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이의 사슬
사이클롭스 전자기 폭풍의 눈 내부, 아스트라에아의 브릿지는 숨이 막힐 듯한 한기와 침묵으로 가라앉아 있었다. 보조 추진 연료 잔량은 고작 0.35%. 선내의 최소한의 온기를 유지하던 열 순환 장치마저 꺼지자 금속과 생체 조직이 결합된 콘솔 표면 위로 하얀 서리가 얇게 내려앉았다. 숨을 쉴 때마다 허연 입김이 공중에서 얼어붙어 바스라졌다.
한우는 마비된 왼쪽 다리를 억지로 지탱하며 콘솔을 움켜쥐었다. 손끝이 차가운 금속에 닿을 때마다 뇌 속 양자 포트가 찌릿한 통증을 유발했다. 그롬의 침투조를 쓸어버리고 탈취한 ‘제8순찰대 군관 보안 통과 암호 키’가 그의 오른손 안에서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다.
“한우야, 암호 키 내부의 생체 주파수 동기화는 끝났어.”
레오가 보이드 브레이커 데크 위로 굳어가는 손가락을 놀리며 말했다. 그의 갈색 머리칼 끝에도 서리가 맺혀 있었다.
“맥스 스승님의 생체 신호가 흐릿하게 잡혀. 제8군사 초소 지하 3층 구역이야. 하지만…… 초소의 보안 그리드가 너무 촘촘해. 정면으로 접근했다간 도킹 베이에 닿기도 전에 타키온 스캐너에 걸려 격침당할 거야.”
“정면 돌파는 자살행위다.”
엘레나가 화상을 입은 왼쪽 어깨를 움켜쥔 채 낮게 신음하며 보조 콘솔에 몸을 기댔다. 그녀의 군청색 제복은 찢겨 있었고, 그롬의 플라즈마 폭발에 그을린 상처에서는 여전히 열감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제8초소는 사령관 바그너가 뇌물을 받고 남작의 사설 함대를 은밀히 지원하는 요새입니다. 경비병들의 교대 근무 주기와 센서 사각지대를 완전히 파악하지 못하면, 스승님을 구하기도 전에 우리 모두가 제국의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한우는 붉은색 격자망 너머로 깜빡이는 맥스의 생체 신호를 가만히 응시했다. 심장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스승을 구해야 한다는 열망과, 또다시 동료들을 사지로 몰아넣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뇌리에서 격돌했다. 그때, 그의 뇌 속 양자 인지망에 이상한 잡음이 걸려들었다.
[경보: 아스트라에아 내부 보조 연산 노드-04에서 비정상적인 대용량 데이터 전송 시도가 감지되었습니다.]
아테나의 차가운 기계음이 한우의 뇌파 링크를 타고 흘러들었다. 레오 역시 자신의 데크 화면을 바라보며 비명을 지르듯 소리쳤다.
“어? 말도 안 돼! 메인 컴퓨터실 내부에서 누군가 아스트라에아의 생체 동조 유전 코드를 강제로 복사하고 있어! 방화벽 우회 경로가…… 내부망이야!”
한우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내부의 첩자. 그롬이 침투해 브릿지와 엔진실이 백병전의 아수라장이 된 틈을 타, 숨어 있던 쥐새끼가 드디어 꼬리를 드러낸 것이다.
“레오, 양자 암호 해독 알고리즘 ‘오딘’을 가동해. 복사 경로를 즉각 차단하고 데이터 패킷을 묶어.”
“알았어! 오딘 프로토콜 가동! 전송 노드 역추적 시작!”
레오의 손가락이 가상 키보드 위를 폭풍처럼 쓸고 지나갔다. 화면 위로 푸른색 까마귀 형상의 암호 코드가 침투하여 방화벽을 갉아먹는 디지털 연출이 펼쳐졌다. 데이터 유출률이 42%에서 멈추며 강제 락이 걸렸다.
“엘레나, 나를 부축해라. 메인 컴퓨터실로 간다.”
한우는 마비된 왼쪽 다리를 끌며 엘레나의 단단한 어깨에 의지했다. 오른손에는 오직 묵직한 구식 옴니-렌치만이 쥐어져 있었다. 배터리가 완전히 방전된 공구는 그저 단단한 쇳덩이에 불과했지만, 그의 눈빛은 그 어떤 무기보다 날카로웠다.
