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 젖은 김치찌개
“어이구, 총각! 이게 대체 무슨 고무 타는 냄새여?! 내 전당포 골목까지 매캐한 연기가 진동을 해서 뛰어왔구만!”
낡은 작업복을 입고 한쪽 눈에 돋보기를 비스듬히 걸친 백발의 억척스러운 영감, 가전 수리 명인 배영호가 코를 쥐어짜며 열반장 301호 부엌 문을 벌컥 열고 들어섰다. 그의 코끝에 탄 삼각김밥과 소화기 분말 가루의 매운 향이 훅 끼쳐왔다.
“아, 배 사장님! 오하셨어요?”
임재희는 소화기를 내려놓으며 짐짓 태연한 척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온몸에 하얗게 소화기 가루를 뒤집어쓴 꼴은 전혀 태연해 보이지 않았다. 그 뒤로는 머리에 먼지를 얹은 채 멍하니 서 있는 전쟁의 여신 아테나와, 밥상머리에 앉아 정자체로 반성문을 쓰기 시작한 지혜의 여신 미네르바가 보였다.
배영호 영감은 돋보기안경을 치켜올리며 처참하게 박살 난 전자레인지 잔해를 바라보았다. 시커멓게 그을린 플라스틱 껍데기와 산산조각이 난 유리창은 마치 전쟁터의 잔해 같았다.
“아니, 이게 대체 뭔 난리여? 총각이 폭탄이라도 제조한 거여?”
“아하하, 그게 아닙니다. 여기 새로 들어온 외국인 하우스메이트들이 지상... 아니, 한국 가전제품 사용법에 서툴러서요. 삼각김밥을 포장지째 넣고 돌리는 바람에 스파크가 튀었습니다.”
재희가 미네르바를 넌지시 쳐다보며 말하자, 미네르바는 볼을 붉히며 고개를 푹 숙였다. 배영호 영감은 혀를 쯧쯧 차며 전자레인지 잔해를 툭툭 건드렸다.
“어휴, 이 멍청한 처자들아! 금속을 전자레인지에 처넣으면 어쩌자는 거여! 내 이래서 가전제품에는 마력... 아니, 정전기 방지 필터라도 단단히 심어놔야 한다고 그렇게 말했거늘. 총각, 이건 수리 불가여. 내가 전당포에 굴러다니는 중고 놈 중에서 쓸만한 놈으로 하나 개조해서 가져다줄 테니 걱정 말어.”
“아, 정말 감사합니다, 사장님.”
배영호는 잔소리를 한바탕 퍼부은 뒤, 박살 난 전자레인지 잔해를 포대에 담아 짊어지고 301호를 나섰다.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부엌에는 다시 적막이 찾아왔다.
재희는 하아, 깊은 한숨을 내쉬며 냉장고 문을 열었다. 그리고 얼어붙었다.
텅 비어 있었다.
어제 여신들이 허겁지겁 해치운 김치찌개 냄비는 바닥까지 긁혀 있었고, 찬밥 한 덩이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있는 것이라곤 며칠 전에 사둔 생수 한 병이 전부였다.
“임재희……. 내 배에서 다시 기괴한 천둥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지상의 육체란 어찌 이리도 비참할 정도로 자주 영양 공급을 요구하는 것이냐?”
아테나가 자신의 탄탄한 복부를 움켜쥐며 신음하듯 말했다. 그녀의 붉은 포니테일 머리칼이 기운 없이 축 늘어져 있었다.
[아테나 - 오만 수치: 92%]
[상태: 극심한 공복 및 기력 저하]
그 옆에서 볼펜을 꽉 쥔 채 반성문을 쓰던 미네르바 역시 꼬르륵 소리를 내며 재희를 힐끔 쳐다보았다. 지혜의 여신다운 냉철함은 온데간데없고, 그저 굶주린 길고양이 같은 눈빛이었다.
재희는 주머니를 뒤적였다. 우유 배달과 편의점 알바를 뛰며 모은 꼬깃꼬깃한 만 원짜리 지폐 몇 장과 동전 몇 개가 만져졌다. 가계 적자가 뼈아팠지만, 이대로 굶길 수는 없었다.
