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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은의 방패, 폭풍의 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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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은 찰나였으나, 그 안에 담긴 죽음의 무게는 태산보다 무거웠다.


벽난로의 불꽃과 기름등이 거짓말처럼 꺼진 오두막 내부. 창밖을 때리는 폭풍우의 포효마저 일시에 멀어지는 듯한 기묘한 침묵 속에서, 윤태오는 자신의 왼쪽 쇄골과 어깨를 타고 흐르는 뜨거운 선혈을 느꼈다. 섀도우 베일의 첫 번째 기습 단검에 당한 상처였다.


갈비뼈가 삐걱거리는 통증과 어깨의 찢어지는 듯한 자상이 전신을 마비시켰다. 오른손바닥에 감긴 붕대 사이로도 실비아가 남겼던 세 줄기 손톱 자국이 다시 벌어지며 붉은 피가 가늘게 배어 나왔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피비린내가 허공을 가득 채웠다.


‘움직여야 해. 이대로 누워 있으면 다음 일격에 심장이 뚫린다.’


태오는 필사적으로 몸을 움직이려 했으나, A급 살수가 내뿜는 암영 마력의 끈적한 기운이 상처를 통해 침투해 그의 온몸을 납처럼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암흑 속에서, 아무런 반사광도 없는 흑철 단검의 서늘한 칼끝이 태오의 가슴팍을 향해 수직으로 내리꽂히는 궤적이 어렴풋이 느껴졌다. 피할 수 없는, 완벽한 죽음의 궤적이었다.


바로 그 순간, 태오의 가슴팍 안쪽에서 기적이 일어났다.


화르륵!


태오의 셔츠 깃 너머, 실비아가 자신의 마력 코어를 깎아 건네주었던 ‘실비아의 푸른 목걸이’가 피보다 더 붉은빛을 폭발하듯 뿜어내기 시작한 것이다. 태오의 치명상과 급격히 떨어지는 생명 신호를 감지한 목걸이가 영혼의 공명을 일으키며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태오오오오오!”


오두막 구석에서 이성을 완전히 잃은 실비아의 절규가 터져 나왔다.


자신을 위해 목숨을 걸고 절벽을 기어올라 월광초를 꺾어오고, 온몸이 부서져 가면서도 결코 자신을 포기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던 유일한 인간. 그 소중한 반려가 눈앞에서 검은 피를 흘리며 쓰러진 모습을 본 순간, 그녀의 머릿속을 지배하던 이성의 끈이 무참히 끊겨 나갔다.


인간의 배신과 학대 속에서 얼어붙어 있던 그녀의 영혼 코어가 맹렬한 분노와 함께 스스로를 강제로 연소시키기 시작했다. 가죽 장인 마가렛이 지어준 마력 차단 가죽 코트의 은빛 단추들이 그녀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압도적인 신성 마력을 견디지 못하고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


쿠구구구궁!


오두막 바닥이 지진이라도 난 듯 격렬하게 요동쳤다. 실비아의 등 뒤에서 눈부시게 빛나는 은빛 마력이 소용돌이치며, 이윽고 거대하고 신비로운 백은색 늑대의 환영이 그 자태를 드러냈다. 고대의 수호 기술, [야수 수호의 방패]였다.


은빛 늑대의 거대한 두 앞발이 허공을 가르며 쓰러진 태오의 몸을 부드럽고도 단단하게 감싸 안았다.


깡!


태오의 심장을 꿰뚫으려던 섀도우 베일의 흑철 단검이 은빛 방어막의 표면에 정면으로 부딪쳤다. 어둠 속에서 고막을 찢는 듯한 날카로운 금속음과 함께 찬란한 은빛 스파크가 사방으로 뿜어져 나왔다. 단검 끝에 실려 있던 암영의 살기가 방어막의 신성한 힘에 닿자마자 하얀 연기를 내뿜으며 흔적도 없이 정화되어 사라졌다.


“……!”


섀도우 베일의 붉은 안광이 처음으로 경악으로 흔들렸다. 고작 코어의 절반밖에 회복하지 못한 봉인 상태의 신수가, 자신의 필살 일격을 이토록 완벽하게 차단해 낼 줄은 미처 예상치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살수가 충격에서 벗어나기도 전에, 은빛 바람이 암흑을 찢어발겼다.


“감히…… 감히 내 반려를 다치게 해? 이 더러운 쥐새끼가!”


