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 속의 유령선
아스트라에아의 외피를 스쳐 지나가는 실프의 타키온 주파수가 한우의 태양혈을 차갑게 긁어내렸다.
이대로 숨을 들이쉬는 것조차 사치처럼 느껴지는 지독한 냉기였다. 함선의 모든 열 방출구를 밀봉하고 반물질 노심의 가동을 일시 정지시킨 ‘스텔스 매복 냉각 제어법’의 위력은 가혹했다. 브릿지 내부의 온도는 이미 영하 40도 이하로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관측창과 콘솔 표면에는 두꺼운 성에가 끼어 가늘게 부서졌고, 숨을 쉴 때마다 뿜어져 나오는 하얀 입김은 허공에서 즉각 얼어붙어 바닥으로 흩어졌다.
“함장…… 산소 농도가…… 11%까지 떨어졌어.”
조종석 뒤편, 보조 콘솔 밑에 상처 입은 오른쪽 어깨를 움켜쥐고 웅크린 토비의 목소리가 이빨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잘게 흔들렸다. 얇은 가죽 외투 하나로 절대영도에 가까운 우주의 냉기를 버티는 소년의 입술은 이미 퍼랗게 질려 있었다. 늙은 요셉이 그런 토비를 품에 꼭 안은 채, 자신의 체온으로 소년의 떨림을 누르고 있었지만 그의 거친 숨소리 역시 한계를 가리키고 있었다.
한우는 뉴럴 헬름의 차가운 금속 내벽에 머리를 기댄 채 눈을 감았다. 태양혈에 이식된 구식 양자 포트 커넥터는 얼음 송곳으로 머릿속을 쑤셔대는 듯한 이명과 전자기적 극통을 뿜어내고 있었다. 동조율 15% 돌파의 대가로 완전히 마비된 왼쪽 어깨와 팔은 제어할 수 없는 납덩이가 되어 시트 옆으로 축 늘어져 있었다. 게다가 이제는 왼쪽 허벅지부터 비복근까지 차가운 감각 마비의 전조가 기어오르고 있었다.
육체적 고통보다 더 끔찍한 것은 뇌 속의 공허함이었다. 불과 몇 시간 전, 동조 임계를 넘나들며 잃어버린 유년 시절의 기억 조각들. 가문의 정원에서 아버님과 함께 설계도를 그리며 웃었던 기억, 그리고 자신의 목에 걸린 은색 펜던트의 주인이었을 어머니 ‘유라’의 얼굴. 가죽 수첩에 서툴게 적어둔 글자들을 보며 그녀가 자신의 어머니였다는 사실은 인지했지만, 정작 머릿속에 남은 것은 칠흑처럼 어두운 무(無)의 공간뿐이었다. 소중한 존재의 소멸을 자각할 때마다 가슴을 후벼파는 원인 모를 슬픔이 흘러넘쳤으나, 한우는 그 감정의 파도를 억지로 억눌렀다. 지금 흔들리면 동료들은 물론, 자신조차 이 침묵의 군함 묘지에서 차가운 고철 시체가 될 터였다.
‘울지 마라. 이성은 차갑게, 감각은 날카롭게 유지해라.’
한우는 오른손 손가락 끝을 찌릿하게 울리는 양자 인지 2성의 초월적 감각을 일깨웠다. 기계 장치에 직접 접촉하지 않고도, 아스트라에아의 외벽 장갑판을 매개로 삼아 반경 100미터 이내의 전자기 흐름과 미세한 중력파의 비틀림을 뇌 속에서 3차원 홀로그램으로 매핑하는 기적적인 감각.
그의 인지망에 머리 위 100미터 상공을 느릿하게 선회하는 카밀라의 고속 정찰기 ‘실프’의 실루엣이 잡혔다. 실프의 하부 스캐너가 방출하는 타키온 격자망이 소행성 파편과 폐선 장갑 사이를 마치 그물질하듯 촘촘하게 훑어내리고 있었다.
“조타수, 움직이지 마라. 0.01밀리미터의 스러스터 미세 분사조차 저 정찰기의 광학 저격 타겟이 될 거다.”
