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레인지와 오만함의 폭발
“내 집에서 깽판 치면 오늘 저녁은 물론이고 평생 굶을 줄 알아라. 아테나, 당장 그 손 떼지 못해?”
임재희의 나직하지만 뼈가 시릴 정도로 차가운 목소리가 좁은 부엌 공기를 얼려버렸다. 싱크대 하단의 구리 배관을 우그러뜨릴 기세로 움켜쥐고 있던 아테나의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보통의 인간 사내라면 자신들의 눈부신 미모와 위압감에 납작 엎드려 쩔쩔맸을 터였다. 하지만 눈앞의 청년은 달랐다. 그의 손에 들린 낡은 가죽 가계부는 단순한 장부가 아니었다. 그것은 이 집안의 절대적인 생명줄이자, 굶주린 자신들의 목줄을 쥔 보이지 않는 족쇄였다.
꼬르르륵—.
정직하기 짝이 없는 배꼽시계 소리가 다시 한번 아테나의 탄탄한 복부에서 울려 퍼졌다. 아테나의 붉은 머리칼 사이로 드러난 귀끝이 수치심으로 터질 듯 붉어졌다. 재희의 눈동자가 은은한 황동빛으로 빛나며 그녀들의 머리 위를 훑었다.
[아테나 - 오만 수치: 95% -> 92%]
배고픔이라는 지극히 인간적이고 비참한 한계 앞에서, 전쟁의 여신이 지닌 오만함이 미세하게 금 가기 시작한 증거였다. 아테나는 결국 잇새로 신음 같은 한숨을 내쉬며 싱크대 배관에서 손을 떼어냈다.
“……내, 내 감히 굶주림에 일시적인 이성을 잃었을 뿐이다. 미개한 범인이여, 약속대로 가사 노동을 이행할 테니 당장 그 구수한 냄새가 나는 음식을 대령해라.”
“규칙 제1조를 명심하세요. 이 집 안에서 신력을 쓰거나 기물을 파손하면 밥상은 국물도 없습니다.”
재희는 가계부를 탁 소리 나게 닫고는 냉장고에서 낮에 먹다 남은 김치찌개 냄새가 은은하게 배어 있는 냄비와 찬밥을 꺼냈다. 가스레인지 불을 켜고 찌개를 데우는 동안, 거실 구석에 웅크려 있던 미네르바가 안경을 지켜올리며 깐깐하게 물었다.
“인간이여. 저 붉고 시큼한 냄새가 나는 액체는 대체 무엇이지? 천계의 넥타르나 마력 회복용 영약과는 주파수가 완전히 다르다. 지상의 미개한 유기물 배합에 불과해 보이는데, 정말로 우리의 훼손된 마력 회로를 안정시킬 수 있다는 건가?”
“떠들 시간에 숟가락이나 놓으시죠, 지혜의 여신님.”
재희는 무심하게 대답하며 낡은 밥상 위에 수저 네 벌과 뜨끈한 밥, 그리고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김치찌개를 올렸다.
그릇이 상에 놓이기 무섭게, 네 여신은 체통도 잊은 채 숟가락을 들었다. 한 입 먹는 순간, 그녀들의 눈동자가 일제히 확장되었다. 매콤하고 칼칼한 김치의 산미와 돼지고기의 묵직한 감칠맛이 굶주린 위장을 타고 내려가며, 소실되었던 마력의 불씨를 아주 미세하게 자극하는 이적이 일어난 것이다.
“오오……! 이, 이것은……!”
아테나는 비명을 지르듯 감탄하며 밥그릇에 코를 박았고, 프레이야는 나른하게 눈을 감으며 입가에 묻은 국물을 핥았다. 소심한 닉스마저도 구석에서 조용히 숟가락질을 멈추지 않았다. 미네르바는 찌개 속 두부를 씹으며 머릿속을 찌르던 만성적인 두통이 아주 미세하게 완화되는 것을 느끼고 깊은 충격을 받았다.