실비아의 목소리에는 인간 미소녀의 청아함 대신, 대지를 흔드는 여왕의 진노가 깃들어 있었다. 가죽 코트의 후드가 뒤로 젖혀지며 눈부신 은발과 분노로 붉게 타오르는 황금빛 눈동자가 암흑 속에서 번뜩였다.


타앗!


실비아는 바람보다 빠른 속도로 바닥을 박차고 도약했다. 야수 수호의 방패가 태오를 완벽히 감싸고 있는 한, 그녀에게 망설임 따위는 없었다. 공중에서 섀도우 베일이 급히 단검을 회수해 방어 태세를 취하려 했으나, 영수(영물) 경지에 도달한 신수 여왕의 신체 속도는 인간 살수의 반응 한계를 아득히 초월해 있었다.


콰드득!


실비아의 가녀린 하얀 손이 섀도우 베일의 오른손목을 정확히 움켜쥐었다. 그리고 단 한 치의 자비도 없이 악력을 가했다. 강철마저 으스러뜨리는 괴력에 살수의 손목뼈가 무참하게 바스러지며 흑철 단검이 바닥으로 뎅그렁 떨어졌다.


“크윽……!”


암살자가 고통 신음을 흘리며 왼손으로 숨겨둔 보조 단검을 뽑으려 하자, 실비아의 다른 쪽 손이 번개처럼 뻗어나가 그의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꺼져.”


실비아는 살수의 거구를 장난감처럼 가볍게 들어 올려, 오두막 벽면을 향해 사정없이 처박아 버렸다.


쿠웅! 콰콰쾅!


오두막의 단단한 참나무 벽이 큰 소리를 내며 움푹 내려앉았고, 천장을 지탱하던 대들보가 비명을 지르며 갈라졌다. 전신 뼈가 산산조각 나는 소리와 함께 섀도우 베일의 몸이 마룻바닥으로 무너지듯 흘러내렸다. 단 한 번의 유효타도 허용하지 않은, 압도적인 여왕의 단죄였다.


벽 구석에 웅크리고 있던 수습 약초꾼 소년 한스는 눈앞에서 벌어진 초현실적인 전투에 이빨을 딱딱 마주치며 벌벌 떨고 있었다.


“하, 한스…….”


태오가 피가 섞인 기침을 토해내며 간신히 그의 이름을 불렀다.


“태, 태오 형! 어깨에서 피가 너무 많이 나요! 어떡해요, 어떡해……”


한스가 울먹이며 태오에게 기어왔다. 태오는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약초 가방을 가리켰다.


“가방 안쪽 가죽 쌈지에…… 마르쿠스의 은침이 있다. 꺼내라.”


“예, 예!”


한스가 허둥지둥 가방을 뒤져 은백색으로 빛나는 침통을 태오에게 건넸다. 태오는 오른손바닥의 통증과 어깨의 자상을 억누르며, 가느다란 은침 세 개를 뽑아 들었다.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렸지만, 약사로서의 이성은 흐려져 가는 의식을 단단히 붙잡아 매고 있었다.


태오는 자신의 왼쪽 어깨 주변의 주요 지혈 혈자리인 견정혈(肩井穴)과 대저혈(大杼穴)을 향해 거침없이 은침을 찔러 넣었다. 침술 및 경락 차단술의 응용인 [응급 지혈 침술]이었다.


지직, 은침이 박히자마자 미세한 정화 마력이 상처 주변의 혈관을 은빛 마력막으로 부드럽게 봉인하기 시작했다. 울컥거리며 뿜어져 나오던 검붉은 피가 눈에 띄게 잦아들며 멈춰 섰다.


“하아…… 하아……”


급한 불은 껐지만, 과다 출혈로 인한 현기증이 머릿속을 빙글빙글 돌게 만들었다.


그때, 실비아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태오의 곁으로 다가와 무릎을 꿇었다. 그녀의 은빛 귀와 꼬리가 극도의 불안감으로 사정없이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태오의 피 묻은 뺨을 부드러운 손길로 어루만지며 눈물을 흘렸다.


“태오, 괜찮아? 내가…… 내가 늦어서 미안해. 나 때문에 또 피를 흘렸어……”


“아니야, 실비아. 네가 날 구했어. 고마워.”


태오는 미소를 지으려 애썼지만, 오두막 외부에서 들려오는 불길한 파동이 그의 미소를 굳어지게 만들었다.


웅우웅!


오두막을 둘러싼 안개의 장막이 비정상적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단순한 정찰조의 기척이 아니었다. 대지를 통째로 짓누르는 육중한 철갑의 무게와, 공기를 타오르게 만드는 강력한 마력 오라의 파동이 사방에서 밀려들고 있었다.