차가운 생체 금속 복도를 지나 메인 컴퓨터실의 해치 앞에 도달했다. 해치는 반쯤 열려 있었고, 그 틈새로 푸른색 광섬유의 미세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한우는 숨을 죽인 채 해치를 밀어젖혔다.
그곳에는 정비 크루의 회색 작업복을 단정하게 입은 여성, 셀린이 서 있었다. 그녀는 함선의 양자 코어 인터페이스에 초고속 데이터 추출 장치를 꽂아 넣은 채, 감정이 배제된 차가운 눈빛으로 한우 일행을 돌아보았다.
“셀린…… 너였군.”
한우의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제국의 거대 군수 기업 ‘아틀라스’의 공작원이 정비 크루 사이에 숨어 있었을 줄은 몰랐네.”
셀린은 발각되었음에도 당황하지 않았다. 그녀는 천천히 데이터 추출 장치를 회수하려 손을 뻗었지만, 레오의 오딘 알고리즘이 이미 단말기 자체를 잠가버린 상태였다. 그녀의 입꼬리가 가늘게 뒤틀렸다.
“반역자의 서자 주제에 제법 영리하구나, 강한우.”
셀린의 목소리에는 하층민을 향한 지독한 멸시가 담겨 있었다.
“이 고대 함선의 생체 동조 기술은 너 같은 쓰레기가 가질 물건이 아니다. 아틀라스 군수 기업의 자산이 되어 인류의 진화를 위해 쓰여야 할 유산이지. 순순히 길을 비켜라.”
“닥쳐라, 배신자.”
엘레나가 양자 검 ‘에스텔’을 뽑아 들었다. 청백색의 광선이 셀린의 얼굴을 차갑게 비추었다.
그 순간, 셀린이 작업복 소매 안에서 소리 없이 단검을 뽑아 들며 엘레나를 향해 짓쳐 들었다. 그녀의 오른쪽 팔이 기이한 금속성 구동음을 내며 비정상적인 속도로 움직였다. 고성능 군용 기계 의수였다. 마비된 어깨의 통증으로 엘레나의 반응이 반 박자 늦어지는 찰나였다.
‘움직이지 마.’
한우는 도망치거나 피하지 않았다. 대신 왼쪽 태양혈의 양자 포트를 강제로 개방했다. 머릿속이 타들어 가는 듯한 극통과 함께 그의 눈동자가 깊은 푸른빛으로 물들었다. 기계 직관과 양자 인지가 폭주하며 셀린의 기계 의수 내부 회로의 전류 흐름이 3D 홀로그램으로 그의 뇌리에 직접 매핑되었다.
‘의수 모터 제어 신호, 주파수 442메가헤르츠. 접지선 우회 침투.’
한우는 옴니-렌치를 가동하는 대신, 자신의 생체 뇌파 신호를 아스트라에아의 신경망을 통해 셀린의 의수 무선 포트로 직접 역방향 방출했다.
파지직!
셀린의 기계 의수 관절에서 미세한 푸른 스파크가 튀더니, 이내 구동 모터가 완전히 잠기며 우뚝 멈춰 섰다. 단검을 쥔 그녀의 오른팔이 허공에서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어……? 내 의수가……!”
셀린의 차가운 얼굴에 처음으로 당혹감이 스쳐 지나갔다. 엘레나는 그 빈틈을 놓치지 않고 양자 검의 손잡이로 셀린의 턱을 강타했다. 둔탁한 타격음과 함께 단검이 바닥으로 떨어졌고, 셀린은 바닥으로 쓰러지며 엘레나에게 완전히 제압당했다.
“생포했습니다, 함장님.”
엘레나가 셀린의 양손을 단단히 결박하며 말했다. 한우는 쓰러진 셀린을 내려다보며 차갑게 말했다.
“누가 너를 보냈지? 아틀라스의 배후에 있는 황실의 인물이 누구냐?”
셀린은 피가 흐르는 입술을 깨물며 비웃었다. 한우는 그녀의 머리맡에 손을 대고 양자 인지를 가동했다. 그러나 그녀의 뇌파 깊은 곳을 훑는 순간, 기이한 물리적 저항 장벽이 감지되었다.