[미네르바 - 오만 수치: 95% -> 93%]
“믿을 수 없군……. 이 단순한 염분과 캡사이신의 결합이 어떻게 우리의 신성 회로와 공명하는 거지? 이 집안의 환경 자체가 무언가 뒤틀려 있어…….”
“맛있으면 군말 말고 드세요. 다 먹고 나면 설거지는 아테나, 부엌 정리는 미네르바 당신입니다.”
재희는 그녀들이 허겁지겁 밥을 비우는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며 남은 가계부 장부를 정리했다.
다음 날 아침.
새벽 우유 배달과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마친 재희는 땀에 젖은 몸으로 열반장 301호실의 문을 열었다. 거실에는 밤새 잠을 설친 여신들이 소파와 바닥에 제멋대로 널브러져 있었다.
“다들 일어나세요. 아침 가사 노동 시간입니다.”
재희의 얄짤없는 목소리에 아테나가 이불을 걷어차며 괴성을 질렀다.
“으으윽! 이 미개한 범인 놈이 감히 전쟁의 여신의 단잠을 깨우다니! 지상에 떨어진 이후로 온몸의 근육이 비명을 지르고 있단 말이다!”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 오늘 낮 동안 제가 집을 비우는 동안 가사 분담을 철저히 하세요. 미네르바, 당신은 오늘 청소와 주방 정리를 전담합니다.”
재희는 냉장고 옆 테이블 위에 편의점에서 폐기 상품으로 가져온 은박지에 싸인 삼각김밥 두 개를 올려놓았다.
“점심은 이걸로 해결하세요. 먹기 전에 반드시 저기 있는 전자레인지에 넣고 데워 먹어야 합니다. 단, 주의할 점이 있어요.”
재희는 전자레인지를 가리키며 미네르바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이건 전자레인지라는 기계입니다. 마찰 주파수를 이용해 음식을 데우는 현대 과학의 산물이죠. 절대, 무슨 일이 있어도 저 은박지(알루미늄)를 씌운 채로 넣고 돌리면 안 됩니다. 금속 성분이 들어가면 스파크가 일어나서 폭발합니다. 반드시 은박지를 완전히 벗겨내고 접시에 담아서 돌리세요. 알겠습니까?”
미네르바는 코웃음을 치며 안경을 치켜올렸다.
“흥, 지혜의 여신인 나에게 고작 그런 조잡한 상자때기의 원리를 가르치려 드는가? 인간의 얄팍한 과학 기술 따위, 내 천계의 마도 공학 수식에 비하면 개미의 발버둥에 불과하다. 걱정 말고 네 미개한 일터로 꺼지거라.”
[미네르바 - 오만 수치: 93%]
[경고: 미네르바의 오만 수치가 높아 임재희의 경고를 무시할 확률이 매우 높습니다.]
재희는 머리 위에 떠오른 붉은 게이지를 보며 한숨을 쉬었지만, 당장 편의점 정산 알바 시간이 임박했기에 서둘러 집을 나설 수밖에 없었다. “꼭 벗기고 돌려야 합니다!”라는 마지막 경고만을 남긴 채.
임재희가 문을 닫고 나가자, 부엌에는 묘한 침묵이 감돌았다.
아테나는 마당 청소를 하겠다며 투덜거리며 빗자루를 들고 나갔고, 프레이야와 닉스는 안방에서 다시 잠 청하기 바빴다. 결국 주방에 남은 것은 청소 담당인 미네르바뿐이었다.
몇 시간이 흐르고 점심시간이 되자, 미네르바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요동쳤다. 그녀는 테이블 위에 놓인 은박지에 싸인 삼각김밥을 내려다보았다.
“인간 사내가 아주 유난을 떨고 갔군. 은박지를 벗겨서 접시에 담으라니. 번거롭기 짝이 없는 짓이다.”
미네르바는 삼각김밥을 손에 쥐고 전자레인지 앞으로 다가갔다. 은빛으로 빛나는 알루미늄 은박지가 그녀의 안경알에 반사되었다.