“안 되겠네요. 시장에 다녀와야겠습니다. 아테나, 미네르바. 당신들도 따라오세요.”
“내가 왜 지상의 미개한 시장통에 가야 한단 말이냐? 나는 천계의 전쟁 여신이다!”
아테나가 반발하려 했지만, 재희는 단호하게 가계부를 들이밀었다.
“짐꾼이 필요해서 그렇습니다. 그리고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고 했을 텐데요? 안 따라오면 오늘 저녁은 진짜 물만 마실 줄 아세요.”
재희의 칼 같은 경고에 아테나는 잇새로 신음을 흘리며 결국 고개를 숙였다. 미네르바 역시 반성문 노트를 덮고 얌전히 일어섰다. 안방에서 나른하게 누워 자던 프레이야와 구석에 숨어있던 닉스는 두고, 세 사람은 망원시장 골목으로 향했다.
***
망원시장 골목은 평일 낮임에도 불구하고 장을 보러 나온 사람들로 활기가 넘쳐났다. 고소한 부침개 냄새, 달콤한 떡볶이 향기, 그리고 상인들의 우렁찬 목소리가 사방에서 뒤엉켰다.
재희의 뒤를 따르던 아테나와 미네르바는 비현실적인 미모와 기품을 풍기며 걸어갔다. 시장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두 여신에게로 쏠렸다.
“어머, 재희 총각! 옆에 이 눈부신 외국인 미녀들은 누구야? 모델들이여?”
망원시장 반찬가게 주모 최정자 이모가 뽀글머리를 흔들며 재희에게 아는 척을 해왔다. 그녀의 손에는 빨간 고무장갑이 끼워져 있었다.
“안녕하세요, 이모. 이번에 저희 빌라에 새로 들어온 세입자들입니다. 한국말이 서툴러서 제가 시장 구경 좀 시켜주고 있어요.”
“어휴, 세입자 복이 아주 터졌네, 터졌어! 배고파 보이는데 이거 김치전 좀 맛보고 가!”
최정자 이모가 갓 부쳐낸 노릇노릇한 김치전 조각을 이쑤시개에 꽂아 아테나의 입가로 내밀었다. 아테나는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서며 경계했다.
“감히 신전의 주인인 내게 이 정체불명의 기름진 밀가루 덩어리를 들이밀다니…….”
“아테나, 이모가 호의로 주시는 겁니다. 감사히 받아먹으세요. 안 먹으면 압수입니다.”
재희가 뒤에서 나직하게 속삭이자, 아테나는 침을 꿀컥 삼키며 조심스럽게 김치전을 받아 한 입 베어 물었다.
바삭!
기름진 감칠맛과 새콤한 김치 맛이 입안에 퍼지는 순간, 아테나의 눈동자가 확장되었다.
“오오……! 이 바삭하고 매콤한 식감은 대체 무엇이냐! 천상의 신선한 과실보다 어찌 이리 위장을 자극하는 감칠맛이 강하단 말이냐!”
“맛있지? 많이 먹어, 예쁜 처자!”
최정자 이모가 쾌활하게 웃으며 김치전을 한 장 더 얹어주었다. 아테나는 체통도 잊은 채 김치전을 우물거리며 감격한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을 보던 미네르바 역시 침을 삼키며 조심스럽게 한 조각을 받아먹고는 깊은 충격을 받은 듯 안경을 치켜올렸다.
바로 그때, 시장 삼거리 떡집 골목에서 매서운 눈빛의 노부인이 걸어 나왔다. 망원시장 대박 떡집 할머니, 김순자였다.
“에잉! 젊은 처자들이 인사가 왜 그렇게 뻣뻣해! 아무리 외국인이라도 어른을 봤으면 공손하게 배꼽인사를 해야지, 턱을 치켜들고 서 있냐!”
김순자 할머니의 촌철살인 같은 호통에 아테나의 얼굴이 굳어졌다.
“감히 하찮은 범인의 늙은이가 내게 훈계를?! 나는 전쟁의 여신……!”
“인사하세요. 안 하면 오늘 저녁 찌개는 진짜 국물 한 방울 없습니다.”
재희가 아테나의 옆구리를 손가락으로 쿡 찌르며 속삭였다. 그의 눈빛은 장난이 아니었다. 아테나는 부르르 떨며 결국 허리를 숙여 엉성하게 인사를 건넸다.
