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 속의 쥐새끼와 속삭이는 초음파
김윤아가 떠난 후, 그린 옴팔로스의 1층은 기묘한 정적에 휩싸였다.
지맥을 타고 흘러간 정화 마력의 나비효과로 북한산 일대의 식생이 급성장하며 지상 세계가 술렁이기 시작했지만, 지하 1층의 코어 룸은 오직 야광 이끼의 푸른 숨결만이 가득할 뿐이었다. 제단 중앙에서 미약하게 깜빡이던 내 영혼의 불꽃은 깊은 명상 상태에 잠겨 있었다.
‘후우…….’
오아시스의 정화된 수맥이 끊임없이 순환하며 대지의 생명력을 길어 올린 덕분일까. 5%까지 떨어져 영혼의 한기에 시달리던 내 마력 수치는 서서히 회복세를 보이고 있었다.
[현재 코어 잔여 마력: 32%]
완벽한 상태는 아니었지만, 최소한의 방어 권능을 가동할 수준은 되었다. 나는 이성적인 생태학자의 감각을 가동해 던전 전역의 미세한 진동을 훑었다. 오아시스 유입구에서는 물이와 맑음이가 수질을 상시 감시하고 있었고, 초록 둥지의 고블린들은 조용히 숨죽인 채 가정을 돌보고 있었다.
평화로운 순환. 그러나 이 아름다운 생태계의 이면에서, 탐욕스러운 인간들의 썩은 냄새가 다시금 대지의 맥박을 타고 흘러들어왔다.
***
같은 시각, 북한산 지하 하층부에 불법으로 개척된 블랙스톤 길드의 임시 채굴지.
“쥐새끼 같은 년. 감히 길드를 배신하고 지상으로 도망쳐?”
지부장 마태수가 거친 흉터가 가득한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강철 대검을 바닥에 내리찍었다. 콰앙! 하는 파열음과 함께 단단한 화강암반에 깊은 균열이 가며 불꽃이 튀었다. 고영수가 혼자 살아 돌아와 김윤아가 던전 보스에게 살해당했다고 보고했을 때만 해도 모든 것이 계획대로 흘러가는 듯했다. 하지만 지상의 상인 정만수와 하급 약초꾼들 사이에서 ‘그린 옴팔로스에 상처를 치료해 주는 신비로운 힘이 존재한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하자, 마태수는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했다.
“지부장님, 그년이 살아있다면 우리 불법 채굴 장부와 고문 흔적이 협회 상층부에 보고되는 건 시간문제입니다.”
행동대장 강철두가 땀을 흘리며 속삭였다. 마태수의 눈빛이 붉은 살의로 이글거렸다.
“그러니 선수를 쳐야지. 협회 늙은이들이 규제 단속반을 보내기 전에, 던전 코어의 정확한 위치를 파악해 통째로 채굴해 버린다. 날쥐, 들어와라.”
마태수의 부름에 어둠 속에서 한 사내가 소리 없이 걸어 나왔. 쥐를 닮은 날카로운 눈매에 회색 가죽 위장복을 입은 F급 스카우트 헌터, 날쥐였다. 그는 비열한 미소를 지으며 마태수 앞에 고개를 숙였다.
“부르셨습니까, 지부장님.”
“네놈의 은신 실력이라면 그 빌어먹을 푸른 안개 속에서도 길을 잃지 않겠지. 즉시 침투해라. 몬스터들의 눈을 피해 던전 중심부의 코어 룸 위치를 파악하고 정밀 지도를 그려와라. 방해하는 놈이 있다면 이 다이너마이트로 흔적도 없이 날려버려도 좋다.”
마태수가 가방 가득 담긴 검은색 블랙스톤 다이너마이트 뭉치들을 건넸다. 날쥐는 침을 꿀꺽 삼키며 배낭에 그것들을 쓸어 담았다.
“걱정 마십시오. 제게는 소리를 지우는 ‘침묵의 가죽 부츠’와 광학 은신을 보장하는 아티팩트 ‘그림자 장막’이 있으니까요. 던전 시스템 따위는 제 그림자조차 밟지 못할 겁니다.”
