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초소의 그림자
타르타로스 위성의 잿빛 궤도 상공, 전자기 폭풍의 잔해를 뚫고 전진하는 아스트라에아의 전면 창 너머로 거대한 금속의 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제국 제8군사 초소.
위성 궤도에 거미처럼 매달린 그 요새는 완벽한 대칭을 이루는 차가운 회색 티타늄 장갑판으로 뒤덮여 있었다. 초소 외벽을 따라 길게 뻗은 타키온 레이저 포탑들이 소리 없이 회전하며 우주 공간을 감시하고 있었고, 그 중심부에서는 푸른빛의 스캐너 광선이 주기적으로 사방을 훑어내렸다. 단 한 번의 조준으로도 아스트라에아의 생체 장갑을 증발시킬 수 있는 제국 정규군의 요새였다.
아스트라에아의 브릿지는 숨이 막힐 듯한 침묵 속에 가라앉아 있었다.
보조 추진 연료 잔량은 고작 0.35%. 엔진룸의 계기판은 이미 위험을 알리는 붉은색 경고등으로 가득 차 있었고, 선내 온도는 영하로 떨어져 벽면의 생체 금속 장갑 위로 서리가 얇게 내려앉아 있었다.
한우는 조종석 콘솔에 오른손을 얹은 채 간신히 몸을 지탱하고 있었다. 그의 왼쪽 어깨와 팔은 돌격대장 그롬과의 사투 끝에 완전히 마비되어 단단한 고철처럼 옆구리에 고정되어 있었다. 왼쪽 다리 역시 마비의 전조가 심화되어 한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쇠사슬을 끄는 듯한 둔탁한 통증이 전신을 옥죄었다.
태양혈에 이식된 구식 양자 포트 커넥터 주변에서는 여전히 미세한 진물이 흘러내려 뺨을 타고 굳어 있었다. 육체는 한계에 달해 있었고, 머릿속은 어머니의 얼굴을 잃어버린 차가운 공허함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한우의 눈동자만큼은 얼음장처럼 맑게 빛나고 있었다.
“적의 장거리 타키온 스캐너가 우리 방향으로 선회합니다! 스캔 도달까지 앞으로 10초!”
레오가 보이드 브레이커 데크 위로 얼어붙어 가는 손가락을 급박하게 놀리며 소리쳤다. 그의 목소리에는 숨길 수 없는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한우야, 준비해! 지금 스캔을 통과하지 못하면 스승님을 보기도 전에 우주의 먼지가 될 거야!”
한우는 오른손으로 아스트라에아의 중앙 콘솔 홈에 깊숙이 박혀 있는 ‘제8순찰대 군관 보안 통과 암호 키’를 꽉 쥐었다. 사촌 형제 강민우의 기함에서 탈취해 낸 군용 기밀 메모리 칩이었다.
“아테나, 위장용 전자기 신호 변조기를 암호 키의 보안 주파수에 동기화해라.”
“동기화 프로토콜을 실행합니다.”
아테나의 차가운 기계음과 함께, 한우의 태양혈 포트에서 푸른색 스파크가 튀었다.
파지직!
머릿속이 타들어 가는 듯한 극통이 뇌리를 스쳤다. 한우는 신음 소리를 삼키며 평정심을 유지하려 애썼다. 뇌파를 통해 전달된 생체 신호가 아스트라에아의 유기 신경망을 타고 흘러가 외벽의 전자기 변조 장치를 가동했다. 아스트라에아의 고유한 반물질 에너지 신호가 억제되고, 그 자리에 제국 제8순찰대 소속의 구식 화물 수송선 주파수가 덧씌워졌다.
[경보: 위장 신호 유지를 위해 아스트라에아의 보조 전력 20%를 지속 소모합니다. 잔여 전력이 임계치 이하로 하락합니다.]
“버텨야 한다.”
한우가 이빨을 악물었다. 보조 전력이 깎여 나가며 선내의 비상등이 한층 더 흐려졌지만, 지금은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웅—!
초소에서 방출된 푸른색 타키온 스캐너 광선이 아스트라에아의 선체를 머리부터 꼬리 끝까지 샅샅이 훑고 지나갔다. 브릿지의 홀로그램 스크린 위로 제국군의 자동 분석 그래프가 요동쳤다.
같은 시각, 제8군사 초소의 관제탑 내부.
빳빳하게 다려진 순찰대 제복을 입은 신참 첸 소위가 모니터 화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짧게 깎은 머리와 긴장으로 굳은 어깨는 그가 교본에만 충실한 전형적인 사관학교 출신 장교임을 보여주었다. 사령관 바그너가 남작에게 뇌물을 받고 자리를 비운 사이, 오늘 밤의 관제 책무는 온전히 그의 몫이었다.
“경비실, 방금 타키온 스캔에 걸려든 기체의 식별 부호를 보고하라.”
