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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채업자의 난입과 핑크색 고무장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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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심해, 아테나! 손가락 끝에 힘을 더 빼라고 했잖아! 그릇은 적이 아니야. 부드럽게 감싸 쥐듯이 닦아야지!”


열반장 301호의 부엌 싱크대 앞. 앞치마를 두른 임재희가 매서운 눈빛으로 잔소리를 퍼부었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주방 세제 거품을 잔뜩 묻힌 채 쩔쩔매고 있는 전쟁의 여신 아테나가 있었다.


그녀의 고결한 붉은 포니테일 머리칼이 평소와 달리 잔뜩 긴장한 듯 빳빳하게 서 있었다. 아테나의 양손에는 임재희가 그녀의 커다란 손 규격에 맞춰 가업 유품인 놋쇠 가위와 실로 튼튼하게 보강해 준 분홍색 고무장갑이 끼워져 있었다.


“으윽, 임재희……! 말은 쉽지만 이 미개한 지상의 점토 그릇들은 너무도 약하단 말이다! 조금만 힘을 주어도 바스러지려 하는데, 대체 어떻게 힘을 빼라는 것이냐!”


아테나가 이빨을 지그시 깨물며 신음하듯 대꾸했다. 그녀는 속으로 망원시장 정육점에서 보았던 마동필 사장의 현란한 발골 칼솜씨를 떠올렸다. 그 험악한 덩치의 사내도 고깃결을 따라 섬세하게 칼을 놀렸거늘, 전쟁의 여신인 내가 고작 이깟 설거지 그릇 하나 통제하지 못해서야 체면이 서지 않았다.


아테나는 자신의 파괴적인 완력을 억누르며, 재희가 가르쳐 준 ‘전쟁 여신의 설거지 격파술’을 거꾸로 응용하기 시작했다. 파괴가 아닌 극도의 섬세한 제어. 거품 속에서 접시가 뽀드득 소리를 내며 매끄럽게 닦여 나갈 때마다, 그녀의 머리 위 오만 게이지가 미세하게 요동쳤다.


그때, 낡은 식탁 한구석에서 펜이 사각거리는 소리가 멈추었다. 지혜의 여신 미네르바가 단정하게 빗어 내린 푸른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두툼한 노트 한 권을 재희에게 내밀었다.


“임재희. 약속했던 반성문 백 장이다. 지상의 기계 장치와 전자레인지의 물리적 주파수, 그리고 나의 논리적 오판에 대한 분석을 완벽히 마쳤다.”


재희가 노트를 받아 대충 훑어보았다. 빼곡하게 정자체로 쓰인 반성문에는 그녀의 깐깐한 성격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재희가 심안을 가늘게 뜨고 그녀의 상태를 확인하자, 머리 위 반투명한 게이지가 푸른빛으로 안정되어 있었다.


[미네르바 - 오만 수치: 60%]


“좋습니다. 아주 성실하게 잘 쓰셨네요. 역시 지혜의 여신답습니다.”


재희의 가벼운 칭찬에 미네르바는 안경을 치켜올리며 뺨을 붉혔다. 겉으로는 도도한 척하지만, 그녀 역시 재희의 다정한 온정과 정화의 접촉에 깊이 감화되어 가고 있었다.


재희는 부엌을 나가며 어제 가전 수리 명인 배영호 영감이 남긴 말을 떠올렸다. 마력이 깃든 여신들이 가전제품을 만질 때 발생하는 폭발을 막으려면, 조만간 철물점 오철민을 통해 ‘마력 방지 하이브리드 멀티탭’을 제작해야 했다. 하지만 당장 수중에는 푼돈밖에 남지 않은 가계 적자 상태였다.


“하아, 우유 배달 알바를 하나 더 늘려야 하나……”


재희가 가계부를 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던 바로 그 순간.


콰아아앙—!


열반장 앞마당에서 고막을 찢을 듯한 날카로운 파괴음이 울려 퍼졌다. 뒤이어 거친 사내들의 고함과 비명 섞인 소음이 301호실 창문을 흔들었다.


“이 빌라 구석탱이 집주인 놈 어디 갔어! 당장 기어 나와!”


재희가 급히 창밖을 내다보았다. 열반장 마당 및 분리수거장 한가운데에 검은 가죽 재킷을 입은 거구의 사내들이 쇠파이프를 든 채 난입해 있었다. 그 선봉에 선 자는 사채업자 배두식의 오른팔이자 행동대장인 마칠성이었다.


마칠성은 흉터 가득한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마당 구석에 단정하게 정렬되어 있던 옹기 장독대들을 쇠파이프로 사정없이 내리치고 있었다.


와장창! 쨍그랑!


“마칠성의 사채업자식 협박 난무”가 시작된 것이다. 재희의 돌아가신 부모님이 남겨둔 소중한 유산이자, 이웃들의 정이 담긴 장독들이 비참하게 깨져 나가며 붉은 고추장과 간장이 마당 흙바닥으로 쏟아졌다.


“저 미개한 범인 놈들이 감히……!”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던 아테나의 청동빛 안광이 분노로 번뜩였다. 그녀의 손에 끼워진 분홍색 고무장갑이 팽팽하게 긴장했다.


“다들 가만히 있어요. 제가 내려가서 해결하겠습니다. 지상의 일은 지상의 법으로 해결해야 하니까요.”


재희는 여신들을 만류하며 단호한 눈빛으로 문을 열고 마당으로 내려갔다.


