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살아난 살의
검은 석탄재와 핏빛 눈발이 뒤섞인 흑석산의 비탈을 내려오는 사내의 발걸음은 태산보다 무거웠다.
단우현은 품 안의 온기를 놓치지 않으려는 듯, 찢어진 가죽 앞치마 자락을 더 단단히 여몄다. 그 안에는 유독가스를 마셔 숨을 헐떡이는 여덟 살짜리 막내 윤서가 안겨 있었다. 무너지는 흑석굴의 천장을 맨몸으로 떠받치고 탈출하는 과정에서 단우현의 전신 경맥은 이미 걸레짝처럼 찢겨 있었다. 기경팔맥을 묶어둔 천근봉(千斤封)의 제약과 요동치는 한독(寒毒)의 냉기가 허파를 찌를 때마다 입가로 검붉은 피가 울컥 치밀었지만, 그는 이빨을 악물며 걸음을 재촉했다. 아비의 발걸음은 쓰러질지언정 멈출 수 없는 법이었다.
삐걱.
반쯤 부서진 우현 대장간의 목조 대문을 밀고 들어서자, 매캐한 석탄 연기와 함께 안마당의 싸늘한 정적이 그를 맞이했다.
“우현 씨! 오, 세상에…… 윤서야!”
대장간 안방에서 초조하게 대기하고 있던 과부 서씨 부인이 비명을 지르며 뛰어나왔다. 그녀는 우현의 품에서 천천히 식어가던 윤서를 건네받았다. 아이의 창백한 이마를 짚은 서씨 부인의 손길이 가늘게 떨렸다.
“몸이 얼음장 같잖아요! 어서 안으로…… 민우야, 화로에 장작을 더 넣어라! 빨리!”
“윤서야! 윤서야!”
안방에서 온몸이 멍투성이인 채 누워 있던 둘째 민우가 비틀거리며 기어 나와 윤서의 작은 손을 붙잡고 오열했다. 대장간 안방은 순식간에 아이들의 울음소리와 서씨 부인의 다급한 움직임으로 가득 찼다. 우현은 방 안으로 들어서지 못하고, 문지방 너머 어둠 속에 묵묵히 서 있었다. 자신의 거구에서 풍기는 피비린내와 땀 냄새가 차마 아이들의 방 안으로 스며들지 못하게 하려는 배려였다.
스윽.
그때, 안마당 구석의 어두운 그늘 속에서 인기척이 일었다.
단우현은 고개를 돌리지 않고도 그것이 첫째 설아의 발걸음임을 알았다. 열네 살 소녀의 발걸음은 평소보다 무겁고, 극도로 위축되어 있었다. 설아는 화로의 붉은 불빛이 닿지 않는 사각지대에 멈춰 서서 우현을 바라보았다.
소녀의 시선이 닿은 곳은 우현의 가슴팍이었다. 찢어진 장포와 가죽 앞치마 사이로 흘러내려 검게 굳어버린 한독의 피, 그리고 부러진 어깨 관절에서 뿜어져 나오는 비정상적인 열기. 설아의 맑은 눈동자에는 억누를 수 없는 슬픔과 원망, 그리고 깊은 불신이 가득 차 있었다.
소녀는 이미 알고 있었다. 가마 밑바닥에서 파헤쳐진 검붉은 참수도, 귀두도(鬼頭刀)의 정체를. 그리고 아저씨의 오른쪽 뺨에서 귀밑까지 이어지는 깊은 도상(刀傷)이 가리키는 끔찍한 진실을. 이 아저씨가 바로, 아주 어릴 적 하얀 소복을 입은 아버님의 목을 단두대 위에서 가차 없이 베어 넘겼던 황실의 수석 처형인이었다는 사실을.
우현은 여전히 말을 잃어버린 벙어리 연기를 유지한 채, 묵묵히 설아의 싸늘한 시선을 받아냈다. 어떠한 변명도, 어떠한 위로도 지금은 기만일 뿐이었다. 그는 그저 고개를 나직하게 숙이며 가슴을 찢는 죄책감을 삼켰다.
