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우물과 광신의 제단
쩍쩍 갈라진 석조 벽면 너머로 드러난 광경은, 지상의 지하 하수도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을 만큼 장엄하고도 기괴한 이계(異界)의 성전이었다.
수십 미터는 족히 되어 보이는 높은 천장에는 피처럼 붉은 인광을 발하는 종유석들이 고드름처럼 매달려 있었고, 성전 바닥 사방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거대한 해골 형상의 석상들이 기괴한 주술 문양을 온몸에 새긴 채 도열해 있었다. 성전 전체를 지배하는 것은 코를 찌르는 피비린내와, 영혼을 직접 갉아먹는 듯한 음습하고 사악한 마기의 파동이었다.
그리고 그 기괴한 성전의 한가운데, 솟구쳐 오른 제단 중앙에 깊게 패인 거대한 구덩이가 존재했다.
그것이 바로 고대 유물 감정사 고진태가 경고했던 사악한 장치, [영혼의 우물]이었다.
우물 안쪽에서는 수백 명의 원혼들이 뒤엉킨 검붉은 마력의 소용돌이가 부글부글 끓어오르며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우물 위 허공, 검붉은 사슬에 묶인 채 매달려 있는 상인들의 모습이 재희의 심안에 똑똑히 포착되었다.
“할머니……!”
재희의 입술이 가볍게 떨렸다.
사슬 가장 안쪽에 매달려 있는 송순이 할머니의 얼굴은 이미 생기를 잃고 하얗게 질려 있었다. 허공에 매달린 상인들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맑은 생명의 에센스가, 아래의 우물 속으로 가느다란 실선이 되어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인질들의 영혼이 완전히 소멸하기 직전의 비참한 상태였다. 가슴속 깊은 곳에서 억눌려 있던 분노가 뜨겁게 끓어올랐다.
“오오! 마침내 위대한 파멸의 신께서 지상에 강림하실 준비가 끝났도다! 찬란한 천상의 피가 이 더러운 지상의 제단을 정화하리라!”
제단 중앙, 해골이 그려진 붉은 예복을 입은 기괴한 노인이 성배를 높이 치켜든 채 광기 어린 목소리로 소리치고 있었다. 천벌교 서울지부를 이끄는 원흉, 교주 황태천이었다. 그의 검은 안광에서 뿜어져 나오는 타락한 신성의 파동이 성전 전체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기괴한 주술 성소와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단정한 검은 정장 차림의 사내가 냉혹한 눈빛으로 서 있었다. 대기업 태성그룹 부회장 송민우의 비서이자 해결사인 김도윤이었다. 그는 무전기를 귀에 댄 채, 침입한 재희 일행을 차갑게 내려다보며 나직하게 명령했다.
“서두르십시오, 교주. 쥐새끼들이 기어 들어왔습니다. 경호대, 즉시 저 쓰레기들을 처단해라.”
김도윤의 신호가 떨어지기 무섭게, 제단 사방의 음영 속에서 검은 망토를 두른 수백 명의 천벌교 광신도들이 주술 단도를 뽑아 들고 일제히 재희 일행을 향해 쏟아져 나왔다. 하수도의 어둠을 가득 메우는 광신의 군단이었다.
“이 미천한 광신도 놈들이…… 감히 누구 앞을 가로막느냐!”
아테나가 청동빛 투기를 폭발시키며 선봉으로 치고 나갔다. 아침에 먹은 특제 흑돼지 주물럭 덕분에 일시적으로 충전된 D급 반신 무력이 그녀의 전신맥을 타고 폭풍처럼 몰아쳤다. 아테나는 재희가 수선해 준 분홍색 고무장갑을 낀 손으로 대나무 빗자루를 휘둘렀다.
콰아아앙—!
단순한 휘두름이었으나, 빗자루 끝에서 방사된 청동빛 충격파가 광신도들의 장벽을 그대로 강타했다.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와 함께 수십 명의 광신도들이 허공으로 날아가 석상에 부딪치며 추풍낙엽처럼 나가떨어졌다. 아테나는 빗자루가 부러지자 아예 맨손으로 적들의 멱살을 잡아채 바닥에 내리꽂으며 광폭하게 진격로를 개척했다. 적들의 주술 단도 공격은 그녀의 핑크빛 고무장갑 장막에 부딪쳐 불꽃을 튀기며 무력하게 튕겨 나갔다.
하지만 제단 중앙의 황태천은 아테나의 무쌍을 보면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는 광기 서린 미소를 지으며 성배에 담긴 타락한 신성의 피를 [영혼의 우물] 안으로 쏟아부었다.
“어리석은 천계의 낙방자들아! 너희가 지키려던 인간들의 영혼이 어떻게 파멸하는지 똑똑히 지켜보아라! [천벌교 영혼 추출 제단 의식], 가속(加速)!”
황태천이 성배를 높이 들고 피의 주문을 외우자, 우물 중앙에서 검붉은 원혼의 손길들이 비명을 지르며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우물 내부의 타락한 신성이 정제되며 짙은 보라색의 안개가 성전 전체로 급속도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단순한 연기가 아니었다. 신들의 정신을 오염시키고 자아를 붕괴시키는 [타락한 신성의 정신 오염 안개]였다.
“앗…… 윽……!”
안개가 성전 바닥을 덮치자마자, 진격하던 아테나의 신형이 굳어졌다. 뒤따르던 미네르바와 프레이야 역시 가슴을 움켜쥐며 무릎을 꿇었다.
