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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안개 속의 따뜻한 야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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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밤, 망원동 골목길의 소음이 완전히 가라앉은 시각.


열반장 301호의 불은 모두 꺼져 있었지만, 임재희는 쉽게 잠들지 못했다. 아침에 대치했던 지상 마법사 송지민의 발자국에서 발견된 사마엘의 ‘회색 마력’. 그리고 그 불길한 주파수가 머릿속을 맴돌며 그의 신경을 자극하고 있었다.


게다가 낮에 아테나와 다른 여신들을 먹이기 위해 돼지 주물럭을 산더미처럼 요리하느라 온몸의 맥이 탁 풀린 상태였다. 하지만 그를 진짜 침대에서 일으켜 세운 것은 오른손 끝에서 느껴지는 기묘한 저림이었다.


찌르르.


가업으로 물려받은 ‘낡은 놋쇠 가위’를 만질 때나 느껴지던 인과율의 공명이 심장 부근의 흉터를 타고 손가락 끝으로 흘러들고 있었다. 동시에 머릿속의 심안(오만 수치 감지 심안)이 열반장 옥상 상공에서 기이한 왜곡 현상을 감지해 냈다.


‘옥상이다.’


재희는 소리 없이 침대에서 일어나 트레이닝팬츠 주머니에 낡은 놋쇠 가위를 찔러 넣었다. 그리고 거실 구석에 놓인 모친의 유품, ‘무명 바느질 상자’를 챙겨 들었다. 살금살금 거실을 가로지르는 동안, 소파에서 입을 벌린 채 단잠에 빠진 아테나와 침대에서 나른하게 숨을 쉬고 있는 프레이야의 실루엣이 보였다. 낮의 소동으로 피로했던 여신들은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재희는 조용히 문을 열고 옥상 계단으로 향했다.


철문을 열고 나선 옥상의 공기는 유난히 차가웠다. 계절에 맞지 않는 싸늘한 미풍이 불어오는 발원지는 다름 아닌 그가 낮에 정성스레 조립해 두었던 나무 평상 한구석이었다.


평상 바닥의 갈라진 나무 틈새 사이로, 은은한 보랏빛 불꽃과 함께 기괴한 균열이 일렁이고 있었다. 공간 자체가 마치 칼로 찢어발겨진 것처럼 틈이 벌어져 있었고, 그 안에서 불길한 이계의 마력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끼이익, 끼익.


그 틈새를 비집고 돋아난 것은 징그러운 날개를 단 하급 날개 쥐 마수들이었다. 천계 하층부의 쓰레기 더미에서나 서식하는 저급한 괴수들이 지상과 열반장의 경계가 느슨해진 틈을 타 기어 나오고 있는 것이었다. 놈들은 옥상 빨랫줄에 널려 있던 프레이야의 손수건을 날카로운 이빨로 갉아먹으려 들고 있었다.


“내 집 마당도 모자라, 이제는 옥상 빨래까지 건드리려고 하나.”


재희가 나지막이 중얼거리며 주머니에서 낡은 놋쇠 가위를 꺼내 들었다.


바로 그 순간, 어둠 속에서 스산한 그림자가 솟구치더니 날개 쥐 마수들을 덮쳤다.


스스스슥.


칠흑 같은 어둠의 실타래가 마수들의 주둥이와 날개를 단단히 옭아맸다. 소리 한 번 지르지 못한 마수들이 그림자 속으로 빨려 들어가 흔적도 없이 소멸했다. 재희가 고개를 돌리자, 물탱크 뒤편의 짙은 어둠 속에서 검은 생머리로 얼굴을 가린 여인이 천천히 걸어 나오고 있었다.


밤의 여신, 닉스였다.


낮에는 극도로 소심하여 재희의 뒤에만 숨어 있던 그녀였지만, 밤이 되자 눈동자에서 깊고 푸른 흑색 안광을 뿜어내며 묘한 위엄을 풍기고 있었다.


“재희…… 위험해. 저건 천계의 왜곡된 틈새야. 우리가 이곳에 머무는 신성이 너무 강해서, 지상의 약한 공간 장벽이 버티지 못하고 찢어지고 있어.”