***


깨진 옹기 조각이 뒹구는 마당으로 들어선 임재희는 차분하게 마칠성을 바라보았다.


“마 사장님. 무단 침입에 사유재산 파손입니다. 당장 멈추고 나가시죠. 경찰에 신고하기 전에.”


“경찰? 크하하하! 이 순진한 총각 놈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네!”


마칠성이 쇠파이프를 어깨에 걸치며 비열하게 웃었다.


“이 동네 재개발권이 우리 배두식 사장님 손에 들어오는 건 시간문제야. 이 낡아 빠진 빌라 하나 때문에 대세를 거스를 셈이냐? 당장 철거 동의서에 도장 찍고 꺼져!”


“거절합니다. 합법적인 절차를 밟지 않은 철거는 불법입니다.”


재희의 단호한 말에 마칠성의 얼굴이 험악하게 굳어졌다. 그가 쇠파이프를 바닥에 쓸며 재희에게 다가왔다.


“이 새끼가 곱게 말하니까 눈에 뵈는 게 없나 본데…… 주먹은 법보다 가까운 법이다!”


마칠성이 거친 손을 뻗어 재희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평범한 인간의 신체 능력을 지닌 재희를 가볍게 허공으로 들어 올렸다. 재희의 발이 땅에서 떨어지며 숨이 턱 막혀왔다.


하지만 재희는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의 심안이 작동하며 마칠성의 주머니 속에서 은밀하게 흘러나오는 기묘한 회색 마력의 흐름을 포착했다. 단순한 조폭의 난입이 아니었다. 배후에 무언가 천계의 어두운 그림자가 숨어 있었다.


“죽고 싶지 않으면 당장 도장 찍어, 이 기생충 같은 놈아!”


마칠성이 쇠파이프를 치켜들고 재희의 얼굴을 내리치려던 바로 그 순간.


“감히 내 전속 집사의 몸에 더러운 손을 대다니……!”


301호 발코니에서 붉은색 섬광과 같은 그림자가 마당으로 가볍게 뛰어내렸다.


쿵!


가벼운 착지음과 함께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그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젖은 꽃무늬 앞치마를 두르고, 양손에 눈부신 분홍색 고무장갑을 낀 아테나였다. 그녀의 눈빛은 당장이라도 마칠성의 목을 벨 듯이 타오르고 있었다.


“뭐야? 웬 반미친 외국인 년이 핑크 고무장갑을 끼고 난리야? 야, 저년 치워버려!”


마칠성의 부하 하나가 비웃으며 아테나를 향해 쇠파이프를 사정없이 휘둘렀다. 아테나는 피할 생각조차 하지 않은 채, 분홍색 고무장갑을 낀 왼손을 가볍게 들어 올렸다.


깡—!


단단한 쇠파이프가 그녀의 고무장갑에 부딪히는 순간, 맑은 금속음이 울렸다. 부러진 것은 아테나의 뼈가 아니었다. 쇠파이프가 그녀의 손바닥 형태에 맞춰 찌그러지며 멈춰 선 것이다.


“이, 이게 무슨……!”


“하찮은 쇳조각으로 누구를 겨누는 것이냐.”


아테나가 차갑게 읊조리며 오른손으로 쇠파이프의 중간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가볍게 힘을 주자, 두꺼운 강철 파이프가 마치 젖은 찰흙처럼 구겨지며 둥글게 말려버렸다.


공포가 순식간에 마당을 지배했다. 깡패들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이, 이 여자 괴물이다! 쏴, 쏴버려!”


다른 깡패들이 가스총과 단도를 꺼내 들며 달려들었지만, 반신 봉인이 미세하게 해제된 아테나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아테나는 가볍게 몸을 놀려 날아오는 단도들을 종이 한 장 차이로 피한 뒤, 깡패의 뺨을 가볍게 내리쳤다.


짝—!


가벼운 마찰음과 함께 깡패의 몸이 회전하며 분리수거장 쓰레기통 더미 위로 처박혔다. 또 다른 사내가 달려들자, 그녀는 그의 멱살을 잡아 그대로 공중으로 들어 던져 마당 구석의 흙바닥에 메꽂아 버렸다.


“히, 히익……!”


재희를 잡고 있던 마칠성은 공포에 질려 재희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쇠파이프를 휘두르려 했지만, 아테나가 한 걸음 다가와 그의 파이프를 가볍게 뺏어 들었다.


아테나는 마칠성이 보는 앞에서 쇠파이프를 반으로 접어 뭉개버린 뒤, 그의 뺨을 가볍게 손가락으로 튕겼다.


딱—!


“끄아아악!”


마칠성은 비명을 지르며 십여 미터를 날아가 열반장 대문 밖에 세워져 있던 대형 포크레인의 철판에 머리를 부딪치고 그대로 기절해 쓰러졌다.


“사, 살려주세요!”


남은 깡패들은 기절한 마칠성을 질질 끌고, 자신들이 타고 온 차량과 포크레인조차 버려둔 채 비명을 지르며 골목길 저편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마당에는 부서진 장독 조각들과 무거운 침묵만이 남았다.


재희는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며 한숨을 쉬었다. 그때, 아테나가 붉어진 얼굴로 슬그머니 재희에게 다가왔다. 그녀는 분홍색 고무장갑을 낀 오른손을 내밀며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재희야…… 큰일 났다. 저 사채업자 놈들의 머리통이 생각보다 너무 딱딱해서 고무장갑 끝이 아주 미세하게 찢어지고 말았다. 이거…… 다시 꿰매 줄 수 있느냐?”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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