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산의 야수들
대장간의 화로는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재조차 남지 않은 회색 아궁이 앞, 첫째 설아는 무릎을 꿇은 채 가만히 서 있는 단우현의 등을 응시하고 있었다. 열네 살 소녀의 눈빛은 평소의 조숙함을 넘어, 얼음 계곡의 서리보다도 차갑게 얼어붙어 있었다. 그 눈빛이 향하는 곳은 우현의 거친 오른손, 그리고 그의 뺨에서 귀밑까지 이어지는 깊은 도상(刀傷)이었다.
설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침묵은 대장간을 가득 채운 매캐한 그을음보다도 우현의 숨통을 더 강하게 조여왔다. 우현은 묵묵히 고개를 숙인 채, 부러진 사강석 그릇 조각들을 자루에 담았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낡은 가죽 앞치마가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설아가 가마 밑바닥에서 가문의 원수이자 친부 임회남 대감의 목을 벤 참수도, ‘귀두도’를 찾아냈음을 우현은 직감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말을 잃어버린 벙어리 대장장이였다. 어떤 구차한 변명도, 속죄의 눈물도 입 밖으로 낼 수 없었다. 그저 가장 낮은 곳에서 먼지를 쓸어낼 뿐이었다.
가마의 불씨가 꺼지면 대장간은 고사한다. 부상당한 동료 철수를 치료하고, 병약한 셋째 윤서에게 따뜻한 미음을 먹이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화로를 다시 살려야 했다. 우현은 안방 문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둘째 민우를 향해 나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민우는 입술을 깨물며 뺨에 그을음을 묻힌 채, 아저씨가 가르쳐준 혼원일기공의 호흡을 다잡으며 단단히 고개를 끄덕였다. 누이들을 지키겠다는 소년의 결의가 그의 작은 어깨에 실려 있었다.
우현은 작업대 옆에 놓인 거대하고 투박한 ‘묵철 쇠망치’를 가죽 끈으로 손목에 단단히 묶었다. 그리고 낡은 삿갓을 깊게 눌러쓴 채, 흑석산으로 향하는 문을 열었다. 뒤편에서 느껴지는 설아의 싸늘한 시선을 등 뒤로 지워내며, 그는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 * *
흑석산(黑鐵山)은 철사구 북방을 가로막은 거대한 검은 장벽이었다. 사방에 날리는 석탄재와 삭막한 바위 절벽이 가득한 이곳은 법보다 주먹이 가까운 무법지대였다.
“대장장이 아저씨, 이 위쪽은 사파 놈들의 눈이 더 번뜩이는 곳입니다. 제 발자국만 밟고 따라오십시오.”
스물네 살의 젊은 포수 하진은 가죽 옷을 여미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흑석산 일대의 험준한 산세에 밝은 그는 우현의 정직한 솜씨를 존경하여 흔쾌히 길잡이를 자처한 사내였다. 그의 등 뒤에는 거대한 사냥용 활이 비스듬히 매여 있었고, 허리춤에는 우현이 직접 담금질해 준 튼튼한 흑철 단검이 빛나고 있었다.
우현은 대답 대신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190센티미터에 달하는 거구의 실루엣이 눈보라 속에서 묵직한 바위처럼 움직였다.
산길을 오를수록 기온은 급격히 떨어졌다. 매서운 칼바람이 우현의 뺨을 때릴 때마다, 그의 단전 깊은 곳에 박힌 금기 심법 ‘천근봉’의 봉인이 미세하게 요동쳤다. 체내에 누적된 고질적인 한독(寒毒)이 냉기에 반응하여 폐부를 찌르는 듯한 통증을 유발했다. 우현은 이빨을 악물며 정심주의 호흡을 유지했다. 지금 내력을 단 한 가닥이라도 쓰면, 한독이 역류하여 전신의 경맥이 얼어붙어 즉사할 터였다. 그는 오직 순수한 외공의 힘, ‘무진강체공’의 육체적 단단함만으로 추위를 버텨냈다.
“여기서부터는 ‘뇌격목 숲’입니다. 수년 전 거대한 벼락이 내려앉아 숲 전체가 검게 타버린 기괴한 곳이지요. Chulsabang 놈들이 약탈한 철광석을 밀거래하는 길목이기도 합니다.”
하진이 가리킨 전방에는 벼락을 맞아 검게 탄 고목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었다. 숯검댕이가 묻은 검은 나무둥치들이 마치 대지에서 솟아오른 죽은 자들의 손가락처럼 기괴한 형상으로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사방에 흩날리는 검은 재와 하얀 눈발이 기묘한 대비를 이루며 음산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스스슥.
갑자기 검게 탄 고목들 사이로 기이한 바람 소리가 섞여 들었다. 하진의 눈빛이 야수처럼 날카롭게 빛나며 등 뒤의 사냥용 활로 손을 뻗었다.
“매복입니다!”
하진의 외침과 동시에, 뇌격목 고목 뒤편에서 수십 명의 사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의 손에는 예리하게 벼려진 강철검과 도끼가 쥐어져 있었다. 그 중심에는 가죽 채찍을 허리춤에 찬 채 비열한 뱀의 안광을 번뜩이는 사내, Chulsabang의 삼호두 조필이 서 있었다.
“흐흐흐, 벙어리 대장장이 놈. 대장간에서 쥐새끼처럼 숨어 지내더니 결국 제 발로 사지로 기어 들어왔구나.”
