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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지는 세계와 연료 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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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트라에아의 해치가 단단히 잠겼지만, 함선의 에너지는 단 3%만이 남아 있었다.


한우는 조종석에 앉은 채 목에 걸린 은색 펜던트를 손으로 꽉 쥐었다. 방금 전까지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지만, 가슴을 짓누르는 이 지독한 슬픔의 근원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머릿속을 아무리 뒤져보아도 차가운 백색 공백뿐이었다. 가죽 수첩에 서투른 필체로 적힌 ‘유라’라는 이름을 손가락으로 쓸어내려 보았으나, 심장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가장 소중했던 기억이 고대 군함을 깨우는 연산의 제물로 바쳐졌음을, 그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아버지가 남긴 유산의 대가는 이토록 잔혹했다.


“마스터 강한우, 감상에 젖을 시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브릿지 중앙에 투영된 아테나의 황금빛 홀로그램이 차갑게 반짝였다. 그녀의 목소리는 감정이 배제된 정밀한 기계음이었다.


“반물질 엔진의 초기 잔량이 2.74%에 불과합니다. 대기권 탈출을 위한 최소 기동 에너지 임계치인 12%에 크게 미치지 못합니다. 현재 출력으로는 제자리 부유조차 불가능합니다.”


“연료가... 고작 그뿐이라고?”


한우가 뉴럴 헬름 너머로 마른침을 삼켰다. 왼쪽 태양혈에 이식된 신경 포트에서 아직도 욱신거리는 극열이 밀려왔다. 왼쪽 팔다리의 감각이 둔해진 상태에서 함선을 조종하는 것만으로도 벅찬데, 시동을 걸자마자 연료 고갈이라니.


그 순간, 보이드 생추어리 전체가 찢어지는 듯한 거대한 진동과 함께 격렬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쿵! 콰구구구궁—!


천장에서 수십 톤에 달하는 암석 파편들이 비처럼 쏟아져 내리며 아스트라에아의 생체 장갑 위로 충돌했다. 둔중한 타격음이 선내를 뒤흔들었다.


“아악!”


콘솔 뒤에 대피해 있던 토비가 비명을 지르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늙은 요셉 역시 흔들리는 바닥을 잡고 간신히 버텼다.


“무슨 일이지, 아테나?”


“지상에서 고주파 물리 진동이 감지되었습니다. 광산 연합의 대형 굴착 드릴선 ‘그랜드 브레이커’가 가동되었습니다. 정찰대장 로건이 킬고어의 명령에 따라 본 격납고의 지반을 인위적으로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타르타로스 지각 대붕괴선이 활성화되었습니다.”


화면 전면에 붉은색 지질 분석 홀로그램이 펼쳐졌다. 로건이 모는 드릴선의 거대한 회전 날개가 보이드 생추어리의 천장 암반을 무자비하게 갈아엎고 있었다. 킬고어는 고대 군함을 온전히 손에 넣지 못할 바에는 격납고째로 매몰시켜 아스트라에아를 포획하려는 것이 분명했다. 무너져 내리는 암석과 마그마 가스가 격납고를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이대로 가다간 이륙하기도 전에 이 먼지더미 속에 영구히 파묻히겠어.”


한우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는 조종석 콘솔을 두드리며 아테나에게 명령했다.


“아테나, 보조 스러스터 가동해! 일단 이 격납고를 벗어난다!”


“기동 불가합니다. 메인 엔진을 활성화하기 위한 예비 동력이 부족하여 시스템이 명령을 거부합니다.”


“젠장, 융통성 없는 기계 덩어리 같으니라고!”


한우는 이가 갈렸다. 엔진을 켤 수 없다면 무너지는 천장을 물리적으로 버텨내는 수밖에 없었다. 그의 머릿속에서 ‘기계 직관’이 빠르게 회전했다. 함선 내부의 잔여 장치들을 훑던 한우의 시야에 구식 화물선에서 뜯어내 장착해 두었던 ‘중력 편향 소형 코어’가 포착되었다.


“아테나, 중력 제어 장치를 미세 수동 모드로 전환해. 엔진 동력을 쓰지 않고, 내부의 예비 중력 코어의 전력만 바이패스한다.”


“미세 수동 모드는 함장의 뇌파에 극심한 연산 부하를 줍니다. 동조율 5% 상태에서는 신경망 괴사율이 기하급수적으로—”


“시끄러워! 당장 전환해!”


한우가 소리치자, 뉴럴 헬름의 미세 침들이 그의 척추를 더욱 깊숙이 파고들었다. 머릿속이 번쩍이며 시야가 푸른 격자선으로 가득 찼다.


