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 협곡의 길 잃은 칼날
방금 전까지 검은 독수와 사투를 벌였던 중앙 오아시스 ‘생명의 우물’에는 이제 거울처럼 투명한 청정수가 잔잔한 파동을 그리며 넘실거리고 있었다. 물의 정령 아쿠아가 선사한 서늘한 정기와 성장형 정화 슬라임으로 진화한 물이의 푸른 안광이 동굴 벽면을 은은하게 비추는 평화로운 광경.
하지만 대자연의 자정 작용이 선사한 경이로운 전율을 만끽할 시간은 길지 않았다.
쿠구구구궁—!
지맥을 타고 흘러간 정화 마력이 던전 초입인 ‘북한산 비밀 균열’과 공명하며 발생한 미세한 진동. 그 진동의 끝자락을 타고, 좁고 습한 동굴 통로를 거쳐 찢어지는 듯한 인간의 비명이 내 영혼의 코어로 날카롭게 날아와 박혔다.
“으아아악! 살려줘! 배신자 놈들……!”
비명이 들려온 곳은 던전 남쪽에 위치한 ‘망각의 안개 협곡’이었다. 그곳은 1층에서도 유독 독기를 머금은 연보랏빛 안개꽃들이 군락을 이루어, 침입자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드는 수면 포자를 뿜어내는 금역 중 하나였다.
‘인간의 비명소리라니. 설마 불법 채굴꾼 놈들의 잔당인가?’
나는 즉시 천장에 매달려 있던 정찰 박쥐 ‘초음파’ 무리에게 텔레파시를 보냈다. 내 수하인 박쥐들은 인간에게는 들리지 않는 고주파 음파를 쏘아 보내며 남쪽 협곡의 상황을 실시간으로 스캔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음파가 내 영혼 코어에 투사한 이미지는, 상상 이상으로 추악한 인간의 배신 현장이었다.
“잘 가라, 윤아 씨. 마태수 지부장님이 아주 두둑이 챙겨주시더군. 네 고지식한 정의감 때문에 우리 파티까지 굶어 죽을 수는 없잖아?”
비열하게 굽은 어깨에 얄상한 금테 안경을 쓴 사내, F급 바람 마법사 고영수였다. 그의 손에는 동료들의 마력을 추적하는 ‘배신의 추적 나침반’이 들려 있었고, 그 끝은 절벽 아래로 힘없이 떨어지는 한 여성을 가리키고 있었다.
“너, 너희들…… 어떻게 나한테……!”
가죽 갑옷이 찢긴 채 피를 흘리며 절벽 아래로 추락하는 여성은 F급 검사 김윤아였다. 그녀의 몸에는 고영수가 기습적으로 주입한 바람 속성의 마력 봉인 저주가 얽혀 있어, 추락하면서도 가벼운 착지 마법조차 시전하지 못하고 있었다. 고영수는 그녀가 독기를 머금은 안개 협곡 깊은 곳으로 떨어지는 모습을 확인하고는, 비열한 웃음을 지으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던전 입구를 향해 도망치기 시작했다.
‘돈에 매수되어 동료를 독 안개 골짜기로 밀어 넣다니. 인간의 탐욕은 정말 끝이 없군.’
내면에서 생태학자로서의 깊은 혐오감이 치밀어 올랐다. 지구에서도 수많은 인간이 사리사욕을 위해 자연을 파괴하고 동료를 짓밟는 모습을 보아왔지만, 이 세계의 인간들 역시 다를 바가 없었다. 그대로 둔다면 그녀는 절벽 바닥의 날카로운 화강암반에 부딪혀 형체도 없이 으스러지거나, 협곡의 짙은 수면 독기에 질식해 괴물들의 먹이가 될 터였다.
‘하지만 죄 없는 목숨을 그냥 죽게 내버려 둘 수는 없다. 생태계의 조율사로서, 무분별한 살생은 방치하지 않는다.’
나는 구출 작전을 설계하기 위해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현재 내 등급은 ‘F+급 던전 코어 (미세 간섭)’. 제어할 수 있는 마력의 범위는 코어 룸을 중심으로 반경 50m에 불과했다. 남쪽 협곡의 절벽 지대는 내 제어 한계선의 아주 아슬아슬한 경계선에 걸쳐 있었다. 조금만 계산이 어긋나도 마력이 튕겨 나가 내 코어에 영구적인 타격을 입을 수 있었다.
‘시간이 없다. 중력가속도를 계산해야 해.’
체중 약 55kg의 성인 여성이 자유낙하할 때의 속도는 매초 9.8m/s씩 빨라진다. 절벽 높이는 약 30m. 바닥에 닿기까지 남은 시간은 단 2.5초 내외였다.
나는 먼저 코어의 마력 실가닥을 필사적으로 뻗어 낙하 지점의 대기를 자극했다. 떨어지는 그녀의 몸 아래로 강력한 상승풍을 일으켜 속도를 줄이려 한 것이다.
쿠우우웅!
