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형대 위의 사기극
차가운 철창 너머로 푸른 마력 불꽃이 일렁였다.
습하고 비린내 나는 공기가 폐부를 찌를 때마다 쇠사슬이 부딪치는 불쾌한 쇳소리가 지하 독방을 울렸다. 손목과 발목을 단단히 구속한 검은 금속. 제국 군부 마도 공학소에서 특제했다는 마력 억제 쇠사슬이었다. 사슬이 살을 파고들 때마다 몸 안의 마력 회로가 짓눌려 끔찍한 오한이 전신을 지배했다.
‘...내가 정말 미쳐버린 건가.’
진혁은 떨리는 숨을 내쉬며 자신의 창백한 손을 내려다보았다. 가혹한 고문의 흔적으로 손톱 밑은 피멍이 들어 있었고, 마디마디가 비정상적으로 굵어져 있었다. 하지만 이 손의 주인은 강진혁이 아니었다.
서울지방경찰청 위기협상팀장 강진혁. 수많은 인질극과 극단적 대치 상황 속에서 오직 ‘말’ 한마디로 수백 명의 목숨을 구해냈던 베테랑 협상가. 그것이 그의 원래 정체였다. 퇴근길 갑작스러운 사고 이후 눈을 떴을 때, 그는 전혀 다른 세계의 심장부에 던져져 있었다.
칼릭스 브리안.
제국 최북단을 지배하던 브리안 대공가의 가주이자, 황실을 뒤엎으려 군사를 일으켰던 전설적인 반역자.
그것이 지금 진혁이 차지한 육체의 이름이었다.
철컥, 철컥.
지하 독방의 무거운 화강암 문이 열리며 거친 발소리가 쏟아져 들어왔다. 은빛 투구를 쓴 제국 기사들이 진혁의 어깨를 사정없이 움켜쥐었다.
“일어나라, 반역자. 처형 시간이 되었다.”
진혁은 억지로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으로 쓰러졌다. 몸속 깊은 곳에서 칼릭스가 원래 가졌던 강력한 마력을 끌어올려 보려 했으나, 가슴을 찢는 듯한 통증과 함께 입안 가득 붉은 피가 고였다.
[경고: 영혼 동조율 10% 미만. 마력 회로의 강제 순환 시 자아가 완전히 붕괴될 위험이 있습니다.]
머릿속에 기계적인 경고음이 울렸다. 환각이 아니었다. 진짜 칼릭스의 8성급 마력은 완벽히 봉인되어 있었고, 지금 상태에서 억지로 힘을 쓰려다간 단두대에 오르기도 전에 뇌가 타버릴 판이었다. 판타지 소설처럼 빙의하자마자 기연을 얻어 무쌍을 찍는 일 따위는 없었다. 그가 쥘 수 있는 무기는 오직 하나, 현대에서 뼈를 깎으며 익혔던 ‘협상술’과 ‘심리 분석’뿐이었다.
“끌고 가라!”
기사들이 진혁의 겨드랑이를 움켜쥐고 거칠게 질질 끌고 가기 시작했다. 어두운 지하 통로를 지나자, 눈이 멀 것 같은 강렬한 햇빛과 함께 수만 명의 영민들이 지르는 분노 어린 함성이 고막을 찢을 듯 밀려들었다.
“반역자를 처단하라!”
“가문을 망친 쓰레기를 죽여라!”
이곳은 카스텔 요새의 연무장. 그리고 그 중앙에는 붉은 피로 물든 거대한 목조 처형대와 시퍼런 단두대의 칼날이 굶주린 맹수처럼 빛나고 있었다.
진혁은 처형대 위에 무릎 꿇려졌다. 단두대의 차가운 목 받침대에 목이 얹어지는 순간, 온몸의 세포가 죽음의 공포로 비명을 질렀다. 목덜미에 닿는 쇠붙이의 냉기가 척추를 타고 내려갔다.
“황명에 의거하여, 반역자 칼릭스 브리안의 참수형을 집행하겠다!”
처형대 단상 위, 티 한 점 없는 순백의 제국 관료 제복을 입은 청년이 서 있었다. 황실 아카데미를 수석 졸업하고 급파되었다는 특별 감찰관, 알란 폰 크로이츠였다. 은빛 안경 너머로 번뜩이는 그의 눈동자는 차갑다 못해 잔혹했다.