“내 지혜의 공식으로 분석하건대, 이 은박지는 금속 성분이다. 천계의 마도 공학에서 금속은 마력과 열전도율을 극대화하는 훌륭한 매개체지. 인간 사내는 무지하여 금속이 열을 차단하거나 기계를 망가뜨린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내 마력 회로를 미세하게 정합하여 기동한다면 오히려 열전도를 수십 배는 가속화할 수 있다.”
그녀는 자신의 완벽한 지혜가 지상의 조잡한 가전제품 따위보다 우월함을 증명하고 싶었다. 임재희라는 한낱 인간의 잔소리에 길들여지는 듯한 기분이 내심 불쾌했던 것이다.
미네르바는 은박지를 벗기기는커녕, 오히려 삼각김밥을 감싼 은박지를 더 단단히 여몄다. 그리고 전자레인지 유리문을 열고 철제 내부 바닥에 그대로 올려놓았다.
“지상의 조잡한 상자여, 내 지혜의 여신 미네르바의 통제 하에 최고의 효율로 기동하라.”
그녀는 전자레인지의 다이얼을 힘차게 돌려 5분에 맞추고 시작 버튼을 눌렀다.
웅— 하는 낮은 기계음과 함께 내부의 노란 조명이 켜지고 접시가 회전하기 시작했다. 미네르바는 팔짱을 낀 채 오만한 미소를 지으며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하지만 평화는 단 3초도 가지 않았다.
파지직! 파직!
갑자기 전자레인지 내부에서 푸른빛의 날카로운 스파크가 번개처럼 내리꽂히며 불꽃이 튀기기 시작했다. 은박지의 모서리마다 기괴한 아크 방전이 일어나며 내부 유리창을 사정없이 때렸다.
“어, 어라? 이, 이것은 마력의 과부하 주파수가 아닌가?”
미네르바의 당황한 눈동자 너머로 전자레인지 내부가 순식간에 시뻘건 화염으로 휩싸이는 것이 보였다. 알루미늄 은박지가 열을 견디지 못하고 불타오르며 삼각김밥의 비닐 포장지에 불이 붙은 것이다.
펑—!
귀를 찢는 듯한 폭음과 함께 전자레인지의 전면 유리문이 바깥쪽으로 부서져 내리며 시꺼먼 연기와 불길이 부엌 사방으로 뿜어져 나왔다. 싱크대 벽면에 붙은 시트지에 불길이 옮겨붙기 시작했다.
“꺄악!”
미네르바는 뒤로 나자빠지며 비명을 질렀다. 폭발의 충격으로 그녀의 은빛 안경이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불, 불이다! 아테나! 프레이야! 당장 와서 이 사악한 불길을 꺼라!”
거실과 안방에서 비명 소리를 들은 여신들이 헐레벌떡 부엌으로 뛰어왔다.
“무슨 일이냐, 미네르바! 적의 습격인가?!”
아테나가 청동 창날을 겨누며 소리쳤지만, 부엌을 가득 메운 매캐한 연기와 시뻘건 불길을 보고 경악했다. 프레이야는 코를 감싸 쥐며 뒤로 물러섰고, 닉스는 연기를 보고 겁에 질려 구석으로 숨어버렸다.
“미네르바, 이 멍청한 여자야!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나, 나는 그저 마도 공학적 전도율을 극대화하려 했을 뿐이다! 아테나, 당장 네 투기로 불길을 제압해라!”
“신력이 없는데 무슨 수로 투기를 뿜는단 말이냐!”
아테나가 억지로 마력을 쥐어짜 불길을 향해 손을 뻗었지만, 열반장의 은닉 결계와 그녀들의 ‘몰락 상태’ 제약 때문에 손끝에서는 미미한 붉은 연기만 피어오르다 사그라질 뿐이었다. 미네르바 역시 다급하게 차가운 수분 마력을 쥐어짜려 했으나, 오히려 연기만 더 피워 올리며 불길을 자극할 뿐이었다.
불길은 싱크대 상부장까지 번지며 부엌 전체를 집어삼킬 기세로 무섭게 타올랐다. 여신들은 지상의 평범한 화재 앞에서도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자신들의 무력함에 극심한 공포와 좌절감을 느꼈다. 천계를 호령하던 신들이 고작 인간의 불장난에 타 죽을 위기에 처한 것이다.
