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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지에 새겨진 참회, 스승의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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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밖을 때리는 빗줄기가 점점 거세지고 있었다. 안개의 숲을 집어삼킬 듯 몰아치는 밤폭풍의 포효 속에서, 태오의 오두막 내부는 기묘할 정도로 무겁고 뜨거운 열기에 짓눌려 있었다.


“하아…… 으, 으윽…….”


침대에 누운 실비아의 입술 사이로 갈라진 신음이 흘러나왔다. 인간의 형태로 변한 그녀의 전신은 마치 붉게 달아오른 화로처럼 뜨거운 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하얗다 못해 투명하던 은빛 귀와 꼬리는 비정상적으로 파르르 떨렸고, 목덜미에 새겨진 마법 사슬의 화상 흉터에서는 붉은 진물이 배어 나왔다.


태오는 떨리는 왼손을 뻗어 그녀의 이마를 짚었다. 손바닥을 타고 전해지는 온도는 어림잡아도 40도를 아득히 넘어서고 있었다.


‘정화의 피로 야성 폭주는 잠재웠지만…… 체내에 고여 있던 마력들이 타락 독소와 충돌하면서 경맥이 과열되고 있어. 이대로 두면 24시간도 채 버티지 못하고 신성 코어가 녹아내릴 거다.’


태오 자신의 상태 역시 한계에 가깝기 짝이 없었다. 실비아의 날카로운 발톱에 찢긴 왼쪽 어깨에서는 피가 끊임없이 흘러내려 낡은 약사복을 붉게 적시고 있었고, 마법 사슬의 반발력을 정면으로 받아낸 오른손바닥은 붕대 사이로 타들어 가는 듯한 극통을 내뿜었다. 게다가 방금 전 무리하게 가동한 독심술의 부작용으로 머릿속에서는 깨진 종소리 같은 이명이 끊이지 않았고, 턱을 타고 차가운 코피가 한 방울 뚝 떨어졌다.


태오는 거친 소매로 코피를 슥 닦아내며 이를 악물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살리겠다고 약속했어. 저 차가운 철창 속으로 다시 돌려보내지 않겠다고…….”


그는 침대맡에 놓인 약초 바구니에서 지혈용 지초 가루를 한 줌 쥐어 자신의 어깨 상처에 짓이겨 발랐. 불길로 지지는 듯한 통증에 신음이 터져 나왔지만 몸을 가눌 시간조차 아까웠다. 실비아의 마력 역류와 발정기 고열을 식히기 위해서는 일반적인 약초 수준을 넘어선, 신수의 기혈을 근본적으로 정화하는 고대의 비약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 비약의 단서는 오직 한 곳, 스승 마르쿠스가 남겨둔 지하실에만 존재했다.


태오는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오두막 바닥 한구석으로 향했다. 먼지 쌓인 카펫을 걷어내자 낡은 나무 바닥이 드러났다. 그는 다치지 않은 왼손 손가락 끝으로 특정 나무옹이를 정밀하게 눌렀다.


철컥.


미세한 기계 장치 작동음과 함께 바닥 아래에 숨겨져 있던 무거운 청동 레버가 솟아올랐다. 태오는 오른손의 화상 통증을 참아내며 레버를 잡고 아래로 강하게 잡아당겼다.


우우웅.


바닥의 일부분이 서서히 아래로 내려앉으며 어두운 석조 지하실로 이어지는 가파른 계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르쿠스의 지하 연구실이었다. 스승이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결코 발을 들이지 말라며 엄포를 놓았던 금단의 공간. 태오는 계단 옆 벽면에 걸려 있던 마력 램프를 집어 들고 차가운 공기가 흘러나오는 지하실 내부로 발을 내디뎠다.


지하 연구실은 사방이 단단한 화강암 벽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온갖 기괴한 형상의 초자 기구들과 정체불명의 고대 마법진들이 먼지 속에 잠들어 있었다. 벽면을 가득 채운 거대한 책장에는 제국 마탑의 인장이 찍힌 금서들이 가득했다. 태오는 숨을 죽인 채 책장 깊숙한 곳으로 다가갔다.


그의 목표는 단 하나, 마르쿠스가 평생의 연구를 기록해 두었다는 비밀 일지였다.


“어디에 둔 거지…… 분명 이 근처에 숨겨진 공간이 있다고 하셨는데.”


태오는 왼손으로 책장 뒤편의 돌벽을 하나하나 두드렸다. 통통거리는 맑은 소리가 울리던 도중, 유독 둔탁하고 빈 소리가 나는 벽돌을 발견했다. 힘을 주어 누르자 돌벽이 안쪽으로 밀려 들어가며 작은 비밀 보관함이 나타났다.


