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래판 위의 생명 바람
“어디 보자. 여기가 아주 살짝 뜯어졌군.”
임재희는 거실 낡은 소파에 앉아 가업으로 물려받은 무명 바느질 상자를 열었다. 상자 안에서 은은한 황동빛 바늘을 꺼내 실을 꿰는 그의 손길은 24세 청년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능숙하고 섬세했다.
그의 맞은편에는 전쟁의 여신 아테나가 무릎을 꿇은 채, 재희의 손끝을 초조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어제 마당에서 사채업자 마칠성 일당을 쇠파이프째로 구겨버렸던 그 당당함은 온데간데없었다. 오직 자신의 보물 1호인 분홍색 고무장갑이 무사히 수선되기만을 바라는 어린아이 같은 얼굴이었다.
“재희야, 부디 조심해서 다뤄다오. 내 비록 신력을 잃었으나 그 장갑을 낄 때만큼은 지상의 식기들을 완벽하게 지배할 수 있었다. 그것이 찢어지다니 내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구나.”
“조용히 좀 하세요. 정신 사나우니까. 깡패들 머리통을 그렇게 후려치는데 안 찢어지고 배깁니까?”
재희는 핀잔을 주면서도 놋쇠 가위로 실을 톡 잘라내며 아테나의 분홍색 고무장갑 끝부분을 단단하게 기워주었다. 아테나는 수선된 장갑을 품에 안고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싱글벙글 웃었다.
그 평화로운 광경을 깨뜨린 것은 거실 안쪽 창가 소파에 나른하게 누워 있던 금빛 웨이브 머리의 여인, 생명의 여신 프레이야였다.
“아아, 정말이지 지상의 공기는 너무 탁해. 옥상에 쌓아둔 저 시커먼 빨래 더미에서 풍기는 냄새 때문에 내 아름다운 코가 마비될 지경이라니까? 재희야, 저 무식한 아테나에게 설거지 말고 빨래도 시키는 게 어때?”
프레이야는 흘러내리는 셔츠 깃 사이로 드러난 하얀 어깨를 으쓱이며 콧소리를 냈다. 그녀의 머리 위에는 반투명한 붉은색 게이지가 선명하게 떠올라 있었다.
[프레이야 - 오만 수치: 92%]
[상태: 극도의 나태함 및 가사 회피 시도]
재희는 가죽 가계부를 툭 닫으며 차가운 눈빛으로 프레이야를 응시했다.
“프레이야 씨. 오늘 빨래 담당은 분명 당신입니다. 아테나는 설거지를 끝냈고, 미네르바는 어제 반성문 백 장을 쓰느라 밤을 새웠어요. 닉스는 밤새 야간 경비를 도느라 지금 방에서 자고 있고요.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는 규칙, 잊으셨습니까?”
“어머, 재희도 참.”
프레이야가 소파에서 미끄러지듯 일어나 재희에게 다가왔다. 그녀의 걸음걸이마다 치명적인 매혹의 향기가 거실에 퍼졌다. 그녀는 얇은 손가락으로 재희의 어깨를 쓸어내리며, 그의 목에 부드럽게 팔을 감았다. 나른하고 끈적한 눈빛이 재희의 눈동자를 정면으로 향했다.
“내 가냘픈 손으로 그 무겁고 더러운 이불을 빨라니, 너무 가혹하잖아? 대신 내가 재희에게 아주 특별한 축복을 줄 수 있는데……. 예를 들면, 오늘 밤 단둘이서 지상의 법률보다 더 달콤한 밀어를 나누는 건 어때?”
순간, 프레이야의 몸에서 미세한 핑크빛 마력 입자가 피어오르며 재희의 정신을 흐리게 만들려 했다. 몰락했어도 생명의 여신이 지닌 본능적인 ‘정신 매혹 주술’이었다.
하지만 재희의 눈동자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의 심안은 프레이야의 머리 위 오만 게이지가 유혹을 성공시키겠다는 야심으로 붉게 깜빡이는 것을 똑똑히 보고 있었다.
재희는 팔을 들어 그녀의 가냘픈 손목을 단호하게 잡아 풀어냈다. 그의 손끝에서 흐르는 따뜻한 정화의 온기가 프레이야의 매혹 마력을 순식간에 중화시켜 버렸다.