“소용없어, 한우야.”
통신망을 통해 상황을 지켜보던 레오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녀의 뇌 속에 아틀라스의 특수 인지 차단 칩셋이 이식되어 있어. 기업 비밀이나 배후에 대해 말하려 하는 순간 뇌세포를 스스로 태워버리는 자폭 장치야. 강제로 자백을 받아내려 했다간 즉사할 거야.”
“과연 군수 대기업의 사냥개답군.”
한우는 차갑게 읊조리며 셀린이 사용하던 초고속 데이터 추출 장치를 집어 들었다. 그의 손끝에 장치의 양자 주파수가 감지되었다. 비록 자백은 받아내지 못했지만, 이 장치는 여전히 외부의 수신기와 실시간 양자 링크가 연결되어 있었다. 그 수신기의 종착지는 바로 크로이츠 남작령 사설 함대의 통신망이었다.
‘이걸 역이용한다.’
한우의 머릿속에서 냉철한 기계적 직관이 전술적 기동 경로를 그려내기 시작했다.
“레오, 셀린의 단말기에 원격 시스템 침식(Remote System Erosion) 기법을 주입해라. 우리가 직접 이 단말기의 마스터 권한을 해킹한다.”
“오호, 역정보를 흘리겠다는 거구나? 아주 좋아! 오딘 알고리즘을 역방향으로 전환해서 남작 함대의 양자 주파수 노드에 직접 침투할게!”
레오의 흥분된 목소리와 함께 아스트라에아의 보조 연산 장치가 비명을 지르며 과열되기 시작했다. 콘솔 주변의 온도가 일시적으로 상승하며 서리가 녹아내렸다.
[경고: 보조 연산 코어 열화율 15% 상승. 냉각 시스템 수동 제어 필요.]
한우는 뇌가 쪼개지는 듯한 두통을 견디며 오른손으로 단말기의 양자 회로를 직접 매핑했다. 그의 뇌파를 통해 정교하게 위조된 데이터 패킷이 생성되었다.
[기밀 보고: 아스트라에아의 동력 노심 대파 확인. 현재 3번 성운 구역(Sector 3 Nebula) 내부의 폐기물 도크로 긴급 회피 및 정비 기동 중. 유전 코드 복사율 100% 완료.]
“남작령 사설 함대의 주파수에 동기화 완료. 위조 데이터 패킷 전송한다!”
레오가 엔터 키를 강하게 내리쳤다. 푸른색의 위조 신호가 사이클롭스 폭풍의 전자기 장벽을 뚫고 외곽에 대기 중이던 크로이츠 남작의 기함 블랙 팽의 통신 수신기로 송출되었다.
몇 분간의 숨 막히는 침묵이 흐르고, 브릿지의 메인 레이더 화면에 변화가 나타났다.
성운 외곽을 촘촘하게 포위하고 있던 남작의 사설 전투함들이 일제히 기수를 돌려 먼 우측의 3번 성운 구역을 향해 맹렬한 속도로 가속하기 시작한 것이다. 적들의 포위망에 거대한 공백이 발생했다.
“성공이야! 남작의 함대가 낚였어!”
레오가 주먹을 쥐며 환호했다. 하지만 한우는 웃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이미 제8군사 초소를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기뻐할 시간은 없다. 위조 신호가 가짜라는 걸 남작이 깨닫기까지 남은 시간은 단 6시간이다.”
한우는 결박된 셀린을 예비 격실에 가두라 지시한 뒤, 마비된 왼쪽 다리를 억지로 지탱하며 조종석으로 향했다. 그의 전신에서 차가운 복수심과 스승을 구하겠다는 비장한 의지가 피어올랐다.
“발칸, 기수를 돌려라.”
한우의 낮고 단단한 명령이 브릿지에 울려 퍼졌다.
“제국 제8군사 초소로 진격한다.”
아스트라에아는 가짜 경로 역정보에 속아 남작의 함대가 엉뚱한 소행성 지대로 기동하는 사이, 어둠 속에서 조용히 맥스가 갇힌 제국 제8군사 초소를 향해 기수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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