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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의 숲, 핏빛 사슬에 묶인 여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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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시사철 축축한 습기와 기괴한 푸른 안개가 대지를 지배하는 곳. 제국 펠트하임의 남쪽 끝자락에 위치한 ‘안개의 숲’은 인간들에게는 금기이자 버려진 영역이었다.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는 안개는 침입자의 방향 감각을 마비시켰고, 숲 깊은 곳에 도사린 고대의 덫들은 사냥감의 숨통을 가차 없이 끊어놓았다.


바스락.


그 짙은 장막 속을 한 청년이 홀로 걷고 있었다. 갈색 머리에 깊고 맑은 녹색 눈동자를 지닌 청년, 윤태오였다. 그의 낡은 린넨 약사복에서는 항상 쌉싸름한 풀 내음과 알싸한 약초 향이 배어 있었다. 태오는 등에 맨 약초 망태기를 고쳐 메며, 양아버지 윤노인이 물려준 낡은 무쇠 약초 칼을 손에 쥔 채 걸음을 옮겼다.


“오늘따라 안개가 더 깊군.”


태오는 혼잣말을 흥얼거리며 발밑을 살폈다. 윤노인이 세상을 떠난 지 벌써 수년이 흘렀지만, 태오는 여전히 그가 가르쳐 준 대로 이 위험한 안개의 숲에서 약초를 캐며 하루하루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다. 남들은 귀신이 나온다며 치를 떠는 숲이었지만, 태오에게는 이 어둡고 습한 공간이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안식처였다. 제국의 가혹한 세금과 이종족을 향한 무자비한 박해로부터 유일하게 비껴가 있는 장소였기 때문이다.


태오는 문득 약초 가방 안쪽 주머니에 든 낡은 가죽 서신을 만지작거렸다. 윤노인의 유품 속에서 발견된, 정체불명의 약사 ‘마르쿠스’가 보낸 빛바랜 편지들. 그리고 자신의 친부모가 제국의 수도에서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다는 어렴풋한 단서들. 태오는 자신이 왜 이 변방의 숲에서 약초꾼의 아들로 자라야 했는지, 그 진실을 늘 갈망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스으으으.


바람을 타고 숲의 향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질적인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비릿한 쇠 냄새, 그리고 가슴을 짓누르는 듯한 묵직하고 뜨거운 피비린내였다.


‘이건…… 마수의 피 냄새가 아니야.’


태오의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났다. 오랫동안 약초를 다루며 온갖 생명체의 기혈을 분석해 온 그의 감각이 본능적으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이것은 일반적인 짐승의 피가 아니었다. 대지의 마력을 머금은, 극도로 고귀하고 순수한 영물의 피 냄새였다.


태오는 숨을 죽인 채 소리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짙은 안개 장막을 헤치고 나아가자, 거대한 절벽 그늘 아래에 무언가가 쓰러져 있는 모습이 드러났다.


“아……!”


태오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그곳에는 은빛으로 빛나는 거대한 늑대 한 마리가 쓰러져 있었다. 몸집이 웬만한 황소보다 큰 은빛 늑대. 사시사철 달빛을 머금은 듯한 아름다운 은빛 털은 사방으로 튄 검붉은 피로 엉망진창이 되어 있었고, 옆구리에는 날카로운 창날에 찢긴 듯한 거대한 창상이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


하지만 가장 끔찍한 것은 늑대의 목에 감겨 있는 사슬이었다.


지지직, 지직!


붉은빛의 마력 파동을 내뿜으며 늑대의 가죽을 태우고 있는 쇠사슬. 제국 마탑이 이종족의 마력 회로를 강제로 얼려버리고 생명력을 빨아들이기 위해 특수 제련한 극비 무기, ‘신수 구속용 마법 사슬’이었다. 사슬이 조여들 때마다 은빛 늑대의 숨결은 눈에 띄게 가늘어졌고, 그녀의 체내에 흐르는 고귀한 신성 코어는 파열 직전까지 내몰리고 있었다.


은빛 늑대가 무거운 눈꺼풀을 간신히 들어 올렸다. 찬란한 황금빛 눈동자가 태오를 향했다. 그 눈빛에는 인간을 향한 극도의 증오와 불신, 그리고 죽음을 앞둔 여왕의 마지막 자존심이 서려 있었다. 그녀는 으르렁거리려 했으나, 목을 조여오는 사슬의 고통 때문에 핏물 섞인 신음만을 토해낼 뿐이었다.