한우가 뇌파 링크를 통해 수석 조타수 발칸에게 속삭였다. 발칸은 극심한 저체온증으로 온몸이 경직되어 가면서도 조종간을 잡은 손을 굳게 멈춘 채 숨을 완전히 참았다. 그의 이마에 맺힌 식은땀이 서리로 변해 가고 있었다.
그때, 아스트라에아의 우현 너머에 매복하고 있던 에이스 용병 알렉스의 전투기 ‘섀도우 팽’의 엔진 소음이 전자기 파동을 타고 레오의 양자 데크로 유입되었다.
지직, 지지직.
[보고: 적의 섀도우 팽이 아군이 매복한 소행성대 구역을 향해 열추적 미사일 4발의 일제 사격을 준비 중. 미사일 유도 안테나의 동조 주파수 감지.]
레오의 다급한 목소리가 한우의 신경망을 두드렸다.
“레오, 적들의 포위망을 흩트려야 해. 지금 가용한 전력은 1% 미만이지만, 위성의 양자 중계 서버에 백도어를 열어둔 게 아직 살아있을 거다. 전자 기만술 ‘고스트 플릿(Ghost Fleet)’을 시동해.”
“하지만 형, 중계기를 해킹하려면 타키온 필터를 오버클럭해야 해! 필터가 타버릴 수도 있어!”
“필터가 타는 게 미사일에 직격당하는 것보다 나아. 당장 가동해!”
레오의 눈빛이 매섭게 변했다. 그의 손가락이 자체 제작한 휴대용 양자 데크 ‘보이드 브레이커’의 가상 키보드 위를 폭풍처럼 휘저었다. 아스트라에아의 상부 안테나에서 미세한 타키온 주파수 증폭 필터가 과열음과 함께 붉게 달아올랐다.
동시에, 침묵의 군함 묘지 사방으로 가짜 아스트라에아의 타키온 신호 수십 개가 기하급수적으로 증식하며 살포되었다.
피이이잉—! 피이이잉—!
알렉스의 섀도우 팽에서 발사된 네 발의 열추적 미사일이 허공으로 솟구쳤다. 본래 아스트라에아의 미세한 잔류 열원을 향해 유도되던 탄두들이 레오가 생성한 수십 개의 가짜 신호와 충돌하며 궤적을 잃고 요동치기 시작했다.
“미사일들이 갈팡질팡하고 있어! 하지만 두 발이 우리 쪽 소행성 잔해로 꺾여 들어온다!”
토비가 비명을 삼키며 소리쳤다.
“내가 처리한다.”
한우는 오른손을 조종석 옆 전파 송신 포트에 밀착시켰다. 옴니-렌치는 방전되어 사용할 수 없었지만, 그의 뇌 속 양자 인지 2성의 감각은 날아오는 미사일들의 제어 전파 주파수를 완벽하게 읽어내고 있었다.
‘주파수 대역 4.2기가헤르츠. 역위상 코드는…… 찾았다.’
한우는 자신의 뇌신경 전류를 직접 변조하여 아스트라에아의 타키온 송신 필터로 역인정시켰다. ‘미끼 미사일 전파 역위상 전송(Decoy Missile Phase Inversion Transmission)’ 기술이 발동되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고주파 전파가 사방으로 퍼져나가며 다가오던 미사일들의 제어 안테나를 직격했다.
유도 센서가 역위상 전파와 충돌하는 순간, 미사일들의 내부 연산 장치는 아군 함선이 아닌 바로 옆의 거대 폐선 장갑판을 진짜 아스트라에아의 열원으로 오인했다.
콰아아앙! 콰앙!
두 발의 미사일이 아스트라에아의 선두 바로 앞 30미터 지점을 스쳐 지나가며, 좌우에 버티고 있던 거대 소행성 표면에 정면으로 들이받았다. 우주 공간을 가르는 거대한 청색 플라즈마 폭발이 소행성을 산산조각 내며 엄청난 고철 잔해와 먼지 구름을 만들어냈다. 눈이 멀 것 같은 섬광이 브릿지 내부의 하얀 서리를 푸른빛으로 물들였다.
“미사일 요격 완료! 적들의 시선이 가짜 신호 쪽으로 분산되었습니다!”