하지만 내 미약한 바람 제어력은 절벽 틈새에서 불어오는 거친 천연 돌풍에 부딪혀 사정없이 뒤틀렸다. 제어되지 못한 바람은 오히려 윤아의 몸을 날카로운 바위 벽면 쪽으로 밀어붙이는 부작용을 낳았다. 콰직 하는 소리와 함께 그녀의 어깨가 바위에 부딪히며 붉은 피가 허공에 흩뿌려졌다.
‘젠장, 단순한 물리적 바람 제어로는 역부족이다! 마력 밀도가 너무 낮아!’
나는 즉시 전술을 수정했다. 환경을 억지로 바꾸려 하지 말고, 협곡이 가진 고유의 식생 환경을 이용해야 했다.
“수면 안개 살포, 기동!”
나는 협곡 바닥에 군락을 이루고 있던 보랏빛 안개꽃들에게 내 마력의 가닥을 주입했다. 그러자 안개꽃들이 일제히 꽃봉오리를 열며 엄청난 양의 수분과 진정 포자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협곡 바닥에 짙고 축축한 연보랏빛 가습 완충 안개 장막이 형성되었다.
이 짙은 안개는 공기의 밀도를 높여 윤아의 낙하 속도를 늦추는 천연 에어백 역할을 수행했다. 슈우우우— 하는 소리와 함께 짙은 안개 속으로 빨려 들어간 윤아의 신체 하강 속도가 눈에 띄게 감쇠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위기는 끝나지 않았다. 윤아의 몸에서 흘러나온 신선한 피 냄새를 맡고, 안개 협곡의 바위 틈새에서 굶주린 하급 변이 몬스터들—눈이 퇴화한 거대 동굴 지네 무리가 꿈틀거리며 기어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날카로운 이빨을 딱딱거리며 쓰러진 윤아를 향해 돌격하는 괴물들.
‘내 영지에서 무단 사냥은 금지다, 이 녀석들아.’
나는 오아시스를 정화하며 다져진 ‘정화의 미풍’ 권능을 가동했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바람의 결을 조율하여, 안개꽃들이 터트린 고농축 수면 포자를 독충들의 코앞으로 정밀 송풍했다.
스으으으.
포자 향기를 들이마신 변이 지네들이 단 3초도 버티지 못하고 다리를 흐물거리며 바닥에 쓰러져 깊은 수면에 빠져들었다. 주변의 위협을 완벽히 제거한 순간, 나는 마지막 권능을 발동했다.
“넝쿨 포획망, 급속 성장!”
협곡 바닥의 비옥한 황토 속에 숨겨져 있던 가시 없는 유연한 마력 넝쿨 정령들이 내 의지에 반응해 용솟음쳤다. 초록색 넝쿨들은 공중에서 정교하게 얽히고설키며 거대한 그물망, 아니 부드러운 요람의 형상을 갖추어 나갔다.
탁.
마침내 안개 장막을 뚫고 떨어진 김윤아의 몸이, 넝쿨들이 짜낸 탄성 가득한 요람 위에 사뿐히 안착했다. 질긴 넝쿨들은 그녀의 낙하 충격을 완벽하게 흡수하며 누에고치처럼 그녀의 온몸을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단 한 군데의 골절상도 없이, 완벽한 비살상 구출에 성공한 것이다.
“하아…… 하아……”
영혼 상태인 나에게 거친 숨결이 느껴지는 듯했다. 단 몇 초 사이에 마력을 쥐어짜 낸 탓에 코어 중심부가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지만, 한 생명을 구해냈다는 안도감이 그 통증을 지워버렸다.
넝쿨 고치에 싸인 윤아의 얼굴은 고영수의 독검에 중독되어 파랗게 질려 있었고, 호흡은 위태로울 정도로 가빴다. 이곳에 그대로 두면 안개의 독기에 질식할 터였다.
‘물이, 맑음이. 아이들을 데리고 이 여성을 코어 룸으로 이송해라. 가장 안전하고 정화된 마력이 흐르는 곳으로.’
내 명령을 받은 물이와 슬라임들이 늪지에서 기어 나와 넝쿨 고치를 부드럽게 밀며 대피소인 ‘빛나는 이끼 제단’으로 향했다.
마침내 코어 룸 중앙, 은은한 에메랄드빛 야광 이끼가 가득 피어난 제단 위에 김윤아가 눕혀졌다. 나는 그녀의 상태를 살피기 위해 마력의 시선을 집중했다. 하지만 그녀가 깊은 혼수 상태에 빠진 그 순간.
징— 징— 징—!
그녀가 허리춤에 차고 있던 낡고 이가 빠진 철검이, 코어에서 흘러나오는 순수한 정화 마력과 반응하며 기이한 공명음을 내기 시작했다. 검날에 깃들어 있던 탁한 마석의 찌꺼기들이 정화의 기운에 밀려나며, 동굴 전체를 흔드는 맑고 웅장한 진동음이 고요한 코어 룸을 가득 메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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