“읏……?!”
프레이야가 깜짝 놀라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자신의 매혹이 완벽하게 차단당한 것에 내심 깊은 충격을 받은 눈치였다.
재희는 팔짱을 낀 채 차분하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이른바 ‘임재희식 밀당 조율 대화법’의 가동이었다.
“프레이야 씨. 그런 얄팍한 꼼수는 저에게 통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오늘 빨래를 성실하게 끝내지 않으시면, 오늘 저녁 메뉴인 ‘돼지 주물럭’은 국물도 없을 줄 아세요.”
“돼, 돼지 주물럭……?”
프레이야의 나른한 눈동자가 순식간에 확장되었다. 옆에서 장갑을 만지작거리던 아테나 역시 ‘돼지 주물럭’이라는 단어에 침을 꿀컥 삼켰다. 어제 재희가 끓여준 김치찌개 한 그릇에 자신들의 소실된 마력 회로가 미세하게 공명하며 되살아났던 기억이 생생했기 때문이다. 그보다 더 강력한 고기 요리라니!
“아테나와 미네르바가 맛있게 고기를 쌈에 싸서 먹는 동안, 프레이야 씨는 식탁 옆에서 생수만 마시며 구경하게 될 겁니다. 제 성격 아시죠? 한다면 합니다.”
재희의 칼 같은 선포에 프레이야의 오만 게이지가 순식간에 툭 떨어졌다.
[프레이야 - 오만 수치: 92% -> 85%]
“으윽…… 비열한 인간 놈. 먹는 것으로 신을 협박하다니…….”
“협박이 아니라 정당한 노동의 대가입니다. 당장 대야 들고 옥상 평상으로 올라오세요.”
결국 프레이야는 울상을 지은 채, 산더미 같은 이불 빨래가 담긴 커다란 플라스틱 대야를 안고 옥상으로 향했다.
***
열반장 옥상 평상 위로 따스한 오후의 햇살이 내리쬐고 있었다. 하지만 쌓여 있는 빨래 더미는 평화로운 풍경과 어울리지 않게 거대했다.
재희는 대야 옆에 서서, 동네 세탁소 주인으로 위장하고 있는 은거 고수 홍만수에게 전수받은 ‘홍만수의 마법 세탁 정화법’의 비책을 프레이야에게 가르치기 시작했다.
“잘 들으세요. 마력이 깃든 여신들의 옷이나 이불은 지상의 일반 세제로는 때가 빠지지 않습니다. 빨래판을 밀 때는 억지로 마력을 쥐어짜며 신경질을 내지 말고, 정직하게 몸의 무게를 실어 옷감의 결을 따라 비벼야 합니다. 그것이 노동의 기초입니다.”
“귀찮아, 힘들어, 나 신전으로 돌아갈래…….”
프레이야는 투덜거리며 옥상 평상 한구석에 놓인 세탁통에 물을 채웠다. 그리고 재희가 건넨 특수 세제를 뿌린 뒤, 이불을 빨래판 위에 올렸다.
그녀의 하얗고 고운 손가락이 거친 빨래판과 맞닿았다. 지상으로 추락한 이후 단 한 번도 육체노동을 해본 적 없는 그녀였다. 이불을 한 번 누를 때마다 가냘픈 허리에서 통증이 밀려왔고, 이마에는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흐읏…… 진짜 무거워…….”
프레이야는 입술을 깨물며 필사적으로 이불을 치대기 시작했다. 머릿속에는 오직 오늘 저녁에 먹을 매콤하고 쫄깃한 돼지 주물럭의 이미지만이 가득했다. 죽기보다 싫은 노동이었지만, 재희의 단호한 눈빛이 등 뒤에서 느껴지자 멈출 수 없었다.
바로 그 순간, 기적이 일어났다.
프레이야가 정직한 땀방울을 흘리며 빨래판을 밀어붙이는 순간, 그녀의 손끝에서 은은한 무지갯빛 안광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녀의 나태함이 꺾이고 정서적 오만 수치가 안정되자, 훼손되었던 생명의 신성이 가사 노동의 맥동과 공명하기 시작한 것이다.