그 안에는 검은색 가죽으로 단단히 제본된 낡은 책 한 권이 놓여 있었다. 표지에는 아무런 글씨도 적혀 있지 않았지만, 은은한 은빛 마력의 파동이 흐르고 있었다. 마르쿠스의 ‘비전 약초학 일지’였다.


태오는 떨리는 손으로 일지를 꺼내 첫 장을 넘겼다. 먼지 냄새와 함께 바래진 양가죽 종이 위에 빼곡히 적힌 스승의 친필 글씨들이 마력 램프의 푸른 불빛 아래 드러났다.


처음 몇 장은 평범한 신수 생리학과 희귀 약초 배합 공식들이 적혀 있었다. 그러나 페이지를 넘길수록 일지의 내용은 기괴하고 끔찍한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제국력 742년. 황실 연구소의 세 번째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신수의 신성 코어를 인간 마법사에게 강제로 이식하는 실험. 대상은 포획된 백은 늑대 부족의 어린 성수들이다. 그들의 살아있는 가슴을 가르고 경맥을 추출하는 과정은 지옥과 같았으나, 제국의 번영을 위해 나는 메스를 내려놓을 수 없었다…….]


“이, 이게 무슨…….”


태오의 눈동자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일지에 적힌 세밀한 해부도와 마력 적출 술식의 설계도들은 인간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잔혹했다. 살아있는 신수의 신경을 하나하나 마비시키고 코어의 마력을 빨아들이기 위해 고안된 ‘신수 구속용 마법 사슬’의 초기 설계도 역시 선명하게 그려져 있었다. 그 설계자 란에 적힌 서명은 의심할 여지 없는 마르쿠스의 이름이었다.


스승 마르쿠스는 단순한 은둔 약사가 아니었다. 제국 황실 연구소에서 신수들을 생체 실험하고 도구로 삼아 학살했던 광기 어린 수석 의관, 그 사악한 음모의 핵심 주도자였던 것이다.


[나는 신수들의 심장을 가르고 피를 정제하며 깨달았다. 신수의 힘은 갈취하는 순간 오염된다는 것을. 인간은 결코 신수와 동화될 수 없으며, 오직 그들의 고통 위에 세워진 마법 제국은 언젠가 스스로 파멸할 것이다. 나의 죄업은 씻을 수 없으며, 나는 이 더러운 학살의 탑에서 탈출하기로 결심했다…….]


일지의 후반부는 스승의 처절한 참회와 속죄의 기록으로 채워져 있었다. 마르쿠스는 황실 연구소를 탈출하며 자신이 저지른 죄를 조금이나마 씻기 위해, 신수들의 깨진 코어와 마력 오염을 부작용 없이 완벽하게 정화할 수 있는 태고의 비약을 연구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스승님이…… 실비아를 저 지옥으로 몰아넣은 장본인이었다니.”


태오는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극심한 도덕적 혼란을 느꼈다. 평소 자신을 따뜻하게 가르쳐 주며 선량한 의원의 마음가짐을 가르쳐 주었던 스승의 뒤편에, 이토록 추악하고 피비린내 나는 그림자가 숨겨져 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실비아가 그토록 인간을 증오했던 이유, 그리고 그녀의 목을 옥죄던 사슬의 기원이 모두 자신의 스승에게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에 태오는 숨이 막혔다.


그러나 괴로워할 시간은 길지 않았다. 침실에서 신음하는 실비아의 얼굴이 뇌리를 스쳤다.


‘스승님이 저지른 죄악이라 할지라도…… 그 지식은 지금 저 아이를 살릴 수 있는 유일한 열쇠다. 스승님의 과오를 내가 대신 속죄하겠어.’


태오는 굳건한 결의와 함께 일지의 마지막 장을 넘겼다. 그곳에는 마르쿠스가 평생을 바쳐 완성한, 부작용 없이 신수의 코어를 수복하는 유일한 고대 비약, ‘월광초 정화 비약(月光草 淨化 秘藥)’의 조제 공식이 적혀 있었다.


하지만 공식 위에 붉은색 마법 인장이 굳게 찍혀 있었다. 고대의 술식으로 봉인된 지식이었다. 태오가 마력을 주입하려 하자, 일지 표면의 은색 룬 문자들이 붉게 타오르며 그의 마력을 강하게 밀어내기 시작했다.


지이이이잉!


“윽!”


강력한 반발력에 태오의 몸이 뒤로 밀려났다. 일지 위로 반투명한 마법 사념체가 피어오르더니, 엄숙하고 차가운 목소리로 지하실을 울렸다.


[가문의 비전을 탐하는 자여, 지식의 무게를 감당할 자격이 있는지 증명하라. 신수의 경맥이 오염되어 화기가 치솟고 코어가 붕괴하려 할 때, 가장 먼저 차단해야 할 세 가지 요혈의 이름과 침술의 깊이를 고하라. 답하지 못한다면 일지는 영원히 스스로를 불태울 것이다.]


