아지랑이: 검붉은색 폭주 (배신 및 극도의 초조 상태)]
진혁은 기사들의 검끝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밀쳐내며, 에드하르트의 책상 맞은편 의자에 당당하게 걸터앉았다. 무력이 완전히 봉인된 1성의 상태라고는 믿을 수 없는 오만하고 여유로운 태도였다. 방 안의 모든 공기가 그의 차가운 기세 아래 무겁게 가라앉았다.
“총독, 대접이 박하군. 일주일간의 동맹을 맺은 파트너에게 검날부터 들이밀다니.”
“동맹? 네놈은 그저 사형 집행이 유예된 죄수일 뿐이다!”
에드하르트가 권총을 진혁의 이마를 향해 겨누며 이를 갈았다.
“감찰관 알란의 기사단이 이미 요새 내부로 진입했다. 네놈이 아무리 혀를 굴려봤자 오늘 아침 압송 마차에 타는 운명은 바뀌지 않아. 네놈이 말한 그 가짜 장부 따위는 황궁에 도달하지 못한다!”
진혁은 나직하게 웃었다. 목소리에 아주 미세한 마력을 얹어 절대적인 군주의 위압감을 싣는 ‘위압의 메아리’가 성대를 울렸다. 목구멍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과 함께 붉은 피가 입술 사이로 흘러내렸지만, 그의 포커페이스는 흔들리지 않았다.
“내가 가진 패가 블러핑인지 아닌지, 직접 눈으로 확인해 보는 게 어떻겠나?”
진혁은 품 안에서 얇은 가죽 폴더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에드하르트의 책상 위로 툭 던졌다.
가죽 폴더가 미끄러져 에드하르트의 손끝에 닿았다. 에드하르트는 의구심 가득한 눈빛으로 폴더를 열었다. 그 안에는 정교하게 필사된 수십 장의 서류들이 들어 있었다.
서류의 첫 페이지를 읽는 순간, 에드하르트의 동공이 미친 듯이 수축했다. 그의 단단한 어깨가 눈에 띄게 떨리기 시작했다.
“이…… 이것은…….”
그것은 블랙 페더의 침투 요원 스패로우가 목숨을 걸고 빼돌린 ‘황실 자금 횡령 장부’의 필사본이었다. 바르톨로 심문관과 에드하르트 총독이 과거 국경지대의 세금을 조직적으로 횡령하여 황태자 세력의 비밀 비자금으로 상납해 온 상세한 날짜, 금액, 그리고 세탁 채널인 드워프 루크의 서명까지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었다.
“말도 안 돼……! 바르톨로의 개인 금고는 최고위 마법 결계로 봉인되어 있을 텐데, 네놈이 어떻게 이 장부를……!”
에드하르트의 목소리가 보기 흉하게 갈라졌다.
진혁은 ‘정보 비대칭성 제어 기법’을 발동하여, 에드하르트가 전혀 알지 못하는 정보의 격차를 극대화하며 압박을 가했다. 상대방이 상황을 통제할 수 없다는 무력감을 느끼게 만드는 것이 위기 협상의 기본 공식이었다.
“알란이 요새의 마탑 통신을 차단하면 내가 고립될 거라 믿었나? 어리석군, 총독. 내 정보망 ‘블랙 페더’는 네놈들이 벌레처럼 여기며 시선조차 주지 않는 요새의 가장 낮고 어두운 하수구 가도를 통해 이미 부활했네. 이 장부의 원본은 요새 외부의 안전 가옥에 보관되어 있지.”
에드하르트는 분노로 얼굴을 붉히며 권총의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었다.
“이 자리에서 네놈을 죽이고 장부의 필사본을 불태우면 끝이다! 안전 가옥 따위는 내 기사들이 샅샅이 뒤져서 파괴하면 그만이야!”
“해보게.”
진혁은 오히려 이마를 총구 앞으로 바짝 들이밀었다. 그의 충혈된 붉은 오른쪽 눈동자(우안 적화)에 광기 어린 이성이 번뜩였다. ‘벼랑 끝의 시선’이 뿜어내는 기세에 에드하르트는 본능적인 공포를 느끼며 숨을 멈췄다.
“내가 여기서 죽거나, 혹은 압송 마차에 타는 순간…… 안전 가옥의 레이븐이 이 장부의 원본을 황궁의 최고 교단 원로원과 반황태자파 귀족들에게 실시간으로 전송하도록 설계해 두었네. 네놈이 황실의 사냥개 노릇을 하려 했던 진짜 야망, 그 찬탈의 음모가 황제 폐하의 책상 위에 올라가는 거지. 가문 전체가 반역죄로 멸문당하는 비참한 결말을 원하는가?”
에드하르트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권총을 쥔 그의 손끝이 부들부들 떨렸다. 진혁의 말은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완벽한 진실로 그의 뇌리를 강타하고 있었다. 공멸(Mutual Destruction)의 체스판이 총독실 중앙에 완벽하게 깔린 것이다.
진혁은 천천히 손가락을 뻗어, 장부 첫 페이지의 하단에 새겨진 기묘한 마법 서명을 짚었다. 그것은 에드하르트가 과거 비자금을 상납할 때 직접 날인했던 독특한 마력 각인이었다.
“이 장부의 첫 페이지에 적힌 총독의 비밀 서명 마력 각인 말일세.”
진혁의 차가운 목소리가 에드하르트의 심장을 옭아맸다.
“이 서류가 황제실로 배달되는 시간은 단 3시간 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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