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 전당포의 눈먼 노인
“할머니가 재희 형한테 얼른 도망치라고 소리쳤는데…… 흑, 놈들이 할머니를 강제로 차에 태우고 사라졌어요! 형, 제발 우리 할머니 좀 구해줘요……!”
민우의 애절한 울음소리가 망원동 골목의 차가운 아침 공기를 사정없이 찢어발겼다. 맨발로 달려온 아이의 발끝은 흙먼지와 상처로 엉망이었고, 가늘게 떨리는 어깨는 절망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임재희는 이빨을 악물었다.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끓어오르는 분노가 심장 부근의 저주 흉터를 자극해 욱신거리는 통증을 유발했다. 게다가 지하실에서 놋쇠 가위로 고대의 황동 자물쇠를 강제로 잘라낸 반동 탓에, 그의 오른손 손가락들은 여전히 감각을 잃은 채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등 뒤에는 무너지는 책장으로부터 미네르바를 온몸으로 감싸 안았을 때 생긴 타박상의 둔탁한 통증이 잔존해 있었다.
육체는 한계에 달해 있었고, 결계를 보수할 ‘열반장의 장막 유지용 놋쇠 실’은 단 1%도 남지 않은 채 완벽하게 고갈된 상태였다. 지상에서 결계를 직접 수선할 수 없는 아킬레스건을 안고 있는 상황에서 은인인 송순이 할머니의 납치 소식은 재희의 이성을 마비시키기에 충분했다.
“재희……!”
아테나가 붉은 포니테일을 거칠게 휘날리며 앞으로 나섰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사교단 놈들을 당장이라도 갈기갈기 찢어버리겠다는 파괴적인 분노가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 옆에 선 미네르바 역시 은빛 안경테 너머로 차가운 살기를 뿜어내며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들이 이곳에 머무는 신성 때문에 아무런 죄 없는 지상의 평범한 인간들이 인질로 잡혔다는 죄책감이 그녀들의 콧대 높은 오만함을 완전히 짓눌러버린 것이다.
“진정하세요, 아테나 씨. 미네르바 씨.”
재희는 마비된 오른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으며 나지막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지시했다.
“우리가 흥분하면 놈들의 페이스에 휘말릴 뿐입니다. 아테나 씨는 프레이야 씨, 닉스 씨와 함께 열반장에 남아 철저히 수성을 유지하세요. 결계는 지하실 제단을 통해 임시 복구해 두었지만, 실이 없어 외부의 추가 타격에는 취약합니다. 민우를 안으로 데려가 보호하고 계세요.”
“하지만 집사! 나도 당장 그 사교단 놈들의 목을 베러 가겠다!”
“제 명령을 따르세요, 아테나 씨.”
재희가 황동빛 안광이 흐르는 심안의 눈빛으로 그녀를 똑바로 응시하자, 아테나는 숨을 들이켜며 꼬리를 내리듯 고개를 숙였다. 오만 수치가 62%까지 떨어진 그녀는 이제 재희의 단호한 명령에 거역할 수 없었다.
“미네르바 씨는 지하실에서 한소연의 설계도 공식을 다시 분석하며 대기하세요. 저는 놈들의 본거지 좌표를 알아내기 위해 다녀오겠습니다.”
“……조심하십시오, 주인님. 제 지혜가 당신의 무사 귀환을 빌겠습니다.”
미네르바가 깊은 경외감과 걱정이 담긴 눈빛으로 고개를 숙였다.
재희는 민우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어 진정시킨 뒤, 홀로 망원동 외곽의 음습한 골목길로 향했다. 오른손 끝의 저림과 가슴의 통증이 수시로 그를 괴롭혔지만, 걸음을 멈출 수는 없었다. 사교단 천벌교가 지상의 기득권인 태성그룹과 결탁해 여신들의 신성을 노리고 벌인 짓이라면, 그 본거지의 좌표를 쥐고 있는 자는 지상에 단 한 명뿐이었다.
망원동 후미진 골목 끝자락, 낡은 녹색 페인트가 벗겨진 나무 간판이 흔들리는 곳.
‘형제 전당포’.
외관상으로는 낡은 먼지와 고물 냄새만 가득한 삼류 골동품점이었지만, 지상의 온갖 초자연적 마법 도구와 유실된 천계의 유물들이 비밀리에 거래되는 음지의 중심지였다. 재희가 전당포의 낡은 황동 문을 열고 들어서자, 딸랑이는 종소리와 함께 매캐한 곰방대 담배 연기가 그의 코끝을 찔렀다.