닉스의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다. 그녀는 양손을 뻗어 공간 균열을 향해 자신의 밤의 신성을 쥐어짜 내기 시작했다. 어둠의 장막이 균열을 덮어 억누르려 했다.


하지만—


치이이익!


공간의 찢어짐 자체는 단순한 마력 억제력으로 고쳐지지 않았다. 오히려 균열에서 뿜어져 나온 시공간 왜곡 파동이 닉스의 어둠 장막을 거칠게 밀쳐내며 역류하기 시작했다.


“아앗……!”


닉스가 짧은 신음을 내며 뒤로 비틀거렸다. 마력 역류로 인해 그녀의 고운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재희는 망설임 없이 다가가 그녀의 떨리는 어깨를 붙잡았다. 정화의 접촉. 그의 손끝에서 흘러나온 따뜻하고 맑은 혈통의 온기가 닉스의 몸을 감싸 안으며 폭주하려던 역류 마력을 순식간에 진정시켰다.


닉스의 뺨이 어둠 속에서 붉게 물들었다. 그녀의 머리 위 오만 게이지가 눈에 띄게 파란빛으로 내려앉았다.


“억지로 힘으로 막으려 하지 마세요, 닉스 씨. 시공간이 찢어진 건 벽지가 찢어진 것과 같습니다. 힘으로 누르면 더 넓게 찢어질 뿐이에요. 이럴 때는…… 기워야 합니다.”


재희는 무명 바느질 상자를 열고, 지하실 제단에서 추출해 두었던 황금빛 합금 실, ‘열반장의 장막 유지용 놋쇠 실’을 꺼냈다. 그리고 놋쇠 가위로 찢어진 공간의 가장자리, 무질서하게 흩어져 있는 차원의 실타래들을 정밀하게 잘라내기 시작했다.


사각, 사각.


가위 날이 허공을 가를 때마다 기괴하게 뒤틀려 있던 보랏빛 균열의 단면이 단정하게 정돈되었다. 놋쇠 가위 끝에서 새어 나오는 은은한 금빛 안광이 공간의 반발력을 완벽하게 중화시키고 있었다.


“닉스 씨, 지금입니다. 바느질하는 동안 신성의 빛이 밖으로 새어 나가면 동네 주민들이 놀라거나 천계의 추격자들에게 위치가 노출될 수 있습니다. 주변을 가려주세요.”


“응…… 알았어, 재희.”


닉스가 심호흡을 하며 양손을 하늘로 뻗었다.


밤안개 야간 경비막.


짙고 몽환적인 보랏빛 안개가 순식간에 열반장 옥상 주변 50m 반경을 완벽하게 뒤덮었다. 외부에서는 옥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전혀 볼 수 없었고, 소리조차 밤안개 속으로 녹아내려 차단되었다. 완벽한 은닉의 장막이었다.


재희는 황동 바늘에 놋쇠 실을 꿰었다. 그리고 심안을 극대화하여 찢어진 차원의 경계면을 한 땀 한 땀 꿰매기 시작했다.


바늘 끝이 허공의 찢어진 틈새를 관통할 때마다 푸른빛 실선이 활성화되며 차원의 단면을 단단히 접합했다. 고도의 정신 집중이 필요한 정밀 노동이었다. 땀방울이 재희의 이마에서 턱 끝을 타고 흘러내렸다. 바늘귀를 밀어 넣는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바늘에 찔려 붉은 피가 배어 나왔지만, 재희는 신음을 삼키며 바느질을 멈추지 않았다.


그의 피에 깃든 고대 정화의 기운이 놋쇠 실과 공명하며, 찢어진 공간을 영구적으로 봉합해 나갔다.


닉스는 안개 장막을 유지하는 와중에도, 땀을 흘리며 필사적으로 바느질을 하는 재희의 등 뒤를 묵묵히 지켜보았다. 평범한 인간의 몸으로, 자신들 같은 오만하고 몰락한 여신들을 지키기 위해 이토록 몸을 아끼지 않고 헌신하는 남자의 뒷모습.


천계의 그 어떤 화려한 주신들도 보여주지 않았던 깊은 온정과 책임감이 닉스의 차가운 마음속으로 따뜻하게 스며들고 있었다.


몇 시간이 흘렀을까.