조필이 채찍을 바닥에 내리치며 이빨을 드러냈다. 그의 옆에는 상반신을 탈의한 채 거대한 전투용 도끼를 어깨에 맨 2미터 거구의 사내가 서 있었다. Chulsabang 최고의 장사이자 외공 고수인 웅철이었다.
“웅철아, 저 벙어리 놈의 사지를 으깨버려라. 방주님께 바칠 흑철 원석은 우리가 직접 가져간다.”
조필의 명령과 함께 웅철이 거대한 도끼를 치켜들며 포효했다.
“으아아아!”
웅철이 대지를 박차며 돌격했다. 그의 거대한 전투용 도끼가 반원을 그리며 전방의 검게 탄 뇌격목 고목을 단숨에 베어 넘겼다. 부러진 고목이 굉음과 함께 쓰러지는 찰나, 도끼날이 우현의 정수리를 향해 수직으로 내리찍혔다.
우현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는 신형을 가볍게 뒤틀어 낙하하는 도끼날을 종이 한 장 차이로 피했다. 쾅! 도끼날이 우현이 서 있던 대지를 찍으며 거대한 먼지 폭풍을 일으켰다.
“쥐새끼 같은 놈! 피하기만 할 셈이냐!”
웅철이 도끼를 회수하며 횡으로 크게 휘둘렀다. 우현은 뇌격목 고목 뒤로 신속하게 몸을 숨겼다. 푸스스슥! 거대한 도끼날이 탄화된 고목의 기둥을 박살 내며 검은 재를 사방으로 휘날렸다.
그때, 조필이 손짓을 하자 고지대에 잠복해 있던 사파 단원들이 일제히 활시위를 당겼다.
퓌슉! 퓌슉!
수십 발의 강철 화살이 하진과 우현을 향해 화살비처럼 쏟아졌다. 하진이 사냥용 활로 대응하려 했으나, 좁은 공간에서 수십 명의 화살을 감당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우현은 지체 없이 하진의 앞을 가로막아 섰다. 그는 단전의 기운을 철저히 억누른 채, 전신의 근육과 가죽을 순간적으로 수축시키는 ‘무진강체공’의 극의를 발효했다. 그의 넓은 등과 가죽 앞치마가 묵직한 무쇠벽처럼 팽창했다.
타타타탕!
날카로운 화살들이 우현의 등에 정통으로 부딪쳤으나, 단단한 쇠가죽에 막힌 듯 불꽃을 튕기며 사방으로 부러져 나갔다. 우현의 단단한 피부는 단 한 가닥의 핏방울조차 허용하지 않았다. 하진은 우현의 등 뒤에서 그 괴물 같은 강체의 방어력을 목격하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 이게 무슨 괴물이냐!”
조필이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섰다. 웅철 역시 우현의 믿기지 않는 육체적 단단함에 안광을 흔들었으나, 이내 이를 갈며 다시 도끼를 고쳐 잡았다.
“내 이 도끼로 네 놈의 대가리를 부수어 주마!”
웅철이 전신의 외공 기공인 ‘철포삼’을 운용하며 피부를 구리빛으로 물들였다. 그는 도끼자루를 꽉 쥐고 온 힘을 다해 우현의 머리를 향해 내리찍었다. 바위도 쪼개버릴 듯한 파괴적인 벽산도끼술의 초식이었다.
우현은 드디어 오른손에 묶인 ‘묵철 쇠망치’를 들어 올렸다.
그는 내력을 쓰지 않았다. 오직 무진강체공의 근력과, 평생 가마 앞에서 무쇠를 두드리며 다져진 완벽한 회전의 원심력만을 묵철 망치 머리에 실었다. 우현의 거구의 실루엣이 대지를 딛고 솟구치는 순간, 망치 초식의 최종 강격인 ‘낙풍태(落風颱)’의 궤적이 허공에 그려졌다.
망치 머리가 하강하며 공기를 찢는 굉음을 냈다. 콰아아아!
도끼날과 묵철 망치가 공중에서 정면으로 격돌했다.
쿠우우웅!
귀를 찢는 듯한 쇳소리와 함께 거대한 물리적 충격파가 사방으로 폭발했다. 격돌의 중심에서 일어난 풍압이 주변의 쌓인 눈과 검은 재를 폭풍처럼 쓸어버렸다. 그 반동의 여파로 뇌격목 고목 대여섯 그루가 우수수 부러지며 굉음과 함께 쓰러졌다.
쩌저적!
웅철의 무거운 무쇠 전투도끼날 정중앙에 미세한 균열이 가기 시작하더니, 이내 불꽃과 함께 산산조각 쪼개져 공중으로 비산했다. 웅철의 전신을 감싸고 있던 철포삼의 외공 기운이 일격에 붕괴되었다.
“크아아악!”
도끼가 파괴되며 발생한 엄청난 kinetic feedback이 웅철의 양팔 뼈마디를 타고 역류했다. 어깨 관절이 어긋나고 손바닥 가죽이 완전히 찢어져 핏물이 눈밭 위로 흩뿌려졌다.
부러진 도끼 자루만을 쥔 채, 웅철은 일찍이 겪어보지 못한 괴물 같은 완력 앞에 주저앉아 비명을 질렀다. 그의 눈동자에는 단 한 번의 망치질로 자신의 모든 자부심을 깨부순 거구의 대장장이를 향한 극도의 공포만이 서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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