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가오는 붉은 장막
네 명의 여신들이 한꺼번에 품 안으로 들이닥쳤을 때, 임재희는 숨이 턱 막히는 것을 느꼈다.
붉은 머리칼을 거칠게 휘날리며 재희의 목을 끌어안은 전쟁의 여신 아테나의 단단한 팔에는 아직도 감격의 떨림이 남아 있었고, 평소답지 않게 눈가를 붉힌 지혜의 여신 미네르바는 그의 셔츠 자락을 꽉 쥔 채 소리 없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프레이야는 아예 재희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치명적인 금빛 웨이브 머리칼을 그의 가슴팍에 비벼댔고, 소심한 밤의 여신 닉스는 그들의 등 뒤에서 재희의 옷자락 끝만 간신히 붙잡은 채 뚝뚝 눈물을 흘렸다.
50억 원이라는, 지상의 평범한 인간이라면 영혼이라도 팔아넘겼을 거액의 유혹. 그것을 단칼에 잘라내고 자신들을 ‘가족’이라 선포한 필멸자 집사의 결단은 차가운 신성만을 품고 살던 그녀들의 심장에 지울 수 없는 불꽃을 지핀 것이 분명했다.
“다들, 진정하세요. 뼈가 으스러질 것 같습니다.”
재희가 짐짓 곤란한 표정으로 나직하게 잔소리를 던졌다. 가사 조율자 초급(1단계)의 단호하면서도 다정한 훈육 대화법이 발동하자, 여신들의 머리 위에 떠 있던 반투명한 오만 게이지가 일제히 푸른빛으로 안정되며 서서히 가라앉았다.
[아테나 - 오만 수치: 65%]
[미네르바 - 오만 수치: 50%]
[프레이야 - 오만 수치: 80%]
[닉스 - 오만 수치: 73%]
“미련한 범인 놈…… 아니, 재희야. 정말로 우리를 넘기지 않을 생각이었느냐? 지상의 50억이면 네 평생의 가난을 해결하고도 남을 대가였을 텐데.”
아테나가 재희의 품에서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며 물었다. 눈동자에는 여전히 불안과 깊은 신뢰가 교차하고 있었다.
“몇 번을 말해야 압니까. 내 집 세입자들을 돈 몇 푼에 팔아넘길 만큼 모진 가장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당장 이 손들 좀 놓으시죠. 가계 적자가 더 심각해졌으니 오늘 저녁 식탁에 올릴 감자라도 다듬어야 합니다.”
재희의 퉁명스럽지만 다정한 핀잔에 여신들이 비로소 뺨을 붉히며 슬그머니 손을 놓았다. 프레이야는 아쉬운 듯 재희의 뺨을 손끝으로 가볍게 쓸어내렸고, 미네르바는 옷매무새를 다듬으며 지적인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평화는 그리 길지 않았다.
갑자기 재희의 왼쪽 가슴 깊은 곳, 과거 사교단의 저주가 남긴 영혼의 균열 흉터가 욱신거리며 타는 듯한 통증을 뿜어냈다. 재희는 신음을 삼키며 오른손으로 가슴을 꽉 움켜쥐었다. 닉스가 선물한 밤안개 향초 덕분에 저독이 많이 희석되었다고는 하나, 밤샘 바느질 노동으로 마력이 완전히 방전된 상태에서 가해진 영적 과부하는 뼈아팠다.
바로 그 순간.
삐이이이이이이—!
거실 한구석, 낡은 아날로그 라디오 뒤편에 숨겨져 있던 ‘감시자 7호의 수리된 마력 코어’가 미친 듯이 점멸하기 시작했다. 단순한 기계적 오작동이 아니었다. 코어 표면의 청동 장갑판 틈새로 시뻘건 마력 입자들이 불꽃처럼 튀어 오르며, 귀를 찢는 듯한 기괴한 경보음이 온 집안을 뒤흔들었다.
“이 주파수는……!”
미네르바가 안경을 치켜올리며 라디오 앞으로 급히 다가갔다. 그녀의 눈동자 너머로 푸른빛의 공식들이 격렬하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재희, 조심해! 단순한 정찰 기류가 아니야. 열반장 반경 100미터의 지상 인과율과 공간 장벽이 통째로 뜯겨 나가며 강제로 재정합되고 있어. 이건…… 고도의 공간 격리 주술이야!”
“공간 격리라고?”
재희가 이빨을 악물며 주머니에서 무전기를 꺼내 들었다. 국가 비밀 기관 특수대책처의 강준혁 요원에게 연락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무전기 액정에는 붉은색 노이즈만이 가득할 뿐, 지지직거리는 기분 나쁜 소음 외에는 아무런 신호도 잡히지 않았다.