‘괴물…… 제국의 사냥개 놈들…….’


늑대의 눈빛이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태오는 가슴이 먹먹해지는 것을 느꼈다. 제국은 이들을 대륙을 위협하는 잔혹한 괴수라 부르며 사냥했지만, 태오의 눈에 비친 은빛 늑대는 그저 차가운 쇠사슬에 묶여 신음하는, 상처받은 하나의 가련한 생명일 뿐이었다.


“진정해. 난 널 해치러 온 게 아니야.”


태오는 무릎을 꿇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는 허리춤에서 윤노인의 낡은 약초 칼을 꺼냈다. 사슬을 끊어내기 위해 조심스럽게 무쇠 칼날을 사슬 틈새로 밀어 넣었다.


깡!


콰아아앙!


“으악!”


칼날이 사슬에 닿는 순간, 엄청난 마력 반발력이 태오의 전신을 강타했다. 붉은 마법 불꽃이 튀어 오르며 태오의 오른손 손바닥을 사정없이 지져버렸다. 타들어 가는 살점의 고통에 태오는 비명을 지르며 뒤로 나자빠졌다. 약초 칼은 무참하게 부러져 바닥에 뒹굴었고, 그의 오른손바닥에는 깊고 붉은 화상 흉터가 새겨졌다.


지직! 지지직!


물리적인 타격을 감지한 마법 사슬이 더욱 맹렬하게 요동치며 늑대의 목을 죄어들었다. 사슬의 틈새에서 붉은 독기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늑대의 황금빛 눈동자가 고통으로 뒤집히며, 코어가 붕괴하는 파멸의 진동이 대지를 흔들었다. 이대로 두면 몇 분도 채 버티지 못하고 신수의 심장이 터져 죽을 것이 분명했다.


‘물리적인 힘으로는 안 돼. 이건 마력의 경맥을 억누르는 결계다. 그렇다면…….’


태오는 극심한 화상의 고통 속에서도 냉철하게 머리를 굴렸다. 스승 마르쿠스의 가르침이 뇌리를 스쳤다. 마법 사슬 역시 하나의 거대한 마력 흐름이며, 인간의 경맥처럼 기류가 모이고 흩어지는 ‘결절점’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태오는 품 안에서 가죽 쌈지를 꺼냈다. 그 안에는 마력을 극도로 잘 전도하는 희귀 백은으로 제작된 침술 도구, ‘마르쿠스의 은침’이 들어 있었다.


태오는 숨을 들이쉬며 은침 세 개를 손가락 사이에 장전했다. 그의 녹색 눈동자가 신비롭게 빛나며 사슬 표면을 흐르는 붉은 마력의 궤적을 쫓았다. 마침내 사슬의 중심 제어 장치이자 영혼을 옥죄는 세 개의 핵심 결절점이 그의 시야에 포착되었다.


하지만 평범한 은침만으로는 마탑의 강력한 구속 결계를 뚫을 수 없었다. 침 끝에 결계를 정화할 수 있는 강력한 매개체가 필요했다.


태오는 망설임 없이 자신의 왼손 검지손가락을 이빨로 세차게 깨물었다.


뚝. 뚝.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는 기이할 정도로 맑고 붉은 광휘를 뿜어냈다. 고대 약사 가문의 유산이자, 신수의 마력을 정화하고 동조할 수 있는 유일한 열쇠—태오의 혈관에 흐르는 ‘정화의 피’였다.


태오는 흘러내리는 자신의 피를 은침 끝에 정성스럽게 코팅했다. 피를 머금은 은침들이 따뜻한 은빛 성광을 내뿜으며 진동하기 시작했다.


“조금만 참아. 금방 편하게 해줄 테니까.”


태오는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은침을 꽉 쥐고, 은빛 늑대의 목덜미를 향해 몸을 날렸다. 사슬이 내뿜는 붉은 독기가 그의 얼굴과 목을 부식시키려 했지만, 태오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침을 내리꽂았다.


쉬익! 팍! 팍! 팍!


세 개의 은침이 사슬의 핵심 결절점에 오차 없이 정확하게 박혀 들어갔다.


쿠우우웅!