‘미안하다…….’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한 마음의 절규가 그의 단전을 더 차갑게 얼려버리는 것 같았다. 설아는 우현의 숙여진 고개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아무런 말도 없이 차갑게 몸을 돌려 안방 문을 닫고 들어가 버렸다. 쾅, 하고 닫힌 문소리가 우현의 심장에 쐐기처럼 박혔.
* * *
깊은 밤이 찾아왔다.
서씨 부인이 정성스럽게 달여낸 약탕 덕분에 윤서의 거친 호흡은 점차 안정을 찾았고, 민우 역시 피로에 지쳐 윤서의 침상 머리맡에서 잠들었다. 설아는 동생들의 이불을 덮어준 채 벽에 기대어 눈을 감고 있었으나, 그녀의 손끝은 여전히 친모의 유품인 비단 손수건을 꽉 쥔 채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단우현은 홀로 대장간 가마터 안쪽에 앉아 있었다.
가마의 붉은 불씨만이 어둠 속에서 가늘게 숨 쉬며 그의 흉터 가득한 얼굴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우현은 가부좌를 틀고 불가 비전의 ‘정심주 호흡법(靜心呪)’을 운용했다. 한독빙화의 여파로 뒤틀린 기혈을 다스리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숨을 들이쉴 때마다 폐부 깊은 곳에서 치솟는 통증은 가라앉지 않았다.
그의 마음을 지배하는 것은 육체적 고통이 아니었다.
‘철사방의 뿌리를 뽑지 않는 한, 이 땅에 아이들이 발붙일 평온은 없다.’
우현은 뼈아프게 직감했다. 행동대장 광표를 폐인으로 만들고 책사 귀삼의 음모를 분쇄했으나, 사파 조직 철사방의 방주 철마웅이 살아있는 한 그들의 보복은 끝나지 않을 터였다. 오늘은 윤서였지만, 내일은 민우가, 모레는 설아가 또다시 사지로 끌려갈 수 있었다. 아이들을 조정의 추격으로부터 지키고, 참수 집행인으로서의 죄책감을 속죄하기 위해서는 더 이상 도망치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우현은 가부좌를 풀고 천천히 일어섰다. 그의 190센티미터에 달하는 거구의 실루엣이 가마터 흙벽 위로 거대하고 쓸쓸하게 늘어졌다.
그는 대장간 용광로 화로 바닥으로 걸어갔다. 불길이 거의 꺼져가는 화로 밑바닥의 단단한 화강암 석판을 손으로 짚었다.
스스스스.
우현은 내력을 쓰지 않는 순수한 외공의 완력만으로 무거운 화강암 석판을 들어 올렸다. 석판 아래의 깊은 흙바닥 속에, 설아가 파헤쳐 마당에 던져두었던 것을 밤중에 다시 수거해 임시로 묻어두었던 붉은 비단 주머니가 놓여 있었다.
우현은 붉은 비단 주머니를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 겉을 감싸고 있던 비단을 한 자락씩 벗겨내자, 어둠 속에서 음산하고 검붉은 쇳빛을 발하는 전설의 참수도, 귀두도(鬼頭刀)가 마침내 그 모습을 드러냈다.
검신을 타고 흐르는 묵직한 살기가 가마터의 온도를 순식간에 떨어뜨렸다. 과거 황실 처형장 위에서 수많은 대역죄인들과 충신들의 피를 마셨던 칼날이었다. 칼자루에 새겨진 기괴한 귀신 머리 장식이 화로의 붉은 불빛을 반사하며 마치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번뜩였다.
우현은 왼손으로 칼자루를 잡았다.
두근, 두근.