레오가 흥분해 소리쳤지만, 한우의 얼굴은 더욱 차갑게 굳어졌다. 폭발의 여파로 발생한 잔류 전하가 카밀라의 의심을 자극했기 때문이다.
실프의 선체 하부에서 거대한 광학 스캐너의 백색 서치라이트가 작동하더니, 아스트라에아가 밀착해 있는 폐선 장갑판 구역을 정밀 조준했다.
스으으으응.
차가운 백색 광선이 아스트라에아의 찌그러진 우현 장갑 위를 천천히 훑기 시작했다.
거리 80미터.
50미터.
정찰기 실프가 아스트라에아의 바로 머리 위, 단 50미터 상공까지 하강했다. 카밀라가 소유한 고해상도 타키온 스캐너는 미세한 온도 차이조차 포착해 낼 수 있는 최첨단 장비였다. 아스트라에아의 선체 온도가 우주 공간의 온도보다 단 0.1도만 높아도 즉각 격침 포격이 날아올 터였다.
한우는 뉴럴 헬름의 미세 침들이 자극하는 전신 신경망의 흐름을 극한으로 통제했다.
‘더 내려야 해. 함선의 유기 금속 피부 온도를 완전한 무(無)의 상태로.’
그는 ‘스텔스 매복 냉각 제어법’을 극한으로 오버클럭했다. 함선 내부의 잔여 열을 차단하는 것을 넘어, 크루들의 생명 유지 장치에서 나오는 미미한 온기마저 강제로 억제하기 시작했다. 브릿지 내부의 산소 농도가 9%까지 떨어지며 토비가 가늘게 숨을 헐떡였고, 요셉의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발칸의 손가락 끝은 이미 감각을 잃고 하얗게 변해 있었다.
한우 역시 눈앞이 흐려지고 태양혈 포트에서 피가 한 방울 흘러내려 성에 낀 뺨을 타고 차갑게 얼어붙었다. 뇌세포가 나노 단위로 타들어 가는 고통 속에서도, 그는 양자 인지 2성의 감각으로 실프의 스캔 주파수를 완벽히 흘려보냈다. 아스트라에아의 티타늄 생체 합금 판넬은 주변의 차가운 폐선 장갑과 완벽히 동화되어 절대영도의 완벽한 어둠 속으로 녹아들었다.
카밀라의 스캐너 화면에 아스트라에아는 그저 수백 년 동안 방치된 흔한 제국 전함의 잔해 조각 중 하나로 표시될 뿐이었다.
마침내, 실프의 서치라이트가 방향을 돌렸다. 붉은색 외피의 정찰기는 가짜 신호들이 흩어진 소행성대 외곽을 향해 서서히 고도를 높이며 멀어져 갔다.
“하아…… 하아……”
발칸이 참았던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조종간 위로 쓰러지듯 엎드렸다. 토비 역시 긴장이 풀린 듯 요셉의 품에서 가늘게 떨며 얕은 숨을 내쉬었다. 카밀라와 알렉스의 집요한 1차 수색망을 간발의 차로 속여 넘긴 것이다.
그러나 승리의 기쁨을 누릴 시간은 존재하지 않았다.
웅웅웅…….
아스트라에아의 외피 바로 위를 카밀라의 정찰기가 완전히 벗어나는 순간, 함선 내부 깊은 곳, 반물질 노심의 하부 유기 회로망에서 일찍이 들어본 적 없는 기이한 역류 신호가 맥동하기 시작했다.
양자 크로노미터가 장착된 콘솔 중앙에서 푸른색 스파크가 불규칙하게 튀더니, 한우의 태양혈 양자 포트를 향해 정체불명의 고주파 전파 신호가 역방향으로 사정없이 역류하기 시작했다.
“아아악!”
한우가 머리를 감싸 쥐며 비명을 질렀다. 뇌신경을 타고 흘러드는 낯설고도 거대한 주파수의 파동. 그것은 단순한 제국의 추격 신호가 아니었다. 아스트라에아의 유기 금속 선체 깊숙한 곳에서 잠들어 있던 무언가가 스스로 깨어나 한우의 영혼을 향해 차가운 사슬을 뻗어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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