“어……? 내 손에서 빛이…….”
“집중하세요, 프레이야 씨! 마력을 부드럽게 흘려보내세요!”
재희의 외침에 프레이야는 본능적으로 자신의 생명력을 빨래통의 물속으로 침투시켰다.
물이 순식간에 보석처럼 맑은 청록색으로 변하며 소용돌이쳤다. 옷감에 묻어 있던 찌든 때와 미세한 탁기가 맑은 기류가 되어 증발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전설로만 내려오던 ‘프레이야의 세탁용 마력 정화수’였다.
정화수가 이불의 올을 타고 흐르며, 이불은 마치 방금 창조된 것처럼 눈부시게 하얗고 뽀송뽀송한 질감으로 거듭났다.
“와아…….”
프레이야는 자신의 손끝에서 피어난 아름다운 정화의 기적에 넋을 잃었다. 늘 남들을 부리며 나태하게 군림하는 것만이 신의 위엄이라 믿었던 그녀에게, 자신의 정직한 노동과 땀방울로 무언가를 깨끗하게 정화해 낸 이 경험은 생전 처음 느끼는 기묘한 보람이자 감동이었다.
“끝이 아닙니다. 마지막 마무리까지 확실하게 하세요.”
재희가 미소를 지으며 빨래 건조대를 가리켰다.
프레이야는 젖은 대형 이불을 양손으로 굳건히 쥐고 옥상 평상 위로 섰다. 그리고 온 힘을 다해 이불을 허공을 향해 털어냈다.
펄럭—!
그 순간, 이불에서 방사된 생명의 마력이 따뜻한 봄바람이 되어 옥상 사방으로 휘몰아쳤다. 프레이야의 고유 권능인 ‘빨래 털기용 생명 바람’이 발동한 것이다.
향긋한 꽃향기를 머금은 미풍이 옥상 구석에 방치되어 말라죽어가던 화초들을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누렇게 시들어 생명을 잃었던 화초들이 순식간에 푸른 싹을 틔우더니, 찬란한 꽃망울을 터뜨리며 화려하게 만개하기 시작한 것이다.
“내 바람이…… 시든 생명을 살렸어…….”
프레이야는 만개한 꽃들을 바라보며 자신의 뺨에 흐르는 땀방울을 닦아냈다. 허리는 아프고 손가락 끝은 쓸려 붉어졌지만, 가슴속 깊은 곳에서 뜨거운 온기와 치유의 감각이 솟구쳐 올랐다. 그녀는 나른하게 웃으며 재희를 돌아보았다. 그 눈빛에는 더 이상 오만함이 아닌, 묘한 순종과 깊은 신뢰가 서려 있었다.
“재희야……. 나, 해냈어.”
“잘하셨습니다, 프레이야 씨. 아주 훌륭한 빨래였습니다.”
재희가 다가가 그녀의 젖은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어 넘겨주며 칭찬하자, 프레이야의 볼이 장미빛으로 물들었다.
하지만 평화로운 치유의 순간도 잠시.
프레이야가 이불을 건조대에 널어 말리기 위해 이불을 크게 펼쳐 올린 바로 그 순간이었다. 하얗게 빛나는 이불 천 너머로, 재희의 날카로운 시선이 열반장 골목길 아래를 향했다.
바람이 불어 이불 모퉁이가 살짝 걷힌 찰나.
열반장 앞 골목길의 음습한 그림자 속, 버려진 전신주 뒤편에서 기괴하고 붉은 안광이 번뜩였다. 그것은 지상의 평범한 인간의 눈빛이 아니었다. 사악한 주술의 기운을 가득 품은 채, 열반장의 이상 마력 반응을 집요하게 관찰하고 있는 사교 집단 ‘천벌교’의 정찰병이었다.
재희의 심안이 그 붉은 안광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순간, 정찰병의 실루엣은 연기처럼 어둠 속으로 스러지듯 사라졌다.
재희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마당의 소동이 끝난 지 하루 만에, 더 거대하고 음습한 천상의 추적과 지상의 광기가 열반장의 목을 조여오기 시작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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