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당의 저주와 놋쇠 가위
어스름한 새벽의 푸른빛이 열반장 301호의 거실 창틀을 타고 넘어올 때까지만 해도, 임재희는 그것이 그저 평범한 피로 누적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최근 며칠 동안 여신들을 부양하기 위해 새벽 우유 배달과 편의점 야간 아르바이트를 교대로 뛰었고, 전날에는 생명의 여신 프레이야의 고집을 꺾고 이불 손빨래를 시키느라 정신적, 육체적 소모가 극에 달해 있었다. 하지만 이불 천 너머 골목길 어둠 속에서 번뜩였던 그 기괴한 붉은 안광—사교단 천벌교의 정찰병을 목격한 이후로, 그의 무의식은 단 한 순간도 편히 쉬지 못했다.
“으윽…….”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려던 재희는 나지막한 신음을 흘리며 다시 매트리스 위로 쓰러졌다.
머리가 깨질 것처럼 울려댔다. 전신을 타고 흐르는 오한은 뼛속 깊은 곳까지 얼려버릴 기세로 요동쳤고, 숨을 들이쉴 때마다 폐부가 타들어 가는 듯한 한기가 느껴졌다. 평범한 감기몸살이 아니었다. 재희는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셔츠 단추를 풀었다.
심안을 개안하지 않았음에도 육안으로 똑똑히 보였다. 왼쪽 가슴, 심장 부근의 피부 위로 음습한 검은색 낙인이 거미줄처럼 뻗어나가고 있었다. 마치 살아있는 벌레처럼 꿈틀거리는 그 검은 줄기들은 그의 생명력을 야금야금 갉아먹으며 심장을 향해 조여들고 있었다.
“재희야? 이 미개한 인간 놈이 해가 중천에 뜨도록 일어나지 않고…… 앗!”
방 문을 거칠게 열고 들어오던 전쟁의 여신 아테나가 침대 위에 쓰러진 재희의 몰골을 보고 굳어버렸다. 그녀의 손에는 수선된 분홍색 고무장갑이 꼭 쥐여 있었다.
“이, 이게 무슨 일인가! 얼굴빛이 왜 이리 창백한 것이냐!”
아테나의 외침에 거실에 있던 지혜의 여신 미네르바와 생명의 여신 프레이야가 황급히 방 안으로 들이닥쳤다. 나른하게 기지개를 켜던 프레이야의 눈동자가 재희의 가슴에 새겨진 검은 낙인을 포착하는 순간, 그녀의 장난기 가득했던 얼굴이 순식간에 차갑게 굳어졌다.
“저주야……. 그것도 지상의 아주 지저분하고 음습한 원혼들이 뒤엉킨 저주.”
프레이야가 침대맡으로 다가와 재희의 이마를 짚었다. 그녀의 손끝에서 미약한 청록색 생명 마력이 흘러나와 재희의 체온을 조율하려 시도했다. 하지만 마력이 재희의 피부에 닿는 순간—
치이이익—!
기분 나쁜 마찰음과 함께 검은 낙인에서 뿜어져 나온 탁한 흑마기가 프레이야의 마력을 난폭하게 튕겨냈다.
“앗……!”
프레이야가 가벼운 신음을 내며 손을 거두었다. 그녀의 손가락 끝이 가볍게 떨리고 있었다.
“말도 안 돼. 내 생명의 권능이 지상의 조잡한 주술에 튕겨 나가다니? 비록 신력을 잃었을지언정 이따위 사악한 기운에 밀릴 리가 없는데!”
“비켜봐라, 프레이야. 내가 이 저주의 공식을 해독해 보겠다.”
미네르바가 은빛 안경을 치켜올리며 재희의 가슴 위로 손을 뻗었다. 그녀의 안경 너머로 푸른빛 마력 공식들이 홀로그램처럼 떠오르며 저주의 구조를 분석하려 했다. 하지만 분석 공식이 낙인에 닿자마자 기하학적 수식들이 어지럽게 뒤틀리더니 이내 연기처럼 흩어져 버렸다.
“해독이 불가능해……. 이건 정연한 마법 법칙으로 짜인 공식이 아니야. 지상의 타락한 원혼들과 피의 원한을 억지로 짓눌러 담은 변칙 주술이야. 천계의 정통 마도 공식으로는 이 무질서한 악의를 정합할 수 없어!”
미네르바의 목소리에 이례적인 당혹감과 초조함이 묻어났다. 늘 냉철함을 유지하던 지혜의 여신마저도 해결책을 찾지 못하자, 방 안의 공기는 순식간에 극도의 불안감으로 얼어붙었다.
재희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심장을 조여오는 저주의 맥동이 느껴질 때마다 열반장을 감싸고 있던 은닉 결계의 힘이 미세하게 약화되는 것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이대로 가다간 자신이 죽는 것은 물론, 열반장의 정체가 지상에 노출되어 사마엘과 추격자들에게 여신들을 통째로 빼앗기게 될 터였다.