바로 그 순간, 부엌문이 거칠게 열렸다.
“비켜요!”
땀 범벅이 된 채 헐레벌떡 뛰어 들어온 임재희였다. 그는 알바 도중 가슴의 조율자 문양이 격렬하게 맥동하는 경고를 느끼고 본능적으로 열반장으로 달려온 터였다.
재희의 눈에 시뻘건 화염과 연기 속에서 쿨럭이며 주저앉아 있는 미네르바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녀의 머리 위 오만 게이지는 공포와 죄책감으로 미친 듯이 요동치고 있었다.
[미네르바 - 오만 수치: 93% -> 80%]
[상태: 극심한 공포 및 자괴감]
재희는 화를 내거나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 그의 몸이 먼저 반응했다. 그는 신발장 옆에 비치해 두었던 빨간 소화기를 단숨에 낚아챘다.
안전핀을 뽑는 그의 손길은 거침이 없었고,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쉬이이이이익—!
소화기 노즐에서 뿜어져 나온 차가운 백색 분말 폭풍이 부엌 전체를 뒤덮었다. 재희는 불길의 진원지인 전자레인지 잔해와 싱크대 상부장을 향해 소화액을 사정없이 분사했다. 화재의 열기와 백색 가루가 뒤엉켜 부엌은 순식간에 하얀 안개 속에 갇힌 듯 몽환적이고도 처참한 풍경으로 변했다.
치이이익…….
마지막 불꽃이 힘없이 꺼지며 검은 연기만이 가늘게 피어올랐다.
부엌은 완벽한 침묵에 잠겼다. 타버린 가전제품의 메케한 냄새와 소화기 분말의 텁텁한 공기만이 가득했다. 여신들은 하얗게 가루를 뒤집어쓴 채 숨을 죽이고 재희의 눈치를 보았다.
그가 화를 낼 것이다. 자신들을 이 가난하고 낡은 집에서 당장 쫓아낼지도 모른다. 미네르바는 바닥에 떨어진 안경을 더듬어 쓰며 입술을 짓씹었다. 자신의 ‘완벽한 지혜’가 지상의 조잡한 기계 하나 제어하지 못하고 대참사를 일으켰다는 사실이 그녀의 영혼을 갈가리 찢어놓았다.
“……미안하다, 인간이여. 내 오만이 화를 불렀군. 당장 우리를 쫓아내도 할 말이 없다.”
미네르바가 고개를 숙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재희는 소화기를 바닥에 내려놓고 묵묵히 그녀에게 걸어왔다. 그의 트레이닝바지는 소화기 가루로 하얗게 더러워져 있었고, 이마에는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재희는 미네르바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리고 그녀가 황급히 숨기려던 오른손을 억지로 잡아끌었다.
“아……!”
미네르바가 신음을 흘렸다. 그녀의 오른손 손가락과 손등은 전자레인지 폭발 당시 튄 불꽃과 뜨거운 열기로 인해 벌겋게 익어 있었고, 군데군데 검은 그을음과 함께 물집이 잡혀 있었다.
재희는 아무 말 없이 그녀의 상처 입은 손을 양손으로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아프잖아 왜 가만히 있어요.”
그의 목소리는 화가 나 있지 않았다. 오히려 심해 깊은 곳의 바다처럼 차분하고 다정했다.
재희가 눈을 감자, 그의 심장 부근에 새겨진 정화의 혈맥이 부드럽게 고동치기 시작했다. 그의 양 손끝에서 은은하고 따뜻한 금빛 물결무늬 파동이 방사되어 미네르바의 상처 입은 손을 감싸 안았다.
[특수 능력: ‘정화의 접촉’이 활성화됩니다.]
[미네르바의 화상 상처가 치유되며, 폭주하던 마력 회로가 급속 안정됩니다.]
“아아…….”
미네르바는 자신도 모르게 붉은 입술 사이로 나지막한 탄성을 내뱉었다.
