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의 유혹과 가장의 자격
닉스가 선물한 보라색 향초에서 흘러나오는 은은한 밤안개 향이 침실에 나직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옥상에서의 밤샘 바느질 작업으로 인해 손가락 끝은 미세한 자상으로 아려왔고, 온몸은 물에 젖은 솜처럼 무거웠다. 재희는 침대맡에 앉아 텅 빈 무명 바느질 상자를 허망하게 바라보았다.
‘놋쇠 실이 완전히 바닥났어. 당장 추가적인 차원 균열이 발생하면 결계를 보수할 방도가 없다.’
가계부를 펼쳐 든 재희의 한숨이 깊어졌다. 우유 배달과 편의점 알바를 뛰며 꼬깃꼬깃 모은 돈은 여신들의 엄청난 식비와 가스 요금으로 인해 이미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극심한 생활고와 결계 방전이라는 이중고가 재희의 어깨를 짓누르는 새벽이었다.
딩동—.
아침 8시를 조금 넘긴 시각, 열반장 301호의 초인종이 정막을 깨고 날카롭게 울렸다. 평소의 시장 상인들이나 동네 주민들의 친근한 발소리가 아니었다. 대문 밖에서 느껴지는 기운은 지극히 인위적이고, 동시에 오만할 정도로 무거운 마력의 압박을 품고 있었다.
재희가 문을 열자, 그곳에는 지상의 서민 빌라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질적인 두 남녀가 서 있었다.
단정하게 빗어 넘긴 긴 생머리에 이탈리아제 명품 실크 정장을 걸친 절세미녀, 태성그룹 미래전략실의 최연소 실장이자 브레인인 박혜원이었다. 그녀의 얼음처럼 차가운 눈동자가 낡은 열반장의 복도를 가볍게 훑으며 노골적인 멸시를 드러냈다. 그 뒤에는 가죽 서류 가방을 든 날카로운 인상의 사내, 부회장 송민우의 직속 비서 김도윤이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었다.
“구질구질한 곳이군요. 이런 변두리 낡은 빌라에 그분들이 숨어 계셨다니.”
박혜원이 향긋한 명품 향수 냄새를 풍기며 거실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녀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미세한 마력 파동이 일렁였다. 김도윤은 가죽 가방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며 차갑게 재희를 응시했다.
“본론만 간단히 하죠, 임재희 씨.”
김도윤이 가방을 열고 하얀 종이 한 장을 꺼내 재희의 코앞에 밀어 넣었다. 은은한 금빛 마력이 감도는, 태성그룹 부회장 송민우의 친필 서명이 새겨진 무기명 수표였다.
“송민우 부회장님의 비자금 수표입니다. 일시불로 50억 원입니다.”
50억 원.
가난한 빌라 관리인인 재희가 평생 쓰리잡을 뛰어도 구경조차 할 수 없는 상상 초월의 거액이었다. 재희의 눈동자가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김도윤은 재희의 흔들림을 포착하고 비열한 미소를 지었다.
“조사해 보니 매달 적자에 시달리며 새벽 우유 배달에 인형 눈 붙이기 알바까지 하더군요. 그 미천한 몸으로 정체불명의 외국인 여자 네 명을 부양하느라 뼈가 빠지는 생활을 하고 계시던데. 이 돈이면 이 지옥 같은 가난에서 단번에 벗어나 평생을 떵떵거리며 살 수 있습니다.”
박혜원이 천천히 다가와 재희의 어깨 위에 슬며시 손을 올렸다. 그녀의 손끝에서 미세한 매혹의 마력이 흘러나와 재희의 이성을 마비시키려 했다.
“우리가 원하는 건 간단해요. 그 여자들의 친권을 포기하고, 소유권을 우리 태성그룹 미래전략실로 완전히 양도하겠다는 서류에 서명만 하세요. 그분들은 당신 같은 범인이 감당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니까요.”
그녀의 손가락이 재희의 깃을 타고 내려가며 귓가에 달콤한 목소리를 속삭였다. 고도의 심리전이자 미인계였다.