“빌어먹을, 전파 차단 주술까지 걸렸군. 완벽한 고립이야.”
재희가 무전기를 내려놓고 거실 창문을 거칠게 열어젖혔다.
창밖의 풍경을 목격한 여신들과 재희의 입에서 동시에 숨이 턱 막혔다.
망원동의 평화롭던 골목길 위로, 하늘 전체를 피로 물들인 듯한 거대하고 사악한 붉은색 장막이 내려앉고 있었다. 사마엘의 공간 차단 결계를 비열하게 모방하고 타락시킨 거대한 돔 모양의 장막. 그것은 지상의 평범한 주민들의 눈과 귀를 완벽하게 속이고, 열반장만을 이 세상에서 완전히 도려내어 고립시키기 위한 ‘붉은 장막’이었다.
“이 음습하고 더러운 피의 냄새…… 지상의 삼류 술사 놈들이 부리는 변칙 주술이 확실하다.”
프레이야가 코를 찌푸리며 싸늘하게 읊조렸다.
“태성그룹 미래전략실의 제안을 거절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움직였군. 송민우 부회장의 자금을 수혈받은 사교 집단, ‘천벌교 서울지부’의 짓입니다.”
미네르바가 옥빛 거울 조각의 잔영을 공중에 띄우며 분석 결과를 읊조렸다.
“그리고 이 거대한 붉은 장막을 전개한 술사의 마력 파동…… 과거 배두식의 사채 조직 뒤에 숨어 은닉 결계를 깨뜨리려 부적을 심었던 타락한 지상 마법사, ‘류한수’의 주파수와 일치해. 천벌교의 교주 ‘황태천’이 마침내 지상의 돈과 결탁하여 우리를 통째로 사냥하려 드는구나.”
열반장을 감싸고 있던Passive 수호 결계인 ‘열반의 장막 결계석’들이 붉은 장막의 압박에 부딪쳐 비명을 지르듯 일렁였다. 설상가상으로, 지난 밤샘 작업으로 인해 무명 바느질 상자 내부의 ‘장막 유지용 놋쇠 실’은 완벽하게 고갈되어 0%인 상태였다. 결계를 긴급 보수하거나 강화할 자원이 단 한 가닥도 남아있지 않았다.
피할 수 없는 정면 대결이었다.
재희는 심호흡을 하며 가슴의 영혼 통증을 억누르고 단호하게 외쳤다.
“수성전입니다. 결계의 보수가 불가능하다면, 적들이 결계석을 직접 타격하기 전에 우리가 마당에서 놈들을 먼저 쳐부숴야 합니다.”
재희가 주머니에서 은은한 황동빛 예기를 품은 ‘낡은 놋쇠 가위’를 꺼내 들었다. 비록 마력이 바닥나 금빛 안광은 잠들어 있었지만, 그의 손에 들린 가위는 그 자체만으로도 여신들에게 절대적인 안도감을 주었다.
“아테나 씨, 복원된 청동 방패 조각을 들고 마당 선봉으로 나섭니다. 적들의 일차 돌격을 무력으로 짓밟으세요.”
“흥, 내 무력을 보여줄 기회가 마침내 왔군! 그 하찮은 광신도 놈들의 대가리를 전부 깨부숴 주마!”
아테나가 주먹을 불끈 쥐며 청동빛 투기를 뿜어냈다.
“닉스 씨는 마당 구석의 그림자 속에 은신하여 사각지대에서 기습해 오는 자들을 소리 없이 제압하세요. 미네르바 씨는 내 옆에서 거울 조각으로 붉은 장막의 중심 핵과 류한수가 숨겨둔 부적의 좌표를 실시간으로 추적합니다. 프레이야 씨는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내 등 뒤를 경호하세요.”
“알았어, 다정한 우리 집사님.”
프레이야가 나른한 미소를 지으며 재희의 뒤에 밀착했고, 닉스는 소리 없이 어둠 속으로 스며들어 자취를 감추었다.
임재희는 놋쇠 가위를 손에 굳건히 쥔 채, 앞치마를 두른 여신들과 함께 전투 대형을 갖추고 301호의 문을 열어 마당으로 내려갔다.
열반장 앞마당의 공기는 이미 피비린내 나는 붉은 장막의 마력으로 가득 차 무겁게 내려앉아 있었다. 그리고 대문 위, 그리고 낡은 담벼락 위로 기괴한 해골 가면을 쓰고 검은 망토를 두른 천벌교의 하급 신도들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어둠 속에서 일렁이는 그들의 붉은 안광이 열반장 마당을 포위하는 순간, 마침내 처절한 전면전의 막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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