자침과 동시에 사슬 내부에 갇혀 있던 타락한 마력이 태오의 은침을 타고 역류하기 시작했다. 붉은 독기가 태오의 오른팔 경맥을 타고 심장으로 돌격해 들어왔다. 전신의 피가 끓어오르고 기혈이 뒤틀리는 극심한 통증에 태오는 눈을 부릅떴다.


‘윽…… 내 심장이 터질 것 같아……!’


태오는 입술을 깨물며 ‘침술 및 경락 차단술’을 기동했다. 자신의 왼손으로 가슴 주변의 요혈을 강하게 눌러 역류하는 마력의 흐름을 억지로 차단했다. 자신의 몸을 필터 삼아 사슬의 파괴적인 마력을 정화해 대지로 방전시키는 목숨을 건 사투였다. 그의 입가에서 붉은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경맥에 미세한 균열이 가며 영혼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이 전신을 지배했다.


하지만 태오는 손끝의 집중력을 잃지 않았다. 그의 정화의 피가 은침을 통해 사슬 내부의 붉은 마력을 하얗게 정화해 나갔다.


바지직! 바직!


마침내 사슬의 붉은 광휘가 완전히 가라앉고, 빛을 잃은 쇳덩어리로 변했다.


카강! 콰드득!


은빛 늑대의 목을 조이고 있던 거대한 마법 사슬이 사방으로 조각나며 바닥으로 맥없이 떨어져 내렸다. 구속이 완전히 해제된 것이다.


“하아…… 하아…….”


태오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전신의 힘이 빠져나갔고, 심장 기혈의 미세한 균열 때문에 가슴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의 입가에는 작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쓰러진 은빛 늑대의 숨결이 한결 부드럽고 안정적으로 변해 있었기 때문이다.


은빛 늑대는 사슬이 풀린 목을 어루만지듯 가볍게 털어내더니, 천천히 태오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황금빛 눈동자에 서려 있던 극도의 적대감이 옅어지고, 대신 형용할 수 없는 충격과 기묘한 감정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자신들을 도구로만 보던 제국의 인간들과 달리, 오직 자신을 살리기 위해 피를 흘리며 미소를 짓는 이 나약한 약사 청년의 존재가 그녀의 영혼에 깊은 낙인을 새긴 것이었다.


스으으으.


늑대의 거대한 몸집이 서서히 줄어들기 시작했다. 눈부신 은빛 안개가 그녀의 신체를 감싸 안더니, 이내 은발에 귀여운 늑대 귀와 꼬리가 달린 처절하게 아름다운 소녀의 모습으로 변해 태오의 품 안으로 털썩 쓰러졌다. 제국의 가혹한 억압으로 인해 힘을 잃은 ‘신수 여왕 (봉인 상태)’의 본모습이었다.


태오는 의식을 잃은 실비아를 품에 안고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안개의 숲 깊은 곳에 위치한 자신의 오두막으로 그녀를 데려가 치료를 마무리해야 했다.


그러나 평화는 쉽게 허락되지 않았다.


지이이이잉!


부서진 마법 사슬의 잔해들이 공기 중으로 흩어지며 미세하지만 지극히 예리한 마력 파동을 사방으로 방출했다. 그것은 안개의 숲 장막을 뚫고 외곽 하늘을 향해 번져나갔다.


같은 시각, 안개의 숲 경계선에 위치한 제국 남부 수색대의 임시 초소.


탁!


기사단장 바르토의 허리춤에 매달려 있던 붉은 보석 나침반의 바늘이 미친 듯이 회전하기 시작하더니, 이내 안개의 숲 정중앙을 가리키며 붉은 광휘를 뿜어냈다.


“찾았다……!”


바르토가 흉포한 눈빛을 번뜩이며 대검의 자루를 꽉 쥐었다.


“신수의 생존 흔적이 감지되었다! 전군, 무장을 갖추고 안개의 숲으로 진격을 준비하라! 이번에야말로 그 괴물 년의 목을 베어 황실에 바치겠다!”


타오르는 횃불 무리와 함께 제국 기사단의 군화 소리가 대지를 흔들기 시작했다. 붉은 사슬은 풀렸으나, 숲의 안개 너머로 더 거대하고 무자비한 추적의 그림자가 태오의 오두막을 향해 좁혀오고 있었다.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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