바로 그 순간, 거실을 가로막은 얇은 미닫이문 너머에서 미세한 숨소리가 들려왔다.
방 안에서 숨죽인 채 대화를 엿듣고 있던 네 명의 여신들이었다.
아테나의 주먹이 하얗게 쥐어졌다. 평소 오만방자하던 전쟁의 여신이었지만, 재희가 50억이라는 거액 앞에 자신들을 팔아넘길지도 모른다는 극도의 불안감에 휩싸여 전신을 떨었다. 미네르바는 안경을 만지며 필사적으로 이성적인 계산을 하려 했으나, 가슴속 깊은 곳에서 솟구치는 거절의 공포에 호흡이 가빠졌다. 프레이야 역시 나른한 눈빛을 지운 채 입술을 깨물었고, 닉스는 밤새 재희가 끓여준 따뜻한 국수의 온기를 떠올리며 그가 자신을 버리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여신들의 오만 게이지가 극심한 질투와 버림받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으로 요동치고 있었다.
하지만 재희는 차분하게 숨을 내쉬며, 박혜원의 손을 단호하게 쳐냈다. 정화의 접촉. 그의 손끝에서 흘러나온 맑은 혈통의 온기가 박혜원의 매혹 마력을 순식간에 차갑게 중화시켜 버렸다.
“손 치우시죠, 박 실장님. 불쾌합니다.”
박혜원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자신의 매혹 주술이 한낱 범인에게 무력하게 파괴당한 것에 내심 경악한 눈치였다.
재희는 테이블 위의 수표를 물끄러미 바라본 뒤, 주머니에서 낡은 놋쇠 가위를 꺼내 들었다.
김도윤이 콧방귀를 꼈다.
“가위라니? 범인 주제에 그 고철 조각으로 우리에게 저항이라도 하겠다는 겁니까?”
재희는 대답 대신 가위 날을 교차시켰다. 그리고 50억 원짜리 비자금 수표의 정중앙을 향해 망설임 없이 가위질을 가했다.
싹둑—!
경악스러운 소리와 함께, 가계 적자를 단번에 해결해 줄 수 있었던 기적의 수표가 허무하게 반으로 갈라져 바닥으로 떨어졌다. 잘려 나간 수표 조각에서 흘러나오던 송민우의 마력 배리어 역시 흔적 없이 기화되어 사라졌다.
“무슨 짓을……!”
김도윤의 얼굴이 분노로 붉게 물들었다.
재희는 팔짱을 낀 채, 나지막하고 단호한 가장의 목소리로 쐐기를 박았다. 임재희식 밀당 조율 대화법의 가동이었다.
“내 식구는 돈으로 사지 못합니다. 당신들에게는 그분들이 탐나는 연구 대상이나 무기일지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매일 밥을 먹이고 잔소리를 하며 지켜야 할 내 집 세입자이자 가족입니다. 50억 원? 나에게는 매일 아침 저 여자들이 투덜거리며 청소 구역을 두고 다투는 소리가 당신들의 그 하찮은 종이 쪼가리보다 훨씬 가치 있습니다. 당장 내 집에서 꺼지세요.”
재희의 흔들림 없는 단호한 태도와 우직한 가장의 위엄 앞에, 박혜원과 김도윤은 압도적인 카리스마에 눌려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후회하게 될 겁니다, 임재희 씨. 대기업의 호의를 거절한 대가가 무엇인지 똑똑히 알게 해 주지.”
김도윤이 이빨을 갈며 잘려 나간 수표 조각을 챙겨 들었다. 박혜원은 수치심과 분노로 일그러진 얼굴로 재희를 노려본 뒤, 거칠게 하이힐 소리를 내며 301호실의 대문을 열고 나가 버렸다.
쾅—!
대문이 닫히는 육중한 소리가 복도에 울려 퍼지기 무섭게.
스르륵, 탁!
거실의 미닫이문이 부서질 듯 거칠게 열렸다.
재희가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눈물을 가득 머금은 네 명의 여신들이 한꺼번에 거실로 들이닥치며 재희의 전신을 와락 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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