태오의 신수 감정안이 다시 한번 경고를 보냈다. 오두막 사방을 둘러싼 붉은색 살기 수치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었다.


[살기 감지: 95%]

[적대 부대: 제국 남부 수색 기사단 본대 - 포위 완료]

[지휘관: 황금 기사 (상급) 바르토]


‘바르토가 직접 움직였군. 암살자가 실패할 것을 대비해 이미 본대를 이끌고 오두막을 완전히 포위한 거야.’


태오의 짐작이 맞았다. 오두막 외부의 어둠 속에서, 황금빛 오라를 전신에 두른 육중한 강철 갑옷의 사내, 바르토 기사단장이 수십 명의 정예 기사들을 거느린 채 천천히 걸어 나오고 있었다. 그의 흉포한 눈빛이 빗속에서 번뜩였다.


“더러운 이종족 놈들과 반역자 약사 놈이 여기 숨어 있었군!”


바르토의 목소리가 숲 전체를 뒤흔들었다.


“마탑의 살수를 해치운 모양이다만, 내 기사단의 포위망을 뚫을 수는 없다! 얌전히 무릎을 꿇고 신수를 넘긴다면, 약사 놈의 목숨줄만은 살려주마!”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바르토가 들고 있던 대검을 공중을 향해 크게 휘둘렀. 검날을 따라 타오르던 황금빛 마력 오라가 거대한 참격이 되어 오두막을 향해 날아들었다.


콰아아아앙!


오두막의 지붕 절반과 정성껏 가꾸어 둔 결계 위장막의 절반이 바르토의 일격에 허무하게 찢겨 나갔다. 쩍 갈라진 천장 틈새로 차가운 폭우가 사정없이 쏟아져 내리며 벽난로의 잔해를 적셨다. 머리 위의 하늘은 온통 제국의 횃불과 황금빛 오라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태오 형! 지, 지하 연구실로 도망쳐야 해요!”


한스가 갈라진 목소리로 울부짖으며 바닥의 비밀 레버를 가리켰다. 하지만 태오는 고개를 저었다.


“안 돼, 한스. 바르토의 대지 분쇄 참격 때문에 지하실로 통하는 입구의 버팀목들이 무너져 내렸어. 지금 들어갔다간 산 채로 매장당할 뿐이다. 퇴로가 완전히 차단됐어.”


실비아가 태오의 몸을 자신의 코트로 감싸 안으며 이빨을 드러냈다.


“태오, 내가 저 인간들을 전부 찢어버릴게. 내 몸이 부서지더라도 저들을 오두막 안으로 한 발짝도 들이지 않겠어.”


그녀는 자신의 코어를 다시 한번 태우려 했다. 하지만 태오는 그녀의 부드러운 손을 꽉 쥐어 저지했다. 지금 실비아의 상태로 황금 기사 바르토가 이끄는 대군과 정면으로 맞붙는다면, 코어가 영구적으로 파괴되어 사망에 이를 것이 불명확했다.


무력이 없는 약사였지만, 태오의 머릿속은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회전하고 있었다.


‘물리적인 퇴로는 없다. 그렇다면 지리적 환경과 숲의 힘을 이용해 적들의 수적 우위를 완벽히 무력화시켜야 해.’


태오는 안개의 숲 정중앙 지하 깊은 곳에 잠들어 있는 거대한 푸른 보석, [안개의 핵]을 떠올렸다. 스승 마르쿠스의 일지에 적혀 있던 안개의 숲 최종 방어 기전. 자신의 ‘정화의 피’를 주입해 안개의 핵을 일시적으로 폭주시킨다면, 숲 전체를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짙은 환각 안개 폭풍으로 덮어버릴 수 있었다.


그것만이 이 압도적인 포위망을 뚫고 실비아와 한스를 살릴 수 있는 유일한 마지막 도박이었다.


태오는 어깨의 통증을 참아내며 실비아의 품에 기대어 나직하지만 단호하게 속삭였다.


“실비아, 나를 안개의 핵으로 데려가 줘. 숲의 심장부로 가야 해.”


그의 눈동자 속에서 흔들림 없는 결의가 빛나고 있었다. 실비아는 그의 눈빛에서 숨겨진 지략과 굳건한 신뢰를 읽어내고, 붉게 물들었던 황금빛 눈동자를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폭풍우가 치는 오두막 외곽에서 바르토 기사단이 불꽃 마법 스크롤을 펼쳐 들며 오두막 전체를 불태우기 위해 서서히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한, 그 절체절명의 전야였다.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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