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광초 절벽, 밧줄 끝의 사투
“피이이이——!”
척후병 잭의 입술이 호각에 닿아 숲 전체에 파멸의 경보음이 울려 퍼지기 직전의 찰나.
태오의 감각은 폭풍 속에서도 칼날처럼 예리하게 벼려져 있었다. 대결은 정면 무력이 아닌, 찰나의 기만과 정확한 약학적 저격으로 결정되어야 했다. 오른손바닥의 화상 흉터가 욱신거렸지만, 태오는 왼손가락 사이에 끼워둔 미세한 수면초 가루 주머니를 잭의 안면을 향해 튕겨 보냈다.
팍!
공기 중으로 기화된 보랏빛 약초 가루가 폭풍의 기류를 타고 잭의 콧구멍으로 직격했다. 호각을 불기 위해 숨을 크게 들이마시던 잭의 황금빛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초점을 잃고 흐려졌다.
“어……? 이, 이 연기는…….”
잭의 손에서 제국제 마법 돋보기가 툭 떨어졌다. 그의 몸이 진흙바닥으로 힘없이 쓰러지자, 대기하고 있던 가르크가 그림자처럼 움직여 그의 목덜미를 낚아챘다. 단 한 치의 소음도 허용하지 않는 완벽한 제압이었다.
“태오 나으리, 이 자를 어떻게 할까요?”
가르크가 낮게 으르렁거리며 쌍단검을 잭의 목에 들이댔다. 태오는 피를 흘려서는 안 된다는 신호로 고개를 저었다.
“살상하면 무전기에 장착된 심장박동 센서가 바르토에게 즉시 위치를 송신한다. 저 자의 마법 장비들을 전부 몰수하고, 숲속 깊은 늪지대 덤불에 묶어두어라. 약효가 돌면 반나절은 잠들어 있을 거다.”
“알겠습니다. 나으리, 부디 몸조심하십시오.”
가르크가 잭의 몸을 둘러업고 어둠 속으로 사라지자, 태오는 홀로 폭풍우가 몰아치는 안개의 숲 한가운데에 남겨졌다.
하늘은 검붉은 먹구름으로 뒤덮여 있었고, 대지를 찢어발길 듯한 번개가 쉴 새 없이 내리쳤다. 빗방울은 살갗을 바늘로 찌르듯 차갑고 아프게 쏟아졌다. 실비아의 코어가 완전히 붕괴하기까지 남은 시간은 이제 23시간 남짓. 태오는 가슴팍을 움켜쥐었다. 심장 경맥의 균열이 벌어지는 듯한 극통이 밀려왔지만, 그는 주저앉을 시간이 없었다.
“미티, 길을 안내해 줘.”
태오의 부름에 그의 어깨 위에서 작고 영롱한 푸른빛이 피어올랐다. 풀잎 정령 미티였다. 미티는 거센 바람에 날아가지 않으려 태오의 약사복 칼라를 꼭 쥔 채, 눈물을 글썽이며 절벽 방향을 가리켰. 미티가 내뿜는 미세한 정화 오라가 태오의 얼굴 주변에 얇은 방막을 형성해 빗줄기를 조금이나마 막아주려 애쓰고 있었다.
“고마워, 미티. 가자.”
태오는 낡은 로프와 윤노인의 낡은 약초 칼을 단단히 쥐고, 안개의 숲에서 가장 험준하고 높은 수직 절벽인 ‘월광초 절벽’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
월광초 절벽은 대자연이 빚어낸 거대한 무덤과도 같았다.
사시사철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 있는 이 수직의 암벽은, 보름달 밤에만 피어나는 전설적인 은색 약초 ‘월광초’의 유일한 자생지였다. 평범한 인간의 몸인 태오가 마력도 없이 오르기에는 죽음의 구렁텅이나 다름없는 장소였다.
쿠르릉! 쾅!
하늘을 찢는 뇌성과 함께 폭우가 바위 표면을 거칠게 때렸다. 물줄기가 폭포처럼 흘러내려 절벽 전체가 얼음판처럼 미끄러웠다. 태오는 숨을 헐떡이며 낡은 로프의 한쪽 끝을 절벽 아래 단단한 고목 뿌리에 묶고, 다른 쪽 끝을 자신의 허리에 감았다.
그가 첫발을 내디뎠을 때, 전신이 비명과도 같은 비바람에 휩쓸렸다.
“윽……!”
바위를 움켜쥔 태오의 양손 끝에서 찌릿한 고통이 밀려왔다. 실비아에게 물어뜯겼던 왼쪽 어깨의 열상이 터져 붉은 피가 빗물과 섞여 흘러내렸다. 오른손바닥의 화상 흉터는 차가운 빗물이 닿을 때마다 불에 달군 인장을 다시 찍는 듯한 극통을 유발했다. 하지만 태오는 손가락 뼈가 아스러지는 느낌을 받으면서도 손을 놓지 않았다.