“……안, 안녕하신가, 지상의 노인이여.”
“안녕하신가라니! 안녕하세요, 지! 그래도 녀석들이 싹수는 있구만. 배고파 보이는데 이거 갓 찐 시루떡 좀 먹어라.”
김순자 할머니는 츤데레처럼 툴툴거리면서도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뜻한 팥시루떡 한 팩을 재희의 손에 쥐여주었다. 대가 없는 인간의 따뜻한 호의와 정이 여신들의 오만한 마음을 미세하게 녹여내기 시작했다.
재희는 감사 인사를 전한 뒤, 대성 정육점으로 향했다. 가게 앞에는 근육질 풍채에 분홍색 앞치마를 두른 거한, 마동필 사장이 고기를 썰고 있었다.
“오, 재희 총각 왔어? 오늘 지리산 방목지에서 아주 끝내주는 흑돼지가 들어왔네. 전지 부위인데 마블링이 아주 예술이여.”
“사장님, 찌개용으로 쓸 건데 조금만 저렴하게 주실 수 있을까요? 요즘 가계가 좀 빡빡해서요.”
재희가 멋쩍게 웃자, 마동필 사장은 듬직한 미소를 지으며 칼을 내리쳤다.
“어휴, 우리 성실한 재희 총각이 부탁하는데 당연히 싸게 줘야지! 옆에 처자들도 배고파 보이는데 내가 덤으로 더 얹어줄게!”
마동필은 발도식 칼솜씨로 마동필의 특제 흑돼지 전지를 두툼하게 썰어 저울에 올렸다. 기준 무게를 한참 초과했음에도 그는 원가 이하의 가격으로 고기를 포장해 주었다. 고기의 붉은 살점 사이로 은은한 영기가 흐르는 듯했다. 아테나는 마동필의 화려한 발골 칼솜씨와 고기에서 풍기는 강력한 단백질 기운에 눈을 떼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야채가게에서 송순이 할머니에게 망원시장 특산 영물 배추 한 포기를 덤으로 얻은 재희는, 양손 가득 찬거리를 들고 여신들과 함께 열반장으로 복귀했다.
***
열반장 301호 부엌.
재희는 낡은 꽃무늬 앞치마를 두르고 무쇠 냄비를 가스레인지 위에 올렸다. 아테나와 미네르바는 식탁에 나란히 앉아 재희의 손끝만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녀들의 배에서는 수시로 꼬르륵 소리가 합창을 하듯 울려 퍼졌다.
재희는 먼저 냄비에 참기름을 살짝 두르고, 마동필 사장에게 공수한 두툼한 흑돼지 전지를 듬뿍 썰어 넣었다.
치이이이익—!
고기가 뜨거운 무쇠 바닥에 닿으며 내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고소한 돼지기름 냄새가 부엌 전체로 퍼져나갔다. 아테나는 자신도 모르게 밥상 앞으로 상체를 바짝 밀착시켰다.
재희는 겉면이 노릇하게 익은 돼지고기 위로 잘 익은 김치와 송순이 할머니의 영물 배추를 숭덩숭덩 썰어 넣었다. 배추가 칼날에 잘릴 때마다 맑고 청량한 즙이 흘러나왔다.
여기에 고춧가루와 마늘, 그리고 외조모 서정은의 가계 비책 노트에서 해독한 약선 비법 배합을 미세하게 첨가했다. 재희가 요리에 집중하며 정성을 불어넣자, 그의 손가락 끝에 깃든 미세한 가사 마력과 정화의 피 기운이 식자재들과 공명하기 시작했다.
보글보글보글보글—!
냄비 뚜껑 틈새로 은은한 금빛 마력 입자가 섞인 붉은 증기가 피어올랐다. 칼칼하면서도 묵직하고, 동시에 영혼을 부드럽게 감싸 안는 듯한 압도적인 향취가 부엌을 가득 메웠다.
“이, 이 향은 대체 무엇이냐……? 단순한 지상의 식자재 배합이 어찌 천상의 제단에서 바치던 공물보다 더 깊은 영적 파동을 풍기는 거지?”