어두컴컴한 내부에는 깨진 도자기, 녹슨 검, 출처를 알 수 없는 기괴한 부적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그리고 그 먼지 쌓인 유리 카운터 너머, 낡은 가죽 의자에 백발을 단정하게 묶은 노인이 앉아 있었다. 눈을 완전히 가리는 짙은 선글라스를 끼고, 입에는 구식 곰방대를 문 채 연기를 뿜어내는 사내.
형제 전당포의 눈먼 주인, 고진태였다.
“장사 끝났다, 총각. 볼일이 있거든 해가 중천에 떴을 때 다시 오든가 하지.”
고진태는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곰방대를 툭툭 털며 퉁명스럽게 뱉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세속의 모든 일에 흥미를 잃은 듯한 지독한 무관심이 서려 있었다.
“고진태 어르신.”
재희가 카운터 앞으로 다가서며 마비된 오른손을 억지로 움직여 탁자를 짚었다.
“망원시장 상인들이 사교단 천벌교 놈들에게 납치당했습니다. 그들의 지하 대성전으로 향하는 본거지 좌표와 침로가 필요합니다. 가르쳐 주십시오.”
“허, 귀찮은 소리를 하는구나.”
고진태가 나지막이 코방귀를 뀌었다.
“천벌교인지 뭔지 하는 광신도 놈들이 지상에서 피를 흘리든 말든, 눈먼 늙은이인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다. 게다가 난 공짜로 정보를 넘겨주는 자선사업가가 아니야. 지상의 종이돈 몇 푼으로는 내 입을 열 수 없으니 이만 나가라.”
지상의 현금이나 단순한 애원으로는 이 완고한 은거 고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었다. 재희는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가슴의 통증을 억눌렀다. 그리고 왼손을 뻗어 자신의 바지 주머니 깊숙한 곳에서 낡은 물건 하나를 꺼내 들었다.
탁.
그가 카운터 위의 먼지 쌓인 유리판 위에 올려놓은 것은, 가위 날 표면에 찬란한 고대 룬 문자가 희미하게 감도는 ‘낡은 놋쇠 가위’였다.
“이걸 감정해 주십시오. 이 가업의 유품이 정보를 대신할 대가가 될 수 있겠습니까?”
고진태는 미동도 하지 않으려 했으나, 가위가 유리판에 부딪히며 낸 맑은 놋쇠 소리에 그의 곰방대를 쥔 손끝이 아주 미세하게 경직되었다. 노인은 천천히 마른 손을 뻗어 유리판 위의 가위를 더듬었다.
거칠고 굳은살이 박인 노인의 손가락이 차가운 놋쇠 날의 표면을 만지는 순간.
화아아악—!
가위 날 안쪽에 새겨진 고대 천계의 조율 룬 문자가 노인의 손끝 마력과 반응하며 은은한 황동빛 안광을 뿜어냈다. 지하실에서 자물쇠를 자른 뒤 잠들어 있던 가위의 영적 주파수가 노인의 손길에 완벽하게 공명한 것이다.
“이, 이 마력의 결은……!”
고진태의 목소리가 이례적으로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그는 끼고 있던 짙은 선글라스를 거칠게 벗어 던졌다. 선글라스 너머로 드러난 그의 두 눈은 초점을 잃은 milky 한 백색이었지만, 그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경악과 전율만큼은 그 어떤 심안보다 형형했다.
노인은 가위를 양손으로 소중하게 받쳐 들고, 날 끝에 흐르는 미세한 금빛 마력 파동을 자신의 뺨에 가져다 대며 온몸을 떨었다.
“태정 형님……. 임태정 형님의 마력 주파수가 틀림없어. 이 절대적인 은닉과 조율의 기운…… 지상에서 이 힘을 다룰 수 있는 가위는 오직 가문의 수호천사 핏줄뿐인데…….”
고진태가 텅 빈 눈동자를 재희의 얼굴을 향해 치켜올렸다. 그의 마른 얼굴에 뜨거운 눈물이 한 줄기 흘러내렸다.
“도련님……. 당신이 태정 형님의 아드님이신 임재희 도련님이로군요.”
재희는 등 뒤로 흐르는 소름 돋는 전율을 느꼈다.
“어르신…… 제 아버지를 알고 계십니까?”
“알고 있다마다요.”
고진태가 의자에서 일어나 재희를 향해 깊숙이 허리를 숙이며 극진한 예의를 표했다. 그 사소한 행동 하나만으로도 전당포 내부의 무겁고 먼지 쌓인 공기가 엄숙한 신성으로 가득 찼다.