날쥐는 가죽 장갑을 팽팽하게 당겨 끼며 어둠 속으로 스며들듯 사라졌다.
***
[경고: 던전 경계선 내에 미확인 침입자가 발생했습니다.]
[알림: 대상의 정밀 좌표를 특정할 수 없습니다. 시스템 시야가 차단되는 마력 왜곡 현상이 발생 중입니다.]
가이아의 무미건조한 시스템 음성이 내 의식을 세차게 흔들었다.
‘침입자라고? 그것도 좌표가 특정되지 않는?’
나는 즉시 마력 실가닥을 1층 진입로 전체로 뻗었다. 하지만 신비로울 정도로 아무런 흔적도 느껴지지 않았다. 바람새싹 정원의 풀잎들도 평온하게 흔들리고 있었고, 오아시스의 물결도 잔잔했다. 그러나 대지의 미세한 기압 변화가 미세하게 뒤틀려 있었다. 누군가가 공기를 밀어내며 아주 은밀하게 안으로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광학 은신(Optical Stealth) 아티팩트로군. 빛을 회절시켜 시스템의 시각적 스캔을 우회하고 있어.’
현대 지구에서 생태학자로 일하며 군사 정찰용 위장막의 원리를 분석했던 경험이 뇌리를 스쳤다. 빛을 휘게 만들어 눈을 속이는 기술. 하지만 아무리 뛰어난 위장막이라도 지구 물리 법칙의 한계를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다.
질량은 존재하고, 발걸음은 공기를 진동시키며, 영혼이 품은 사악한 감정의 파동은 대지에 흔적을 남긴다.
‘가이아, 바람을 가볍게 일으켜 동굴 바닥의 흙먼지를 날려라. 발자국 흔적을 찾는다.’
나는 미풍의 부채를 가동해 진입 통로에 가벼운 대류를 일으켰다. 보슬보슬한 황토 먼지가 공기 중에 피어오르며 바닥을 덮었다. 투명한 인간이라면 먼지 위에 발자국이 남거나, 허공에 사람 형태의 먼지 실루엣이 맺혀야 했다.
스으으으.
그러나 통로를 휩쓸고 지나간 미풍 너머에는 그 어떤 발자국도, 실루엣도 나타나지 않았다.
‘실패인가? 아니, 놈은 바보가 아니야.’
나는 즉시 생각을 바꿨다. 놈은 바닥을 밟지 않고 있었다. 날쥐라는 이름답게, 좁은 동굴 벽면의 미세한 틈새를 움켜쥐고 천장에 매달려 이동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침묵의 가죽 부츠’로 소리마저 완벽히 지운 채 말이다. 물리적인 시각과 바람의 흔적마저 우회하는 정교한 침투 전술이었다.
‘재미있군. 그렇다면 과학적인 방식으로 상대해 주지.’
나는 동굴이라는 폐쇄적 공간이 가진 가장 강력한 물리적 특성, 즉 ‘음향학(Acoustics)’을 활용하기로 했다.
1층 서쪽 끝자락에는 가파른 바위 절벽인 ‘메아리 절벽’이 존재했다. 그곳은 소리가 벽면에 반사되어 수천 배로 증폭되는 천연 도청 기지이자, 은빛 털을 가진 초음파 박쥐들의 서식지였다.
‘초음파, 내 목소리가 들리느냐.’
나는 텔레파시를 보내 절벽 천장에 거꾸로 매달려 잠들어 있던 박쥐들의 수장, ‘초음파’를 깨웠다. 수천 마리의 박쥐들이 일제히 날개를 파르르 떨며 내 영혼의 주파수에 공명했다.
‘위대한 어버이시여, 대지의 진동을 느끼고 있습니다.’
‘동쪽 진입 통로에 눈에 보이지 않는 쥐새끼가 기어들어 왔다. 메아리 박쥐 피리의 주파수를 가동해라. 인간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초고주파 음파를 동굴 전역에 방사해라.’
‘명령을 받듭니다.’
