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무덤의 사념, 밝혀지는 멸문의 진실
쿠구구구궁.
대지가 낮게 울부짖는 소리가 얼어붙은 백은벽 폭포 뒤편, 고대 신수의 무덤 깊은 곳까지 스며들었다.
차가운 석조 제단 위. 윤태오는 붉은 선혈로 얼룩진 채 미동도 없이 누워 있었다. 그의 왼쪽 쇄골과 어깨에는 마르쿠스의 은침이 깊숙이 자침되어 있었다. 응급 지혈 침술로 분출하던 피는 간신히 멎었지만, 이미 바닥을 드러낸 생명력 탓에 그의 안색은 종이처럼 하얗게 질려 있었다. 갈비뼈가 골절된 가슴팍은 숨을 쉴 때마다 위태롭게 들썩였고, 붕대로 감싸인 오른손바닥에서는 미세한 피로가 배어 나왔다.
“태오…… 정신 차려봐, 제발…….”
실비아는 제단 옆에 무릎을 꿇은 채 태오의 손을 꼭 쥐고 있었다.
단추가 전부 날아가 버려 앞자락이 헐거워진 마력 차단 가죽 코트 사이로, 그녀의 고결한 은빛 머리칼이 태오의 뺨 위로 흩어졌다. 실비아의 하얀 늑대 귀와 꼬리가 극도의 불안감으로 잘게 떨렸다. 코어가 절반쯤 회복된 영수(영물)의 경지에 올랐음에도, 지금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태오가 입은 상처는 그녀를 지키기 위해 대신 단검을 맞고, 안개의 핵을 폭주시킨 대가였다. 그 고통과 쇠약함이 영혼의 링크를 통해 실비아의 가슴속으로도 욱신거리며 전해졌다. 고통 대행의 감각이 역류하고 있었다.
“약…… 약이 있어야 해.”
실비아는 울먹이며 태오가 메고 온 약초 가방을 다급하게 뒤졌다. 가방 안쪽 비밀 칸을 더듬던 그녀의 손끝에 차갑고 단단한 유리병 하나가 걸렸다. 스승 마르쿠스가 남겨둔 최후의 보루, 빈사 상태의 생명도 일시적으로 보존한다는 연명의 영약인 ‘마르쿠스의 비상 약제’였다.
실비아는 서둘러 병마개를 뽑았다. 영롱한 은빛 오라를 풍기는 액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태오는 의식을 잃어 스스로 약을 삼킬 수 없는 상태였다.
실비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의 황금빛 눈동자에 단호한 결의가 스쳤다. 그녀는 주저 없이 비상 약제를 자신의 입안에 머금었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숙여, 태오의 창백하게 갈라진 입술 위로 자신의 입술을 포개었다.
따뜻하고 달콤한 약액이 그녀의 숨결과 함께 태오의 목구멍 너머로 흘러 들어갔다. 태오의 목울대가 작게 들썩이며 약을 받아들였다. 실비아는 혹여 약이 흘러내릴까 봐 그의 목덜미를 부드럽게 감싸 안으며 입술을 떼지 않았다. 두 사람의 숨결이 얽히고, 태오의 차가웠던 체온이 미세하게 상승하는 것이 입술을 통해 고스란히 전해졌다.
비상 약제가 체내에 퍼지자, 태오의 가슴팍에 새겨진 각인 문양이 은은한 빛을 내뿜었다. 지독한 어둠 속에서 헤매던 태오의 의식이 아스라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신수 교감 독심술이 무의식중에 발동하며, 자신을 안고 눈물 흘리는 실비아의 절박한 슬픔과 맹목적인 애착이 영혼을 타고 흘러 들어왔다.
‘실비아…….’
태오가 간신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눈물범벅이 된 채 자신을 내려다보는 은발의 미소녀가 보였다.
“태오! 정신이 들어?”
“으윽…… 실비아, 울지 마…… 난 괜찮으니까.”