재희의 손길이 닿는 순간, 전신을 찢어발기는 듯했던 화상의 극심한 통증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뜨겁게 타오르던 상처 부위로 시원하고 맑은 생명력이 스며들어 벌겋게 일어났던 피부를 순식간에 원래의 고운 우윳빛으로 되돌려놓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폭발의 여파로 엉망진창으로 뒤엉켜 비명을 지르던 그녀의 지혜의 마력 회로가, 재희의 손끝에서 흘러나오는 온기를 타고 완벽한 조화를 이루며 제자리를 찾아갔다. 머리를 깨뜨릴 것 같던 만성적인 두통이 눈 녹듯 사라지고, 영혼의 가장 깊은 곳까지 따뜻한 안식처에 도달한 듯한 평온함이 밀려왔다.
미네르바는 멍하니 재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의 수수한 검은 머리칼 끝에 소화기 분말 가루가 하얗게 묻어 있었다. 자신들을 위해 쓰리잡을 뛰며 피땀 흘려 번 돈으로 산 가전제품이 박살 났음에도, 그는 자신의 재산 피해보다 자신들의 다친 몸을 먼저 보듬고 있었다.
지혜의 여신으로서 천계의 온갖 고결하고 영리한 존재들을 보아왔던 미네르바였다. 하지만 그 어떤 위대한 신도, 현자도 이토록 아무런 대가 없이 자신을 온전히 내던져 타인의 상처를 어루만져 준 적은 없었다.
그녀가 그토록 하찮게 여겼던 ‘인간의 다정함’이, 그녀가 가진 완벽한 지혜의 장벽을 단숨에 무너뜨리고 심장 가장 깊은 곳에 지워지지 않을 거대한 낙인을 찍어버린 순간이었다.
뚝, 뚝.
미네르바의 눈동자에서 맑은 눈물방울이 흘러내려 재희의 손등 위로 떨어졌다.
[미네르바 - 오만 수치: 80% -> 70%]
[알림: 미네르바가 최초로 인간의 감사함과 죄책감을 학습했습니다. 신성 봉인이 미세하게 완화됩니다.]
재희는 그녀의 눈물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닦아주며 천천히 일어섰다. 그리고 안방 책상에서 낡은 공책 한 권과 모나미 볼펜 한 자루를 가져와 미네르바의 품에 툭 안겨주었다.
“치료는 끝났으니, 이제 벌을 받아야죠.”
미네르바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재희를 올려다보았다.
“벌…… 이라니?”
“열반장 가사 규칙 제1조 위반, 그리고 가장의 경고 무시죄입니다. 거기 앉아서 ‘나는 앞으로 전자레인지에 은박지를 넣지 않겠습니다’라는 문장을 정자체로 백 장 써서 오늘 저녁 전까지 제출하세요. 한 장이라도 흐트러지면 오늘 저녁 된장찌개는 없습니다.”
재희의 단호하고 엄격한 가장의 태도에 미네르바는 반박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녀는 오히려 볼을 붉히며 공책을 소중하게 품에 안고 밥상 머리에 정좌하여 앉았다.
“……알겠다. 지혜의 여신의 이름을 걸고, 한 자의 오차도 없이 완벽하게 작성해 제출하지.”
그녀의 손끝이 부르르 떨리며 볼펜을 쥐는 모습은 어딘가 모르게 귀엽고 애처로웠다. 아테나와 프레이야는 그 모습을 보며 묘한 질투심과 안도감을 동시에 느끼며 침을 삼켰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킁킁, 킁킁킁.
부엌 복도 저편에서 기괴한 콧바람 소리와 함께 둔중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어이구, 총각! 이게 대체 무슨 고무 타는 냄새여?! 내 전당포 골목까지 매캐한 연기가 진동을 해서 뛰어왔구만!”
낡은 작업복을 입고 한쪽 눈에 돋보기를 비스듬히 걸친 백발의 억척스러운 영감—가전 수리 명인 배영호가 코를 쥐어짜며 열반장 301호 부엌 문을 벌컥 열고 들어섰다.
그의 코끝에 탄 삼각김밥과 소화기 분말 가루의 매운 향이 훅 끼쳐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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