결계 사념체의 의학적 시험이었다. 까딱 잘못 답했다면 일지가 통째로 재가 되어 사라질 판이었다. 태오는 마른침을 삼키며, 과거 윤노인 밑에서 뼈를 깎는 노력으로 외웠던 신수 기맥 지도와 마르쿠스의 가르침을 머릿속으로 급격히 회전시켰다.


‘실비아는 지금 마탑의 냉독과 체내 화기가 충돌하는 마력 역류 상태야. 이럴 때는 화기를 억누르는 게 아니라, 흐름을 분산시켜 방전시켜야 해.’


태오는 떨리는 목소리로 단호하게 답했다.


“가장 먼저 신성 코어의 과부하를 막기 위해 심장의 근원인 ‘전중혈(膻中穴)’을 백은침으로 삼 분(三分) 깊이로 자침해 마력 흐름을 일시적으로 안정시킨다. 그 후 화기가 뇌로 치솟는 것을 막기 위해 머리의 ‘백회혈(百會穴)’을 일 분 오 리(一分五厘) 깊이로 찔러 기혈을 식히고, 마지막으로 사지에 정체된 냉독을 배출하기 위해 발바닥의 ‘용천혈(湧泉穴)’을 이 분(二分) 깊이로 사선 자침하여 지맥으로 방전시켜야 한다!”


정교하고 완벽한 한의학적 분석이자 신수 생리학에 기반한 처방이었다.


태오의 답변이 끝나자, 허공을 부유하던 사념체가 일시적으로 침묵했다. 이윽고 사념체의 차가운 눈빛이 부드러운 만족감으로 변하며 스르륵 녹아내렸다.


스우우우.


일지를 굳게 닫고 있던 붉은 인장이 마법처럼 풀리며 책장이 스르륵 열렸다. 그리고 그 찬란한 은빛 광휘 속에서, 손바닥만 한 크기의 빛나는 푸른 나비 날개를 가진 꼬마 정령이 기지개를 켜며 허공으로 떠올랐다.


“아함~! 대체 몇 년 만에 깨어나는 거야? 먼지가 너무 많잖아!”


책의 정령, 아라(아라)였다. 그녀는 까칠한 목소리로 툴툴거리며 허공을 날아다니다가, 만신창이가 된 태오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뭐야? 나를 깨운 게 겨우 이런 나약하고 피투성이인 인간 약사 청년이었어? 한심하긴!”


“네가…… 일지의 정령인가?”


태오가 램프 불빛 아래에서 숨을 몰아쉬며 묻자, 아라는 콧대를 높이며 꼬리를 살랑거렸다.


“그래! 이 위대한 황금 비전서에 깃든 지식의 정령 아라 님이시다! 하지만 칭찬은 접어둬. 지금 네 방 침대에 누워 있는 저 늑대 신수 상태를 보아하니, 잡담이나 나누고 있을 시간이 없거든?”


아라는 오두막 위쪽을 향해 작은 날개를 파닥거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저 늑대 여왕의 코어가 마력 역류로 터지기 일보 직전이야. 네 녀석이 방금 말한 침술 처방은 임시방편일 뿐, 완치하려면 일지에 적힌 ‘월광초 정화 비약’을 24시간 이내에 먹여야 해. 안 그러면 저 아이의 심장은 말 그대로 펑! 하고 터져버릴걸?”


태오는 일지를 내려다보았다. 비약의 제조법은 완벽하게 해독되어 머릿속에 각인되었지만, 가장 중요한 핵심 재료의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월광초…… 안개의 숲에서 자란다는 그 약초인가?”


그 순간, 아라의 장난기 가득하던 얼굴이 극도로 진지하고 차갑게 굳어졌다. 그녀는 태오의 코앞까지 날아와 날카로운 경고를 내리꽂았다.


“꿈 깨, 인간 청년! 월광초는 평범한 수풀 속에서 자라지 않아. 오직 달빛의 정기가 가장 강하게 내리쬐는 안개의 숲 북쪽 끝,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가파르고 험준한 ‘월광초 절벽’의 수직 틈새에서만 자란단 말이야! 게다가 지금 밖에는 미친 폭풍우가 몰아치고 있어. 마력도 없는 나약한 범인(phàm nhân)인 네 몸으로 그 절벽을 오르겠다고? 가기도 전에 바람에 쓸려 절벽 아래로 추락해 뼈도 못 추릴걸!”


아라의 벼락같은 경고가 지하실의 차가운 정적을 깨뜨렸다. 창밖을 때리는 폭풍우의 포효가 마치 태오의 무모함을 비웃는 비명처럼 더욱 거세게 울려 퍼졌다.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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