미네르바가 안경알을 붉은 증기로 뿌옇게 적시며 경악했다.
“다 됐습니다. 밥그릇 놓으세요.”
재희가 갓 지은 하얀 쌀밥을 고두밥으로 꾹꾹 눌러 담아 대접에 올리고, 그 옆에 보글보글 끓는 김치찌개를 가득 대접해 냈다. 두툼한 흑돼지 고기와 영물 배추, 그리고 칼칼한 붉은 국물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네 여신이 식탁에 모여 앉았다. 프레이야와 닉스도 냄새에 이끌려 슬그머니 자리를 잡았다.
“잘 먹겠습니다.”
재희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미네르바가 가장 먼저 조심스럽게 국물을 한 숟가락 떠서 입에 넣었다.
그리고 그녀의 움직임이 굳어졌다.
“미네르바? 왜 그러느냐? 독이라도 든 것이냐?”
아테나가 경계하며 묻는 순간, 미네르바의 눈가에서 맑은 눈물방울이 툭 떨어져 밥그릇으로 흘러내렸다.
“……따뜻해.”
미네르바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칼칼한 국물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는 순간, 차갑게 얼어붙어 있던 그녀의 지혜의 마력 회로가 봄눈 녹듯 부드럽게 윤활되기 시작했다. 천계에서 동료 신들에게 배신당하고 지상으로 추락하며 겪었던 극심한 고독감, 그리고 영혼을 갉아먹던 만성적인 두통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그것은 단순한 미각의 충격이 아니었다. 상처받은 그녀들의 신성을 근본적으로 치유하는 ‘신성 공명 가정식’의 이적이었다.
[미네르바 - 오만 수치: 70% -> 60%]
[알림: 미네르바가 E급 미세 공명 상태에 진입합니다. 지상에서의 마력 회로가 부드럽게 활성화됩니다.]
그 모습을 본 아테나 역시 돼지고기 한 점과 쌀밥을 크게 한 숟가락 떠서 입으로 가져갔다.
우물우물.
두툼한 흑돼지 전지의 쫄깃한 식감과 매콤한 국물이 입안에서 폭발했다. 고기에 담긴 영적 단백질 기운이 아테나의 전신맥으로 급속 충전되며, 소실되었던 전쟁의 투기 불씨가 미세하게 각성했다.
“아아아……!”
아테나는 밥숟가락을 쥔 채 어깨를 파르르 떨었다. 그녀의 눈에서도 뜨거운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천계의 화려하고 차가운 황금 보좌에서 먹던 그 어떤 신들의 만찬보다, 인간 청년 임재희가 낡은 양은 냄비에 끓여낸 이 소박한 김치찌개 한 그릇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따뜻하고 위안이 되었다.
“맛있다……. 정말로 맛있다, 임재희…….”
오만방자하던 전쟁의 여신 아테나가 눈물을 흘리며 밥그릇을 싹싹 비워내기 시작했다. 프레이야와 닉스 역시 찌개 맛에 완전히 매료되어 말 한마디 없이 허겁지겁 숟가락을 놀렸다.
[아테나 - 오만 수치: 92% -> 80%]
[알림: 아테나가 E급 미세 공명 상태에 도달합니다. 소실되었던 투기의 불씨가 미세하게 각성합니다.]
네 여신은 밥그릇과 찌개 냄비를 바닥까지 깨끗하게 긁어 비워냈다. 부엌에는 만족스러운 숨소리와 함께 따뜻한 정적이 감돌았다.
재희는 빈 그릇들을 바라보며 만족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그때, 아테나가 붉어진 얼굴로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핑크색 수선 고무장갑이 걸려 있는 싱크대 쪽을 바라보더니, 부끄러운 듯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재희에게 다가왔다.
“이 미개... 아니, 재희야. 내가 설거지를 하겠다! 내 비록 힘 조절이 서툴러 그릇을 깨트릴까 두렵지만, 이번에는 네가 준 핑크색 고무장갑을 끼고 절대 깨뜨리지 않도록 필사적으로 노력하마! 그러니…….”
아테나는 뺨을 붉히며 고개를 푹 숙인 채 나지막이 속삭였다.
“그러니 다음에도 이 눈물 나게 맛있는 김치찌개를 끓여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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