그는 무너져 내리는 천장의 균열과 떨어지는 거대 암석들의 질량을 뇌파로 직접 감지하기 시작했다. 로건의 드릴선이 만들어내는 진동 주파수가 신경망을 타고 흘러들어왔다. 한우는 ‘중력 벡터 편향(Gravity Vector Deflection)’ 전술을 발동했다.


“토비! 하부 기계실로 내려가서 유압 계통의 비상 수동 고정 밸브를 잠가! 함선 하부가 무너지면 끝장이다!”


“응, 형! 내가 할 수 있어!”


토비는 겁에 질린 와중에도 거대한 스패너를 움켜쥐고 하부 갑판으로 달렸다. 소년의 얼굴에는 한우를 돕겠다는 굳은 책임감이 서려 있었다.


한우는 뉴럴 헬름을 통해 들어오는 데이터에 집중했다. 떨어지는 암석들의 낙하 궤적을 실시간으로 역연산했다. 그리고 중력 편향 소형 코어의 인력을 천장 붕괴 잔해 방향으로 조사했다.


파지직! 파지직!


아스트라에아의 선체 주변에 둥근 중력 왜곡 장막이 희미하게 형성되었다. 하늘에서 수직으로 떨어지던 거대 암반들이 왜곡 장막에 닿는 순간, 미세하게 궤적을 휘며 선체를 비껴가 도크 바닥으로 추락했다. 콰앙! 쾅! 엄청난 소음과 함께 먼지가 시야를 가렸지만, 아스트라에아의 본체는 직접적인 타격을 면했다.


하지만 대가는 혹독했다. 예비 전력으로 가동되던 중력 편향 코어의 내부 온도가 급상승하며 붉은 스파크를 튀겼다. 한우의 뇌 속에서 신경 포트가 타들어 가는 듯한 통증이 발생했다.


[경고: 중력 편향 소형 코어 과부하. 내부 코일에 미세 균열 발생. 연속 사용 한계에 도달했습니다.]


“하아... 하아...”


한우는 입술을 깨물며 피 맛을 느꼈다. 코에서 붉은 피가 한 방울 떨어졌다. 간신히 무너지는 지반을 제어해 함선이 매몰되는 시간을 벌었지만, 남은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마스터, 중력 편향 장치의 임시 제어로 확보한 유예 시간은 단 30분입니다. 30분 이내에 고농도 반물질 전지를 수급해 엔진을 점화하지 못하면, 본 함선은 붕괴하는 지각 아래 영구히 매몰됩니다.”


아테나의 비정한 경고가 쐐기를 박았다.


30분. 그 짧은 시간 안에 킬고어의 감시망을 뚫고 타르타로스 최하층의 무법지대인 지하 시장 ‘섀도우 마켓’에 잠입해 연료를 구해와야 했다.


한우는 조종석에서 뉴럴 헬름을 벗어던졌다. 척추에서 미세 침이 빠져나갈 때의 감각에 신음이 터져 나왔다. 그는 비틀거리는 몸을 이끌고 하부 갑판으로 향했다. 유압 밸브를 수동으로 단단히 고정하고 땀을 흘리고 있는 토비의 어깨를 잡았다.


“토비, 잘 들어라. 내가 없는 동안 요셉 할아버지와 함께 이 배를 지키고 있어. 무슨 일이 있어도 해치를 열지 마.”


“형... 혼자 가려고? 섀도우 마켓은 너무 위험해! 킬고어의 사냥개들이 깔려 있을 거야.”


토비가 걱정스런 눈빛으로 한우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한우는 쓸쓸하지만 단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연료를 구하지 못하면 우리 셋 다 여기서 무덤을 맞이하게 된다. 내가 반드시 배터리를 구해올 테니, 넌 이 배의 정비사로서 하부 갑판을 사수해.”


토비는 입술을 굳게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빛에는 더 이상 나약한 고아 소년의 모습이 아닌, 함선을 지키겠다는 정비사로서의 각오가 서려 있었다.


한우는 낡은 작업 벨트에 방전된 옴니 렌치를 차고, 어두운 기계실 벽면의 비상 정비용 수동 해치를 열었다. 그 너머에는 섀도우 마켓으로 바로 연결되는 버려진 구식 지하 수로관 터널이 차가운 입김을 뿜어내고 있었다.


로건의 드릴선이 내뿜는 육중한 진동이 지반을 뒤흔드는 가운데, 한우는 홀로 어둠 속으로 몸을 던졌다.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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