안개 속에서 흘러나오는 수만 원혼들의 울부짖음은, 여신들의 뇌리 깊은 곳에 잠들어 있던 가장 뼈아픈 트라우마를 정밀하게 자극했다. 과거 천계에서 인간계를 지키려다 찬탈 주신 데미우르고스에게 배신당하고 숙청당해 지상으로 추락했던 비참한 기억—[네 여신의 지상 추락 배후의 진상]이 환청과 환각이 되어 그녀들의 영혼을 사정없이 난도질하기 시작한 것이다.
“아아…… 싫어…… 또다시…… 또다시 우리를 버리는가…….”
미네르바가 은빛 안경을 떨어뜨린 채 머리를 감싸 쥐고 절망적인 비명을 질렀다. 그녀의 지혜의 마력 회로가 역류하며 극심한 두통이 그녀의 자아를 갉아먹었다. 프레이야 역시 생명의 온기를 잃고 창백하게 질린 채 바닥에 쓰러져 숨을 헐떡였다. 선봉에서 무쌍을 찍던 아테나마저도 청동빛 투기가 급격히 지워지며 빗자루를 놓치고 비틀거렸다. 정신 오염 안개에 의해 여신들의 진격이 완벽하게 가로막힌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하하하! 지상의 미천한 존재들을 사랑한 대가가 겨우 이것이다! 너희는 그 고독한 심연 속에서 영원히 썩어갈 것이다!”
황태천의 비웃음 소리가 성전에 메아리쳤다. 광신도들이 단도를 치켜들고 쓰러진 여신들을 향해 좁혀왔다.
바로 그 순간, 임재희가 한 걸음 앞으로 걸어 나왔다.
재희의 오른손 끝은 가위질의 반동으로 여전히 마비되어 저릿했고, 가슴의 저독 흉터는 타들어 가듯 아파왔다. 하지만 그의 눈빛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차갑고 단호하게 빛나고 있었다. 재희는 품속에서 낡은 놋쇠 가위를 쥔 채, 쓰러진 미네르바와 프레이야의 손을 양손으로 움켜쥐었다.
“모두 정신 차리세요. 당신들은 더 이상 천계의 고독한 패배자가 아닙니다.”
재희의 차분하고 단호한 목소리가 여신들의 뇌리를 때렸다.
그리고 재희의 양 손끝에서부터, 은은하고 따뜻한 금빛 온기가 방사되어 미네르바와 프레이야의 손등을 타고 흘러들었다. 재희의 피에 흐르는 고대 조율자의 권능—[정화의 피]가 활성화되며 여신들의 폭주하는 마력 회로를 강제로 정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치이이이익—!
여신들의 몸을 짓누르고 있던 보랏빛 오염 안개가, 재희의 따뜻한 [정화의 접촉]에 닿는 순간 기분 나쁜 연기를 뿜어내며 하얗게 증발해 버렸다. 미네르바의 머릿속을 헤집던 두통 환각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프레이야의 얼어붙던 심장에 다시 뜨거운 생명의 온기가 돌기 시작했다.
[미네르바 - 오만 수치: 50% -> 45%]
[프레이야 - 오만 수치: 80% -> 75%]
[상태: 정화의 피 공명, 정신 오염 완벽 차단]
“주인…… 님…….”
미네르바가 옥빛 안광을 다시 밝히며 재희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눈동자 속에 깊은 경외감과 안도감이 서려 있었다. 프레이야 역시 재희의 손길에서 느껴지는 따뜻한 온기에 볼을 붉히며 기력을 회복했다. 아테나 또한 청동빛 투기를 다시 뿜어내며 굳건히 대지를 딛고 일어섰다. 재희가 평범한 인간의 몸으로 자신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 오염 안개의 위기를 완벽하게 정화해 낸 순간이었다.
“말도 안 돼……! 어떻게 일개 지상의 범인이 내 타락한 신성의 안개를 정화한단 말이냐!”
제단 위에서 의식을 거행하던 황태천이 경악하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김도윤 역시 미간을 좁히며 재희가 쥔 낡은 놋쇠 가위를 날카롭게 노려보았다.
재희는 여신들의 손을 놓고, 놋쇠 가위를 고쳐 쥐며 제단을 향해 단호하게 선포했다.
“당신들의 추악한 의식은 여기까지입니다. 이웃들의 영혼을 당장 돌려받아야겠어.”
그러나 재희 일행이 제단으로 진격하려던 바로 그 찰나.
쿵—!
성전 바닥 전체가 깨져 나가며, 엄청난 무게감의 충격파가 재희 일행의 발밑을 강타했다.
동시에, 제단 앞을 가로막으며 거대한 어둠의 기류가 솟구쳐 올랐다. 그 어둠의 중심에서, 검은 철가면을 쓴 거구의 사내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의 등 뒤에는 수많은 무고한 희생자들의 원혼을 빨아들여 검붉은 광채를 내뿜는 거대한 마검, [혼혈마검]이 매달려 있었다.
천벌교의 실질적인 전투 총괄이자, 지옥의 살인귀라 불리는 제1장로 무진(無진)이었다.
무진이 천천히 마검의 자루를 쥐어 잡자, 성전 내부의 공기가 얼어붙을 듯한 살기로 가득 찼다. [영혼의 우물] 속 원혼들의 비명 소리가 그의 검기와 공명하듯 한층 더 처절하게 울려 퍼졌다.
“여기까지 냄새를 풍기며 기어 들어온 쥐새끼들이 너희로구나.”
철가면 너머로 무진의 붉은 안광이 번뜩였다. 그가 마검을 뽑아 들자, 대성전 전체가 무너질 듯한 압도적인 살기가 임재희 일행의 가슴을 짓눌렀다. 시시각각 소멸해가는 인질들의 생명력과, 그 앞을 가로막은 최강의 마검사 무진의 위압감이 성전을 가득 채우며 숨 막히는 긴장감을 자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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