‘이대로 무너질 수는 없어…….’
재희는 이빨을 악물며 무의식 속으로 가라앉으려는 자아를 붙잡았다.
냐아아아아옹—!
바로 그 순간, 열반장 앞마당에서 고막을 찢을 듯한 날카롭고 다급한 고양이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재희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 울음소리의 주인공은 열반장 마당의 파수꾼이자 길고양이 영물인 ‘나비’였다. 평소에는 재희가 주는 멸치 캔을 먹을 때를 제외하고는 철저하게 도도함을 유지하던 녀석이 이토록 악을 쓰며 우는 것은 단 한 가지 이유밖에 없었다.
침입자. 혹은 외부에서 가해진 직접적인 위해.
“나비가…… 마당에서 울고 있어. 무언가 찾아낸 게 분명해.”
재희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며 침대 시트를 움켜쥐고 몸을 일으켰다. 아테나가 황급히 그의 어깨를 부축했다.
“미련한 놈아! 몸도 가누지 못하면서 어디를 가겠다는 것이냐! 누워 있어라, 내 당장 밖으로 나가 그 정찰병 놈들의 목을 뽑아 오겠다!”
“안 돼요……. 아테나 씨가 무작정 마력을 썼다간 지상의 마력 탐지기에 걸려요. 그리고 이 저주는 밖에서 때려부순다고 해결되는 게 아닙니다. 근원을 찾아 끊어야 해요. 저를 마당으로 데려가 주세요.”
재희의 눈빛에 서린 흔들림 없는 단호함에 아테나는 잇새로 신음을 흘리며 결국 그를 부축했다. 미네르바와 프레이야 역시 긴장한 표정으로 그의 뒤를 따랐다.
***
열반장 앞마당의 화단 구역은 아침 햇살을 받아 평화로워 보였지만, 그 이면의 공기는 비정상적으로 탁하고 무거웠다.
삼색 길고양이 나비는 마당 한구석, 낡은 벽돌로 쌓아 올린 화단 깊숙한 곳을 향해 하악질을 해대고 있었다. 나비의 날카로운 발톱이 흙바닥을 사정없이 파헤칠 때마다, 흙바닥의 틈새로 검붉은 색의 사악한 흑마기(흑마기)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저기다…….”
재희는 아테나의 어깨에 기대어 서서, 떨리는 호흡을 가다듬고 심안(오만 수치 감지 심안)을 개안했다.
그의 시야가 황동빛으로 물들며 마당의 마력 흐름이 입체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흙바닥 아래 깊은 곳, 사악하게 꼬여 있는 검붉은 마력의 실타래가 선명하게 보였다. 그 실타래의 중심에는 인간의 머리카락과 짐승의 피로 칭칭 감긴 조잡한 짚인형이 묻혀 있었다.
배두식의 사설 마법사 정문식이 묻어둔 ‘피를 갈망하는 저주 짚인형’이었다.
그 짚인형에서 뻗어 나온 수십 갈래의 검은 실들이 마당의 흙을 뚫고 나와, 재희의 발목을 타고 올라와 그의 심장 흉터와 직접 연결되어 있었다. 재희가 들이마시는 오한과 두통의 정체는 바로 이 인형이 재희의 생명력을 빨아들이며 결계를 약화시키는 인과의 선이었다.
“짚인형…… 저 비열한 지상의 벌레 놈들이 감히 내 주인의 보금자리에 이런 추잡한 저주를 매립하다니!”
아테나가 격분하며 주먹을 쥐었다. 그녀의 몸에서 청동빛 투기가 뿜어져 나오려 하자, 재희가 황급히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안 됩니다. 힘으로 터뜨리면 저주가 역류해서 제 영혼이 먼저 찢어집니다. 비켜서세요.”
재희는 떨리는 손으로 바지 주머니를 뒤적였다. 그의 손가락 끝에 닿은 것은 차갑고 묵직한 금속의 감각—조부 임성진이 남긴 가업 유품이자, 공간의 뒤틀림을 자르는 ‘낡은 놋쇠 가위’였다.
가위 날을 꺼내어 양손으로 굳건히 쥐자, 재희의 손가락 끝에서 흘러나온 미세한 정화의 피 기운이 가위의 놋쇠 몸체와 공명하기 시작했다.
웅우웅—!
낡고 녹슬어 보이던 놋쇠 가위의 표면을 따라 찬란한 금빛 서광이 물결치듯 흘러내렸다. 가위 날 안쪽에 새겨진 고대 천계의 조율 룬 문자가 황금빛 안광을 뿜어내며 허공에 선명하게 투사되었다.
재희는 가위 날을 교차시키며, 심안으로 포착한 짚인형의 핵심 ‘매듭’을 정조준했다. 수많은 검은 실들이 꼬여 있는 그 단 하나의 인과율의 결.