진혁은 숨을 헐떡이며 ‘눈동자 프로파일러’를 가동했다. 상대의 눈동자 미세 떨림, 호흡의 주기, 손가락의 움직임이 진혁의 뇌 속에서 숫자로 치환되기 시작했다.
‘알란 폰 크로이츠. 20대 후반. 자존심이 극에 달한 원칙주의자. 하지만 지금... 왼쪽 검지손가락이 초조하게 스크롤을 두드리고 있다. 눈동자는 군중을 의식하며 자꾸만 하늘을 올려다본다. 왜 저렇게 서두르는 거지?’
진혁은 시선을 돌려 사형 집행관의 자리에 앉아 있는 중년의 사내를 바라보았다. 화려한 금색 견장이 달린 제복을 입은 날카로운 인상의 사내. 카스텔 요새의 지배자, 에드하르트 폰 카스텔 총독이었다.
‘총독 에드하르트. 그는 알란을 바라볼 때 미세하게 미간을 찌푸린다. 황실의 낙하산 관료가 자신의 영지에서 기세를 올리는 것이 불쾌한 거다. 그리고 그의 시선은 처형대 밑의 군중이 아닌, 대공가의 봉인된 보물창고 방향을 향해 있다. 탐욕이다. 저 자는 칼릭스가 죽는 것보다, 그가 숨겨둔 유산의 행방에 더 관심이 있어.’
상황 분석이 완료되었다. 인질극 대치 상황에서 범인과 대치할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상대방의 집단 내부 분열을 포착하는 것이다. 황실 감찰관과 현지 총독의 이해관계는 완벽히 어긋나 있었다.
그때, 하늘이 기묘하게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한낮의 태양 위로 검은 그림자가 천천히 드리워졌다. 일식(Eclipse)이었다. 요새 사방에 배치되어 있던 푸른 마력 불꽃들이 자연계의 마력 흐름 변화에 반응하여 격렬하게 요동쳤다. 사방에서 군중들의 웅성거림이 커졌다. 불길한 징조에 기사들의 대형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감찰관님, 일식입니다. 마력 제어 장치들이 오작동할 위험이 있으니 잠시 집행을...”
요새 수비대 장교가 조심스럽게 건의하자, 알란이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닥쳐라! 황실의 명령은 절대적이다! 일식 따위에 흔들려 반역자의 처형을 미룰 수는 없다. 즉시 밧줄을 놓아라!”
단두대의 줄을 쥔 집행관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칼날이 당장이라도 목덜미를 칠 기세였다.
진혁은 이 타이밍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억지로 몸을 비틀며 극심한 발작을 일으키는 연기를 시작했다. 쇠사슬을 거칠게 흔들며 입에서 피침을 뱉어냈다. 영혼 동조율 저하로 인한 실제 통증을 극대화하여 연출한 소름 끼치는 사기극이었다.
“컥...! 아, 아악! 누, 누구... 나는... 누구지...?”
진혁은 눈동자의 초점을 흐리며 웅얼거렸다. 그의 목소리에 미세한 마력을 얹어 기묘한 울림을 만드는 ‘위압의 메아리’ 기법이 섞여 들었다. 비록 2성 수준의 미약한 마력이었으나, 칼릭스 대공 특유의 묵직한 성음과 결합하자 처형대 주변의 공기가 순간적으로 무겁게 가라앉았다.
“무슨 수작이냐, 반역자!”
알란이 안경을 치켜올리며 외쳤다.
진혁은 허공을 멍하니 응시하며, 처형대의 총책임자인 에드하르트 총독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에는 광기와 두려움, 그리고 철저히 계산된 흔들림이 공존하고 있었다.
“기억이...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내 이름이 무엇인가? 이곳은 어디지? 내 머릿속에... 머릿속에 푸른 안개밖에 남지 않았다!”
“기억상실증 연극이라도 하겠다는 건가! 얄팍한 속임수다!”