첸 소위가 차갑고 군기 바짝 든 목소리로 명령했다. 하급 관제병이 서둘러 콘솔을 두드렸다.
“제8순찰대 소속 화물 수송함 ‘테티스-09’호입니다. 타르타로스 하부 광산에서 채굴한 고밀도 광물을 싣고 궤도 초소로 진입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보안 통과 암호 키의 주파수가 군관 등급으로 일치합니다.”
첸 소위는 돋보기안경을 고쳐 쓰며 모니터에 표시된 암호 키의 유효성을 정밀 대조했다. 사관학교 교본 제14조에 따르면, 군관 등급의 암호 키가 일치할 경우 즉각적인 도킹을 허가하도록 되어 있었다. 비록 최근 위성 지상에서 폭동이 발생해 경계가 강화되었다고는 하나, 정규 군관의 주파수를 의심할 명분은 없었다.
“교본에 따른 위장 신호 검증 완료. 도킹 베이 04번을 개방하고 수동 유도를 시작하라. 군률에 어긋남이 없도록 철저히 감시하겠다.”
첸 소위의 오만한 명령과 함께, 초소 하부의 거대한 강철 도킹 베이가 서서히 입을 벌렸다.
쿵—!
육중한 유압식 강철 클램프가 아스트라에아의 좌현 장갑을 단단히 옭아맸다. 마침내 초소 내부로의 진입이 허가된 것이다.
“레오, 셀린이 갇힌 예비 격실의 보안을 한 번 더 확인해라. 우리가 초소에 침투한 사이 그 아틀라스 스파이가 움직이게 해서는 안 돼.”
한우는 조종석에서 일어나며 지시했다. 왼쪽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몸이 크게 기울어졌지만, 부함장 엘레나가 신속하게 다가와 그의 오른쪽 어깨를 부축했다.
“부함장, 화상 상처는 어떠냐?”
한우가 엘레나의 왼쪽 어깨를 바라보며 물었다. 제국군 제복으로 갈아입었지만, 제복 천 너머로 그롬의 플라즈마 폭발이 남긴 심각한 화상 흉터의 열기가 희미하게 느껴졌다.
“움직이는 데 지장 없습니다, 함장님. 제국의 사냥개들을 처단할 수 있다면 이 정도 통증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엘레나의 눈동자에는 서늘한 복수심이 서려 있었다. 그녀는 한우의 마비된 왼쪽 신체를 단단히 지탱하며, 다른 한 손으로는 허리에 찬 두 자루의 양자 검 ‘에스텔’의 손잡이를 가볍게 쥐었다.
두 사람은 제국 제8순찰대의 표준 하급 장교 제복을 입고 있었다. 모자를 깊게 눌러써 태양혈의 양자 포트와 화상 흉터를 가린 채, 아스트라에아의 하부 해치를 통해 초소의 도킹 베이로 소리 없이 내려섰다.
도킹 베이 내부의 공기는 차갑고 건조했으며, 기계 기름과 전선이 타는 듯한 오존 냄새로 가득 차 있었다. 천장에는 수십 대의 정밀 경비 드론들이 웅웅거리는 모터 소리를 내며 격자 모양의 레이저 감시망을 투사하고 있었다.
“레오, 초소 전체의 전력망을 해킹해서 감시 카메라와 드론들을 일시 마비시킬 수 있겠나?”
한우가 통신망을 통해 은밀히 물었다. 아스트라에아 브릿지에 남은 레오의 초조한 목소리가 귀를 찔렀.
“안 돼, 한우야! 제국 보안국의 중앙 실시간 감시 방화벽이 이 초소의 메인프레임에 직접 연동되어 있어. 전력망에 아주 미세한 양자 노이즈만 흘려보내도 즉각 비상 경보가 울리고 초소 전체가 폐쇄될 거야. 해킹 시도는 즉각 중단해야 해!”
“알았다. 해킹은 포기한다. 물리적 침투로 전환하지.”
한우는 냉철하게 판단했다. 기계적인 무단 해킹이 불가능하다면, 남은 것은 자신의 ‘양자 인지’ 능력을 활용한 수동 기만뿐이었다.
그는 숨을 깊이 들이쉬며 왼쪽 태양혈의 양자 포트를 활성화했다. 뇌신경이 오버클럭되며 머릿속이 지끈거렸지만, 이내 눈동자가 푸른빛으로 물들며 초소 내부의 전자기 흐름이 3D 홀로그램 지도로 뇌리에 직접 그려졌다.
벽면 내부를 흐르는 광섬유 배선망, 천장의 경비 드론들이 방출하는 스캐닝 주파수의 대역폭, 그리고 경비병들의 무전 신호가 반투명한 푸른색 선으로 시야에 매핑되었다.
“엘레나, 3초 뒤 천장의 드론 센서가 우측 15도 방향으로 선회한다. 그 틈에 저 배관 그늘로 이동하지.”