태오는 안심시키려 미소를 지으려 했지만, 부러진 갈비뼈가 조여들며 신음이 터져 나왔다.
그 순간, 석조실 전체가 격렬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웅우우웅!
태오가 쓰러지며 제단 바닥의 오래된 룬 문자 홈에 흘려보냈던 정화의 피가 찬란하게 공명하고 있었다. 제단에서 뿜어져 나온 황금빛 오라가 사방의 벽면을 타고 흐르더니, 무덤 중앙의 거대한 석문으로 집중되었다. 석문을 감싸고 있던 백색 서리가 순식간에 녹아내리며, 그 너머에서 차원이 다른 신성한 위압감이 흘러나왔.
스아아아아.
눈부신 백색 빛이 제단 중앙에서 뿜어져 나와 허공으로 솟구쳤다. 광휘가 서서히 응축되더니, 고풍스러운 도포를 입고 자애로운 미소를 지은 백발의 노인 형상이 나타났다. 실체 없는 사념체였지만, 그가 풍기는 위압감은 대륙의 그 어떤 강자보다 웅장했다.
고대 신수들의 성황이자 태오 가문의 시조, ‘윤도경’의 사념체였다.
“위대한 정화의 불꽃이 마침내 이곳을 깨웠구나.”
윤도경의 깊고 맑은 목소리가 석조실 내부에 울려 퍼졌다. 그의 사념체가 아래를 내려다보며 태오의 영혼을 투시하듯 응시했다.
그 찰나, 윤도경의 신체에서 뿜어져 나온 고대 성황의 영적 압박이 부상당한 태오의 마력 회로를 강하게 짓눌렀다. 쇠약해진 태오의 경맥이 비명을 지르며 가슴 통증이 도졌다.
“크윽……!”
태오가 가슴을 쥐어짜며 비틀거리자, 실비아의 황금빛 눈동자가 순식간에 분노로 붉게 물들었다.
“내 반려에게서 물러나, 이 유령 영감탱이야!”
실비아는 이빨을 드러내며 포효했다. 그녀의 등 뒤로 거대한 백은색 늑대의 환영이 솟구쳤다. 실비아는 번개 같은 속도로 도약하여 윤도경의 사념체를 향해 날카로운 발톱을 휘둘렀다. 은빛 참격이 허공을 갈랐다.
스스슥.
그러나 실비아의 강력한 손톱은 아무런 저항도 없이 윤도경의 몸을 통과해 버렸다. 사념체는 영적인 존재였기에 물리적인 타격이 전혀 통하지 않았다. 윤도경은 자애로운 눈빛으로 실비아를 바라보며 나직하게 읊조렸다.
“백은 늑대의 여왕이여, 여전히 성정이 불같구나. 하지만 내 후손의 자격을 시험하는 것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
윤도경의 손가락 끝에서 백색 마력 실이 흘러나와 실비아의 전신을 부드럽게 결박했다. 마력이 고갈된 실비아는 그 영적인 구속을 풀지 못하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실비아를…… 다치게 하지 마십시오.”
태오는 이를 악물고 제단 위에서 몸을 일으켰다. 어깨의 은침이 흔들리며 극통이 밀려왔지만, 그는 굴하지 않았다. 그는 직감했다. 이 존재는 적이 아니라, 자신을 시험하는 가문의 선조라는 것을.
태오는 무력이 아닌 지혜를 선택했다. 그는 오른손의 붕대를 풀었다. 실비아의 손톱에 긁혔던 세 줄기 자상에서 여전히 붉은 정화의 피가 맺혀 있었다. 태오는 그 손을 제단 중앙의 핵심 룬 홈에 단호하게 때려 박았다.
“제 피로 증명하겠습니다. 내가 이 가문의 정당한 후계자임을!”
화아아아악!
태오의 정화의 피가 제단 수맥으로 흘러 들어가는 순간, 석조실 전체가 눈부신 은백색 광휘로 가득 찼다. 윤도경의 사념체는 태오의 피가 가진 정화의 순도를 확인하고 허허롭게 웃음을 터뜨렸다.