알란이 비웃으며 집행관에게 손짓했다. 하지만 진혁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서울지방경찰청에서 외우고 다녔던 수많은 국가 법령과 제국의 법률 조문을 머릿속에서 교차 검증했다. 전대 대공의 기억 조각에서 건져 올린 제국법의 치명적인 구멍이 그의 입을 통해 터져 나왔다.
“에드하르트 총독! 당신은 제국의 법을 어기고 황실의 노여움을 사려 하는가!”
진혁의 날카로운 일성이 연무장을 울렸다. 총독의 이름이 직접 거명되자, 에드하르트의 눈동자가 크게 요동쳤다.
“무슨 소리냐, 칼릭스.”
“제국 헌법 제9조 제3항!”
진혁은 단두대의 칼날 바로 아래에서, 목을 꼿꼿이 세우며 소리쳤다.
“‘피심문자의 영혼 동조율이 급격히 저하되거나, 의식 불명, 혹은 심각한 영적 혼란 상태에 빠진 징후가 보일 경우... 특별 심문관의 정밀 재검증과 정신 탐독이 완료될 때까지 모든 사형 집행은 즉각 유예된다!’ 총독, 지금 내 영혼은 붕괴되어 기억을 잃었다! 이 상태에서 처형을 강행하는 것은 황실 사법성의 법령을 정면으로 위반하는 범죄다!”
알란의 얼굴이 순식간에 흙빛으로 변했다.
“궤변이다! 이 자는 지금 죽음을 피하기 위해 거짓말을 하고 있다!”
“거짓말인지 아닌지 당신이 어떻게 증명할 건가, 감찰관!”
진혁은 에드하르트 총독의 탐욕스러운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쐐기를 박았다.
“내가 반역을 모의하며 숨겨둔 일급 군사 기밀 문서... 황실의 추문과 국경 수비대의 비밀 배치도가 담긴 그 문서의 위치를 아는 자는 오직 나뿐이다. 만약 제국법을 어기고 나를 이대로 죽인다면, 그 비밀은 영원히 어둠 속으로 사라질 것이다. 황제 폐하께서 그 책임을 누구에게 물을 것 같나? 법을 어기고 집행을 서두른 총독, 바로 당신이다!”
침묵이 내려앉았다.
태양이 완전히 검은 달에 가려져 사방이 밤처럼 어두워졌다. 오직 요새 성벽의 푸른 마력 불꽃만이 기괴하게 타오르며 처형대를 비추었다.
에드하르트 총독은 머릿속으로 빠르게 주판알을 굴렸다. 칼릭스가 숨겨둔 보물과 비밀 문서의 행방을 찾지 못하고 처형해 버린다면, 황실에 올릴 공적은 반토막이 난다. 게다가 제국법 제9조의 예외 조항은 분명히 존재했다. 이 상황에서 무리하게 집행을 강행했다가 비밀이 영영 사라지면 그 독박은 자신이 쓰게 된다. 반면, 일주일만 집행을 미루고 고문 마법으로 기억을 끄집어낸다면 모든 공은 자신의 것이 된다.
“멈춰라.”
에드하르트 총독이 나직하지만 묵직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총독님! 이 자의 농간에 놀아나시면 안 됩니다!”
알란이 격분하여 소리쳤으나, 에드하르트는 냉혹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저었다.
“감찰관, 법은 법이오. 반역자의 영혼 상태가 비정상적이라는 법적 이의가 제기된 이상, 황실 특별 심문관의 정밀 검증을 거치는 것이 절차에 맞소. 집행을 일주일간 유예한다. 죄수를 즉시 지하 9번 방으로 호송하라.”
단두대의 밧줄을 쥔 집행관의 손이 풀렸다.
진혁은 속으로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첫 번째 고비를 넘겼다. 일주일. 그가 확보한 생명의 골든타임이었다.
기사들이 그를 다시 끌고 가기 위해 다가왔다. 진혁은 쇠사슬에 묶인 채 처형대를 내려가며, 분노로 부르르 떨고 있는 알란 폰 크로이츠를 향해 차가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협상판의 제1조. 시간은 언제나 납치범이 아닌, 협상가의 편으로 끌고 와야 한다. 그리고 이제, 이 카스텔 요새의 주도권은 서서히 가짜 대공의 손으로 넘어가기 시작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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