“알겠습니다.”
한우의 지시에 따라 두 사람은 그림자처럼 움직였다. 한우는 마비된 왼쪽 다리를 질질 끌며 절뚝였지만, 엘레나의 정교한 부축과 양자 인지가 제공하는 완벽한 타이밍 덕분에 단 한 번의 센서 스캔에도 걸리지 않고 복도를 가로질렀다.
초소 내부의 기계적 구조는 정교하고 거대했다. 제국 군사 아키텍처 특유의 차갑고 대칭적인 회색 격벽들이 끝없이 이어졌고, 그 사이로 제국 제8순찰대의 경비병들이 교본에 따른 일정한 간격으로 순찰을 돌고 있었다. 첸 소위의 정석적인 경비 배치는 오히려 독이 되어, 한우에게 그들의 순찰 경로를 완벽하게 예측할 수 있는 빈틈을 제공하고 있었다.
지하 감옥 구역으로 향하는 엘리베이터 샤프트 입구에 도달했다.
한우는 오른손을 엘리베이터 제어반 콘솔 위에 올렸다. 그의 작업 벨트에 채워진 다목적 양자 공구 ‘옴니-렌치’는 배터리가 0%로 완전히 방전되어 차가운 고철 쇳덩이에 불과했다. 한우는 오직 자신의 맨손 끝에서 흐르는 양자 인지력만을 이용해 콘솔 내부의 미세 회로를 자극했다.
‘수동 바이패스 라인 가동. 군관 보안 코드 주입.’
철컥.
엘리베이터의 강철 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두 사람은 신속하게 안으로 몸을 던졌다. 엘리베이터가 지하 깊숙한 곳으로 강하하기 시작하자, 한우의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스승 맥스의 생체 신호가 포착된 지하 3층, 심문실 구역이 턱밑이었다.
징—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문이 열리자, 지상과는 전혀 다른 가혹한 공기가 그들을 맞이했다. 회색 벽면은 온통 전자기 차폐막으로 뒤덮여 있어 외부와의 모든 통신이 차단되어 있었고, 복도 양옆으로는 철제 격벽으로 밀봉된 독방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공기 중에는 쇠붙이가 타는 냄새와 차가운 소독약 냄새가 뒤섞여 있었다.
한우와 엘레나는 제식 보행 속도를 유지하며 복도 끝에 위치한 중앙 통제실(Central Control Room)을 향해 걸어갔다. 맥스가 갇힌 심문실의 잠금을 해제하기 위해서는 통제실의 마스터 콘솔을 장악해야만 했다.
복도 모퉁이를 돌 때마다 경비 드론들이 그들의 제복에 새겨진 군관 표식을 스캔했지만, 탈취한 암호 키의 위장 주파수 덕분에 경보는 울리지 않았다.
마침내 독방 구역의 심장부, 두꺼운 이중 강철 격벽으로 차단된 지하 감옥 중앙 통제실의 해치 앞에 도달했다.
한우는 오른쪽 태양혈을 짓누르는 극심한 두통을 견디며 오른손을 해치의 양자 보안 자물쇠에 접촉했다. 그의 뇌 속에서 마지막 연산 프레임이 요동쳤다.
‘보안 그리드 우회 성공. 잠금 해제 프로토콜 작동.’
치이이익—!
무거운 강철 격벽 해치가 비명을 지르며 좌우로 열렸다.
한우와 엘레나가 신속하게 안으로 진입하며 무기를 겨누려던 찰나, 통제실 내부의 기이한 정적에 두 사람의 움직임이 굳어졌다.
통제실 내부는 비정상적일 정도로 깔끔하고 고요했다. 수십 개의 모니터 화면 위로 지하 감옥 전체의 감시 영상이 흐르고 있었고, 그 중앙에 위치한 가죽 의자 뒤편으로 차가운 은색 금속 안경테가 희미한 모니터 빛을 반사하며 빛나고 있었다.
가죽 의자가 천천히 회전했다.
의자에 앉아 있던 사내는 제국 치안청의 길고 검은 가죽 코트를 걸친 창백한 얼굴의 신사였다. 그의 은색 안경 너머로 감정이 배제된 차가운 회색 눈동자가 한우와 엘레나를 꿰뚫어 보았다.
제국 치안청 일등 심문관, 베르너였다.
베르너는 당황하거나 무기를 잡으려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한우 일행을 향해 소름 끼치도록 우아하고 차가운 미소를 지어 보이며 천천히 박수를 쳤다.
짝. 짝. 짝.
“교본에 따른 정교한 위장 침투로군. 과연 반역자 강태성의 유산을 물려받은 쥐새끼답다.”
베르너의 목소리는 너무나 낮고 차분해서, 오히려 통제실 내부의 공기를 절대영도로 얼려버리는 듯했다.
“기다리고 있었다, 강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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