초음파가 머리에 박힌 은빛 마력 결정을 반짝이며 입을 열었다. 인간의 고막으로는 절대 인지할 수 없는, 초당 수십만 번 진동하는 고조파 음파가 동굴 통로를 향해 부채꼴 모양으로 쏘아졌다.
삐이이이—!
소리 없는 음파의 파도가 동굴 벽면과 천장, 바닥을 때리며 고속으로 반사되어 돌아왔다. 나는 던전의 의지로서 그 반사파(Reflected Wave)들의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수신하여 머릿속으로 3D 입체 지도를 그리기 시작했다.
빛은 휘게 만들 수 있어도, 사방에서 밀려드는 음파의 회절(Diffraction)과 간섭(Interference) 현상까지 완벽히 우회할 수는 없다.
벽면을 타고 흐르던 음파가 천장 모퉁이의 한 국소적인 지점에서 기묘하게 흡수되고 꺾이는 현상이 내 의식에 포착되었다.
지름 약 1.7m의 일그러진 공백.
‘찾았다, 쥐새끼.’
놈은 천장의 날카로운 종유석 틈새에 거미처럼 매달려, 숨소리조차 죽인 채 코어 룸을 향해 기어오고 있었다. 그의 위치는 정확히 오아시스 북쪽 30m 지점의 바위 틈새였다.
하지만 위치를 파악한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놈의 은신 아티팩트가 가동되는 한, 고블린 전사들이나 식물 함정들이 정밀한 피아 식별을 할 수 없어 비살상 제압이 어려웠다. 놈의 은신을 물리적인 타격 없이 강제로 해제해야 했다.
‘마력 10포인트를 소모한다. 악의 감지 파동, 전개.’
웅잉—!
내 영혼 코어에서 보이지 않는 미세한 마력 파동이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이 파동은 육체를 탐지하는 것이 아니었다. 오직 침입자의 영혼 속에 도사린 ‘살의’와 ‘탐욕’의 정신 주파수만을 저격하는 특수 탐지기였다.
파동이 천장에 매달려 있던 날쥐의 몸을 휩쓸고 지나간 순간, 기적이 일어났다.
화아아악!
아무것도 없어야 할 허공의 천장 한구석에서, 갑자기 눈이 시릴 정도로 붉고 탁한 살의의 오라와 황색의 탐욕스러운 빛무리가 폭발하듯 피어올랐다. 날쥐가 품고 있던 사악한 의지가 내 정화 마력과 반응하여 강제로 발광(Luminescence)하기 시작한 것이다.
어두운 동굴 천장에 붉고 노란 인간 형태의 네온사인이 매달려 있는 듯한 기괴하고도 명확한 광경이었다.
“……윽?! 이게 무슨 빛이야?!”
자신의 몸 주변에서 갑자기 뿜어져 나오는 붉은 발광을 목격한 날쥐가 경악 어린 비명을 질렀다. 그는 자신의 광학 은신 아티팩트가 오작동하는 줄 알고 급히 장치를 두드렸으나, 빛은 기계가 아닌 그의 영혼 자체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말도 안 돼! 내 은신이 풀린 건가?! 어떻게 이런 일이……!”
비열했던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공포로 물들었다. 자신의 완벽한 위장이 단 한 번의 물리적 충격도 없이 완벽하게 무력화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날쥐는 공포에 질려 천장에서 뛰어내려 무작정 전방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그의 발걸음이 향하는 곳은 고블린 자치회의 외곽 경계선이자, 코어 룸으로 통하는 마지막 관문인 ‘폭발하는 마력동굴’ 구역이었다.
그의 배낭 속에서 마태수가 건넨 시커먼 다이너마이트 뭉치들이 덜컹거리며 불길한 금속음을 내고 있었다.
‘더 이상 안쪽으로 들여보낼 수는 없다.’
나는 붉은 빛을 내뿜으며 질주하는 날쥐의 뒤편으로 메아리 절벽의 박쥐 무리를 가리켰다. 소리 없는 초음파의 파도가 놈의 등 뒤를 매섭게 쫓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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