마지막 바느질 매듭을 짓고 재희가 놋쇠 가위로 실을 싹둑 잘라내는 순간, 옥상을 뒤흔들던 미세한 진동과 보랏빛 균열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평상 바닥은 다시 평범한 나무 질감으로 돌아와 있었다.


“후우…… 끝났네요.”


재희는 안도하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하지만 바느질 상자를 확인한 그의 얼굴이 이내 굳어졌다. 결계를 유지하고 복구할 수 있는 유일한 자원인 ‘놋쇠 실’이 단 한 가닥도 남지 않고 완전히 고갈되어 버린 것이다.


‘이거 큰일이군. 조만간 형제 전당포의 고진태 영감을 찾아가 수급처를 알아봐야겠어.’


재희가 피로에 젖은 목소리로 혼잣말을 중얼거리자, 밤안개 장막을 거둔 닉스가 조심스럽게 다가와 그의 곁에 섰다.


“재희…… 고생 많았어. 손가락이 피투성이야.”


닉스의 눈에 안타까움과 연민이 가득 서려 있었다.


“괜찮습니다. 이 정도는 늘 하던 가사 노동의 훈장 같은 거죠. 그보다 밤새 경비막을 유지하느라 닉스 씨도 배가 많이 고프겠어요. 잠시 기다려 보세요.”


재희는 옥상 평상 아래에 둔 배낭에서 낮에 망원시장에서 사다 둔 멸치와 다시마, 그리고 소면 한 봉지를 꺼냈다.


그는 옥상 구석에 설치해 둔 미니 가스버너에 냄비를 올리고 육수를 끓이기 시작했다. 닉스가 소심하게 평상 끝에 걸터앉아 그 모습을 신기한 듯 바라보았다.


보글보글.


구수한 멸치 다시마 육수 냄새가 차가운 새벽 공기 속으로 부드럽게 퍼져나갔다. 재희는 정성껏 삶아낸 소면을 찬물에 헹궈 대접에 담고, 따뜻한 육수를 부은 뒤 잘 익은 김치 고명과 김 가루를 얹었다.


따뜻한 잔치국수 두 그릇이 평상 위에 놓였다.


“드세요. 화려한 요리는 아니지만, 밤샘 노동 뒤에는 이만한 야식이 없습니다.”


재희가 젓가락을 건네자, 닉스는 수줍게 받아들고 국물을 한 모금 들이켰다.


따뜻하고 깊은 육수의 감칠맛이 그녀의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며, 밤새 소모되었던 밤의 신성과 마력 회로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닉스의 눈동자가 옥빛으로 은은하게 빛났다.


“따뜻해…….”


닉스는 국수를 입에 넣으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천계는 항상 차갑고 고독했어. 승리와 규율만이 존재했지. 배신당해 추락했을 때, 세상이 끝난 줄 알았는데…… 이렇게 따뜻한 음식을 먹을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어.”


“여기는 지상이고, 제 집이니까요. 제 집에서는 아무도 고독하게 굶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마음 놓고 드세요.”


재희의 무심한 듯 다정한 대답에 닉스는 결국 참지 못하고 눈가에 미세한 눈물을 글썽였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묵묵히 국수를 비워나갔다.


[닉스 - 오만 수치: 85% -> 78%]


새벽빛이 저 멀리 지평선 너머로 붉게 물들어 오기 시작할 무렵, 식사를 마친 닉스는 품속에서 아주 조심스럽게 보라색의 작은 향초 하나를 꺼내 재희의 손에 꼭 쥐여주었다.


“이건…… 내 밤의 신성을 아주 조금씩 깎아서 만든 향초야. ‘닉스의 밤안개 향초’라고 해. 재희가 잠들 때 이 향초를 피우면, 몸의 피로도 풀리고…… 가슴의 흉터에 남은 아픔도 정화될 거야. 내가 줄 수 있는 건 이것뿐이라 미안해.”


그녀는 부끄러운 듯 긴 생머리로 얼굴을 가리며 얼른 301호실 안으로 도망치듯 걸어 내려갔다.


재희는 손바닥에 남은 보라색 향초의 은은한 온기와 밤안개 향을 맡으며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이내 텅 빈 바느질 상자를 바라보며, 다가올 현실적인 재정 위기와 자원 수급의 압박을 가슴 깊이 느끼고 있었다.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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