한 걸음, 다시 한 걸음.
평범한 인간의 나약한 육체가 수직의 암벽을 기어올랐다. 바람이 불 때마다 그의 몸이 허공에서 종이인형처럼 흔들렸다. 미티는 태오의 귀밑에서 흐느끼며 자신의 작은 나뭇잎 날개로 거센 돌풍을 조금이라도 비껴가게 하려 필사적으로 날갯짓을 했다.
그 순간, 태오의 가슴팍에 걸려 있던 푸른 보석 목걸이가 은은한 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실비아의 푸른 목걸이.
그것은 실비아가 인간 형태로 변했을 때 자신의 푸른 마력 코어 일부를 깎아 태오에게 건넨 정서적 신표였다. 태오가 겪는 극심한 육체적 고통과 손가락이 찢어지는 비명이, 목걸이의 영혼 링크를 타고 오두막 침대에 누워 고열에 신음하던 실비아의 영혼으로 실시간으로 흘러 들어갔다.
‘아…… 아아…….’
의식의 심연 속에서 실비아는 흐느꼈다.
그녀의 머릿속에 전해지는 고통은 제국의 마법사들이 가했던 고문과는 완전히 결이 달랐다. 그것은 타인을 지키기 위해, 오직 자신이라는 상처받은 신수를 살려내기 위해 평범한 인간이 스스로 선택한 숭고하고 처절한 희생이었다.
인간의 배신과 채찍질 속에서 차갑게 얼어붙어 있던 그녀의 심장 장벽이 무참히 깨져 나갔다. 죄책감과 슬픔, 그리고 그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극도의 두려움이 그녀의 내면에서 집착에 가까운 맹목적인 애착으로 피어올랐다.
‘안 돼…… 가지 마…… 나 때문에 죽지 마…….’
실비아의 무의식이 비명을 질렀지만, 태오는 그 비명을 듣지 못한 채 절벽 중간 지점에 도달해 있었다.
절벽 틈새를 빤히 바라보던 태오의 눈이 번뜩였다. 저 멀리 깎아지른 바위 틈새에서, 달빛을 받아 은빛으로 찬란하게 빛나는 신비로운 꽃송이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월광초였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태오가 매달려 있던 로프가 날카로운 바위 모서리에 쓸려 툭, 투둑 하며 실밥이 터지는 소리가 폭풍우 속에서도 선명하게 들렸다.
설상가상으로, 절벽 틈새에 둥지를 틀고 있던 하급 마수 조류가 불청객의 침입에 분노해 날카로운 울음소리를 내지르며 튀어나왔다. 거대한 날갯짓이 태오의 시야를 가렸고, 날카로운 부리가 그의 얼굴을 향해 쇄도했다.
“크샤아아악!”
“윽!”
태오는 한 손으로 바위 틈에 꽂아 넣은 윤노인의 낡은 약초 칼을 꽉 쥔 채 간신히 매달렸다. 다른 한 손을 움직일 여유는 없었다. 마수가 다시 한번 그의 목덜미를 노리고 날아드는 순간, 태오는 이를 악물고 허리춤에서 마르쿠스의 은침을 꺼내 들었다.
그는 오른손바닥의 극통을 정신력으로 억누르며, 날아드는 마수의 급소 혈자리를 향해 은침을 던졌다.
슈욱! 팍!
정교하게 투척된 은침이 마수의 목덜미 요혈에 정확히 박혔다. 마수는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기혈이 마비되어 절벽 아래 어둠 속으로 추락했다.
하지만 마수를 격퇴한 반동과 거센 돌풍이 태오의 몸을 강타한 순간.
찌이이익! 툭!
이미 마모될 대로 마모되어 있던 낡은 로프가 결국 견디지 못하고 완전히 끊어져 나갔다.
“……!”
허공으로 몸이 떠오르는 절망적인 부유감 속에서, 태오는 마지막 본능을 쥐어짜 손을 뻗었다. 그의 손가락 끝이 절벽 틈새에 피어 있던 은빛 월광초의 줄기를 움켜쥐었다.
서걱!
약초를 꺾어 품에 안은 순간, 태오의 신체는 거대한 중력의 이끌림에 따라 끝을 알 수 없는 절벽 아래 심연으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오두막 침대 위.
“태오——!!!”
식은땀과 눈물로 범벅이 된 실비아가 비명을 지르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황금빛 눈동자가 공포와 집착으로 붉게 물든 채 번뜩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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