“과연…… 멸망의 풍파 속에서도 정화의 의지는 꺾이지 않았구나. 합격이다, 나의 아이야.”
윤도경이 손을 내젓자 실비아를 묶고 있던 결계가 스르륵 풀렸다. 동시에 사념체는 태오의 이마에 손가락을 얹었다. 태오의 영혼 깊은 곳에 잠들어 있던 고대 전승 지식과 ‘정화의 피의 진정한 기원’이 강제로 깨어나며 그의 뇌리로 폭포수처럼 쏟아져 들어왔.
“아아악!”
극심한 정보의 과부하로 인해 태오는 머리가 깨질 듯한 편두통을 느끼며 비명을 질렀다. 뇌리 속에 수많은 고대 의학 공식과 침술의 극의, 그리고 지독하게 숨겨진 진실들이 선명하게 각인되기 시작했다.
정화의 피.
그것은 단순한 해독제가 아니었다. 고대 성황의 혈통만이 지닌 권능으로, 상처받은 신수 여왕들의 영혼과 코어를 완벽하게 동조시키는 ‘영혼 각인’의 유일한 촉매였다. 피를 나눌수록 신수들은 태오에게 본능적인 귀속감과 애착을 품게 되며, 그녀들의 무력은 태오의 생명력과 동조되어 점진적으로 해방되는 우주적 규칙이었다.
그리고 그 전승의 흐름 끝에서, 태오는 가슴을 도려내는 듯한 참혹한 가문의 멸문 진실과 마주했다.
과거 제국 황실과 마탑은 신수들의 힘을 갈취해 인간 마법사들에게 강제로 이식하는 사악한 ‘생체 실험’을 기획했다. 태오의 친부모인 윤서현과 백하은은 황실 연구소의 최고 학자였으나, 이 비인도적인 학살에 정면으로 반대했다.
제국은 정화의 피를 가진 태오의 가문을 완전히 독점하여 신수들을 강제로 노예화하려 했고, 이에 불응한 태오의 부모를 반역죄로 몰아 처참하게 처형했다. 태오의 가문이 하루아침에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은, 신수를 지키려던 숭고한 저항의 결과였다.
“제국…… 황실 놈들이 내 부모님을…….”
태오의 눈동자가 분노와 슬픔으로 붉게 충혈되었다. 그의 주먹이 하얗게 떨렸다. 단순한 생존을 넘어, 제국의 추악한 시스템을 반드시 무너뜨려 부모님의 원수를 갚겠다는 맹렬한 복수심이 그의 영혼에 낙인처럼 새겨졌다.
윤도경의 사념체가 서서히 흐려지며 태오를 자애롭게 바라보았다.
“시간이 없다, 나의 후계자여. 네 부모가 목숨을 걸고 지켜낸 마지막 연구 유산이 아직 세상에 남아있다. 그것은 제도 아폴리온의 하류층 구역에 신분을 숨기고 은거 중인 네 이모, ‘백하윤’에게 보관되어 있다. 힘을 길러 제도로 향하거라.”
사념체는 마지막 말을 남긴 채 은은한 백색 가루가 되어 허공으로 흩어졌다.
태오는 제단 위에 주저앉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가문의 진실과 복수의 명분, 그리고 ‘백하윤’이라는 다음 목표는 명확해졌다. 하지만 부러진 뼈와 찢어진 경맥은 여전히 그의 육체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지금의 몸으로는 무덤 밖으로 한 걸음도 나갈 수 없는 물리적 제약 상태였다.
그 순간, 폭포 뒤편 입구 결계막을 흔드는 기분 나쁜 진동이 전해졌다.
스으으으.
무덤 외부에서 제국 수색대 병사들이 결계의 미세한 흔적을 추적하며, 얼어붙은 백은벽 폭포 주변을 수색하기 시작하는 서늘한 살기가 석조실 내부까지 음산하게 스며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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