칼자루를 쥔 순간, 그의 전신 혈관이 미친 듯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단전 깊은 곳에서 잠들었던 냉혹한 처형인의 살기가 깨어나며, 주변의 적을 갈가리 찢어발기라는 ‘살기 동조(殺氣 同調)’의 환청이 뇌리를 스쳤다. 수많은 원혼들의 원망이 칼날을 타고 그의 심장을 찔러왔다.
‘크으윽……!’
우현은 머리를 감싸 쥐며 무릎을 꿇었다. 전신의 뼈마디가 어긋나는 통증과 함께 입가로 서리 같은 차가운 입김이 흘러나왔다. 사부 형천의 비정한 가르침이 환청처럼 귓가를 때렸다.
- 망나니의 칼은 하늘의 뜻을 대행하는 것이니, 정을 담지 말라. 살의를 지우려 하지 마라. 오직 베어 넘겨라.
우현은 눈을 감고 필사적으로 정심주 구결을 읊조렸다.
‘마음을 투명하게 비우고, 살기를 기류로 정화한다…….’
수십 번의 호흡을 거치며, 요동치던 검붉은 살기가 서서히 가라앉았다. 그의 붉게 충혈되었던 눈동자가 다시 무뚝뚝하고 묵직한 대장장이의 안광으로 돌아왔다. 그는 칼날을 바라보았다. 수많은 피가 묻은 이 칼을 다시는 쥐지 않겠다고 다짐했건만, 결국 자식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다시 손에 쥐어야 하는 운명이 서글펐다.
우현은 작업대 옆에 놓인 무거운 숫돌을 가져왔다.
서걱, 서걱, 서걱.
조용한 대장간의 침묵을 깨우며, 숫돌 위에 귀두도를 가는 음산하고 묵직한 마찰음이 밤공기를 갈랐다. 화로의 빨간 불씨가 칼날에 반사될 때마다, 우현의 오른쪽 뺨에 새겨진 깊은 도상 흉터가 핏빛으로 번뜩였다. 칼날의 무뎌진 이가 갈려 나가며, 한 합에 적의 목뼈를 완벽하게 분리해 내던 전성기의 참수 궤적이 되살아났다.
숫돌을 갈아내는 그의 거친 손길에는 분노가 아닌, 가슴 찢어지는 속죄와 비장한 부성애가 담겨 있었다.
칼날을 완전히 벼린 우현은 귀두도를 칼집에 넣지 않았다. 대신, 작업대 위에 놓여 있던 튼튼하고 두꺼운 무명천을 가져왔다.
스윽, 스윽.
우현은 귀두도의 검붉은 칼날과 자루 전체를 무명천으로 꽁꽁 싸매기 시작했다. 겹겹이 묶인 천 자락이 칼날의 예리함을 가로막았다. 아이들 앞에서는 결코 살생을 저지르지 않겠다는 불살의 맹세를 지키기 위한 처절한 타협이었다. 칼을 뽑아 들었으되, 마지막 순간까지 칼날을 드러내어 적의 피를 보지 않겠다는 결의였다.
우현은 꽁꽁 봉인된 귀두도를 가죽 끈을 이용해 자신의 넓은 등 뒤에 굳건히 매어 올렸다.
그리고 오른손에는 대장장이의 상징이자, 내력 없이도 오직 순수한 완력과 타격 기술만으로 적의 병기를 파쇄할 수 있는 거대한 ‘묵철 쇠망치’를 쥐었다.
출정의 준비는 끝났다.
우현은 안방 문틈 너머로 깊은 잠에 빠진 윤서와 민우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눈을 감은 채 눈물을 흘리고 있는 설아의 가냘픈 실루엣을 응시했다. 그는 대답 없는 침묵을 남겨둔 채, 묵묵히 몸을 돌려 대장간 문을 열었다.
매서운 북방의 밤바람과 눈보라가 그의 거구를 덮쳐왔다. 단우현은 묵철 쇠망치를 오른손에 단단히 쥔 채, 어둠이 짙게 깔린 철사구 저잣거리를 지나 사파의 심장부인 철사방 본타를 향해 홀로 눈밭을 걸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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