“저는 과거 천계의 신성 보물창고를 관리하던 최고위 성물 감정사였습니다. 그리고 도련님의 부친이신 임태정 상급 수호천사님과 함께 지상을 수호했던 절친한 전우이자 동료였지요. 형님이 인간 여인을 사랑해 모든 신성을 반납하고 지상으로 추락하셨을 때, 저 역시 천계의 타락한 규율에 환멸을 느끼고 눈을 멀게 한 뒤 지상으로 은거했습니다. 형님이 남기신 낡은 빌라 열반장과 이 가위의 주파수를 제가 어찌 잊겠습니까.”
재희는 아버지가 평범한 서민이 아닌,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린 수호천사였다는 비밀의 실체를 마주하며 가슴이 뭉클해졌다. 자신이 부친의 유산을 이어받은 정당한 상속자이자 조율자임을 다시 한번 깨닫는 순간이었다.
“태정 형님의 아드님이 은인의 구출을 위해 이 늙은이에게 도움을 청하러 오셨는데, 내 어찌 모른 척하겠습니까.”
고진태는 곰방대를 내려놓고 카운터 밑 비밀 서랍을 열었다. 그리고 가죽으로 단단히 묶인 오래된 양장 노트와 지도를 꺼내 들었다.
“도련님, 지금 망원동 이면에서 암약하는 사교단 천벌교는 단순한 광신도 집단이 아닙니다. 그들의 배후에는 지상의 거대 자본인 태성그룹의 송민우 부회장이 서 비자금을 대주고 있습니다. 송민우는 여신들이 추락할 때 흩어진 고대 성물의 힘을 독점해 자신의 육체를 개조하려 하고, 천벌교는 그 성물과 상인들의 영혼을 제물로 바쳐 파멸의 신을 소환하려 하고 있지요.”
노인의 날카로운 설명에 재희의 눈빛이 매섭게 가라앉았다.
“그렇다면 상인들이 갇혀 있는 지하 대성전의 위치는 어디입니까?”
고진태가 가죽 지도를 탁자 위에 펼쳤다. 지도의 중심에는 망원동 지하 전체를 거미줄처럼 복잡하게 가로지르는 하수관로의 도면이 그려져 있었다.
“천벌교의 본거지인 지하 대성전은 도심 지하 깊은 곳에 숨겨져 있으며, 입구에는 강력한 타락 결계가 쳐져 있어 지상에서는 절대 진입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단 한 곳, 결계의 감시가 닿지 않는 사각지대가 존재합니다.”
노인의 마른 손가락이 지도의 한 지점을 짚었다.
“바로 ‘망원동 하수도 비밀 통로’입니다. 과거 태정 형님이 지상의 탁기를 정화하기 위해 은밀히 개척해 둔 지하 통로이지요. 이 하수관을 타고 침투하면, 사교단의 경계망을 우회하여 지하 대성전의 심장부로 가장 안전하게 도달할 수 있습니다.”
재희는 지도를 소중하게 받아 품 안의 설계도 옆에 넣었다. 적들의 본거지 좌표와 가장 완벽한 침투 경로를 획득한 순간이었다.
“고맙습니다, 어르신.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몸 조심하십시오, 도련님. 천벌교 장로들의 무력은 지상의 마법사들과 궤를 달리합니다.”
고진태가 다시 곰방대를 입에 물고 불을 붙이려는 바로 그 찰나.
스스스스—
전당포 낡은 유리창 너머, 골목길의 공기가 차갑게 가라앉으며 묵직한 살기와 기분 나쁜 마력 반응이 감지되었다. 재희의 심안 속에서 전당포 외곽을 둘러싸고 붉은색 감시 선들이 촘촘하게 엮이는 것이 투시되었다.
부릉, 부릉.
골목길 모퉁이에 시동을 켠 채 대기 중인 여러 대의 검은색 세단들. 그리고 그 차에서 내린, 검은 정장에 은제 너클을 낀 냉혹한 체격의 사내들이 전당포의 입구를 은밀하게 포위하기 시작했다.
그 사내들의 선봉에 서서 무전기를 귀에 댄 채 전당포 내부를 차갑게 노려보는 사내—대기업 태성그룹 부회장 송민우의 비서이자 냉혹한 해결사인 김도윤이었다.
재희가 전당포를 나서는 순간 마주할 대기업의 살벌한 미행망이 그들의 목을 조여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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