“끊어져라.”
재희가 나지막하지만 단호하게 외치며 가위 날을 맞물렸다.
서걱—!
가위 날이 닫히는 순간, 맑고 청아한 금속음이 마당 전체를 울렸다. 가위 끝에서 뿜어져 나온 백색의 날카로운 참격 선이 흙바닥을 가르고 들어가, 짚인형을 휘감고 있던 검은 실타래의 핵심 매듭을 단숨에 두 동강 냈다.
“끼에에에엑—!”
공중에서 실체가 없는 원혼들의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재희의 심장을 조여오던 검은 실들이 황금빛 불꽃에 휩싸이며 순식간에 재가 되어 부서져 내렸다. 가슴을 짓누르던 극심한 오한과 두통이 씻은 듯이 사라졌고, 차갑게 얼어붙었던 전신맥에 따뜻한 정화의 온기가 급속도로 순환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화단 흙바닥 속에서 강한 진동이 일어났다.
펑—!
흙먼지가 사방으로 튀며, 파묻혀 있던 저주 짚인형이 황금빛 폭발과 함께 흔적도 없이 산산조각이 나 공중으로 날아갔다. 사악한 흑마기는 단 한 줌도 남지 않고 완벽하게 정화되었다.
***
같은 시각, 열반장에서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 서울 변두리의 음습한 지하 밀실.
사방에 붉은 촛불을 켜놓고, 재희의 머리카락과 피가 담긴 제단 앞에서 저주 주문을 전송하던 사설 흑마법사 정문식의 눈동자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이, 이럴 리가……! 저주가…… 인과가 완전히 잘려 나갔어?! 끄아아악!”
정문식이 비명을 지르며 제단 위로 쓰러졌다.
그가 제어하던 저주의 마력이 놋쇠 가위의 절대적인 절단 권능에 밀려 역류한 것이다. 그의 심장 부근에서 황금빛 가위 날 모양의 균열이 가더니, 온몸의 마력 회로가 스스로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헉, 컥…… 배두식…… 사마엘 님…… 살려…….”
정문식은 검은 피를 한 바가지나 토해내며 바닥을 굴렀다. 그의 전신에서 검붉은 불꽃이 피어오르더니, 이내 단 한 줌의 재만을 남긴 채 비참하게 자멸하고 말았다. 제단 위에 놓여 있던 사교단의 주술 도구들도 일제히 폭발하며 흔적 없이 사라졌다.
***
열반장 앞마당.
흙먼지가 가라앉자, 재희는 무릎을 꿇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가위를 무리하게 사용한 반동으로 손가락 끝이 저려왔지만, 가슴의 검은 낙인은 완벽하게 사라져 있었다.
냐옹—.
길고양이 나비가 다가와 재희의 바짓가랑이에 머리를 비비며 기특하다는 듯 가르릉거렸다. 재희는 미소를 지으며 나비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고맙다, 나비야. 네가 아니었으면 정말 큰일 날 뻔했어.”
여신들은 넋을 잃은 채 재희와 그의 손에 쥔 낡은 놋쇠 가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지상의 평범한 인간인 줄만 알았던 자신들의 전속 집사가, 천계의 지혜로도 풀지 못했던 변칙 저주 주술을 단 한 번의 가위질로 완벽하게 정화해 낸 것이다. 그것은 단순한 완력이 아닌, 세계의 법칙과 인과를 가르는 절대적인 조율자의 권능이었다.
[아테나 - 오만 수치: 80% -> 75%]
[미네르바 - 오만 수치: 60% -> 55%]
[프레이야 - 오만 수치: 85% -> 80%]
여신들의 머리 위 오만 게이지가 일제히 파란빛을 띠며 큰 폭으로 하락했다. 그녀들의 눈빛에는 재희를 향한 깊은 경외감과 함께,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 몸을 사리지 않는 집사에 대한 묘한 애정과 신뢰가 서서히 싹트고 있었다.
“재희야……. 너는 대체 정체가 무엇이냐?”
미네르바가 안경을 고쳐 쓰며 나지막이 물었다. 재희는 가위를 주머니에 넣으며 소탈하게 웃어 보였다.
“말했잖아요. 전 그냥 가난한 열반장의 가장이자, 당신들의 전속 집사입니다. 자, 상황 끝났으니 아테나 씨는 마당에 어질러진 흙 청소하시고, 미네르바 씨는 깨진 벽돌 정리 도우세요. 일하지 않는 자는 저녁 돼지 주물럭 없는 거 아시죠?”
재희의 잔소리에 여신들은 투덜거리면서도 군말 없이 빗자루와 양동이를 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평화로운 가사 노동이 시작되려던 바로 그 순간, 열반장 대문 밖 골목길에서 요란한 구두 굽 소리와 함께 오만한 마력 파동이 대문을 거세게 뒤흔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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